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의 카지노 게임 추천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지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먹이는 떡의 의미를 그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으로 이해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이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돈으로 해결을 할 수 없자, 이제 방법을 바꿉니다. 돈이 아니라, 이 무리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음식을 모두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는 무리들 중 음식을 가지고 있는 한 소년을 예수님 앞에 세웠습니다. 이 소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당시 자리에 모인 사람은 기록된 것으로 남성만 약 5,000명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여성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10,000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파가 모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넓은 잔디에 앉히고 하늘을 향해 축사를 한 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불리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떡을 모두 거두어 바구니를 세어 보니 열 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을 묵상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동안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그들에게 음식을 챙겨 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적게 모이면 음식을 준비해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들에게 음식을 먹인다는 것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뿐더러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을 먹일 것을 계획했을까요?
입장을 바꿔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수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음식을 준비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준비하려면 며칠이 걸릴 것이고, 음식을 돈 주고 구한다면 막대한 지출이 들 것입니다. 미리 준비해도 힘든 일인데, 지금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 모여들고 있는 저들에게 떡을 먹이려고 하는데, 떡을 어디서 구해야 하니?" 여기서 제자들의 중요한 반응이 나옵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순종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며 미래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아뢰이며 그 뜻에 맞도록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리들을 먹이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제자들이 그 수많은 사람들의 배를 당장 채워 줘야 하는 고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예수님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토록 작은 순종 하나가 그토록 큰 하나님의 일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빌립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턱없이 부족한 돈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른 제자 안드레는 음식을 가지고 있는 한 소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소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당시 자리에 모인 남성을 약 5,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장 안드레 앞에 있는 이 소년은 그 계수에도 포함되지 못한 자입니다. 사실, 이 소년은 음식을 가지고 있는 조건이 아니라면, 제자들과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 무리들 중 낮은 자,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가난한 자들이 먹는 보리떡과 작은 물고기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처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이 배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는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은 자를 높이고 약할 때 강함 되는 분입니다. 이 소년이 가지고 있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음식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군중의 배를 넉넉히 채워주는 복된 수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자, 작은 자를 통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가 80세였습니다. 사실 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신의 형제 이스라엘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열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난으로 에굽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었을 때, 그리고 왕자라는 막강한 신분을 가졌을 때, 그리고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는 젊은 나이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미디안으로 이주하여 도망자 신세로 40년을 살고난 뒤, 하나님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 든 것을 하나님께서 가리키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크게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왕자라는 직분을 떠나 먼 시골땅에서 양치기를 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그가 노년이 되어 기력이 쇠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사용할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17) 모세에게 남은 것이 손에 든 지팡이 밖에 없을 때,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주변에 모인 모든 무리를 먹일 음식이 턱없이 부족할 때, 예수님은 빌립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나의 역량이 한없이 부족할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와 떡 다섯 개를 주님 손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젊은 시절의 모세가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수 중에 이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으므로 앞일을 대비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종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노력으로 이룬 일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룬 일이 뒤엉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우리의 능력과 자격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카지노 게임 추천 것이 중요합니다.
혹자는 오병이어 사건을 자발적인 기부행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린 소년이 군중을 위해 자신의 음식을 기부한 것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음식을 그 자리에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당시 무리들의 반응을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해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떠난 뒤, 다음날까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그들이 앞으로 영원히 굶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떡에 집중한 나머지 그것이 나타내는 표적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자신인 것과 자신을 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소중한 말씀을 전했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떡이 자신들이 원하는 떡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대부분 그 곁은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먹이신 것은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었으나, 오히려 무리들은 떡에 눈이 팔려 말씀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연예인을 아는 것처럼,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운전을 해서 분당에 있는 한 파충류샵에 방문했습니다. 방문하기 전 알아보니, 그 파충류샵이 한 유튜버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저만 빼고 저희 모든 아이들이 그 유튜버를 알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이토록 많이 변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토록 많이 보는 유튜브의 단골 소재는 바로 '먹방'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먹방을 본다고 해서 우리의 배가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눈으로 보는 것, 심지어 그것의 맛을 느끼는 것조차도 식사의 본질이 되지 못합니다. '먹방'시청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먹방'시청으로 우리의 배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떡'을 구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떡을 먹으면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떡을 먹어도 반드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배를 채우는 떡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는 진정한 생명이 되는 영생의 떡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물질을 숭배하고 성공신화를 꿈꿉니다. 그 모든 것을 이루고 몸이 원하는 모든 것을 먹어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항상 본질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먹방을 시청하며 자신의 진정한 배고픔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무리가 떠나고 예수님께서 택한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답합니다."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물질적인 떡이 아닌,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 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 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그 어떠한 것도 그 정해진 박동 수를 늘리지 못하며, 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진정한 기적은 수많은 무리에게 한없이 부족한 가운데 넉넉하게 그들 모두를 먹인 것이 아니라, 그 떡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선포한 데 있다는 것을 믿으며 의미 없는 육신의 떡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본질인 예수님이라는 참 떡을 날마다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