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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자 Apr 04. 2025

부장님의 품격

세트메뉴와 단품 사이

오늘은 즐거운 주주총회의 날.


기업의 주주총회가 아니라 친목 모임이름이 주주총회이다. 우리는 서로를 주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모임은 총 3명의 주주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달에 한번 모여 친목을 다지며 그간 쌓인 서로의 울분을 토하고 같이 웃고 떠들며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맨다. 특별한 안건도 의결도 딱히 없다. 이번 모임은 우리 집에서 열렸다. 우리 집은 서울의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한 주주님은 서울 남쪽 끝에서, 또 한 주주님은 남과 북 그 중간 즈음에서 오신다. 중간 즈음에서 오시는 주주님은 그간 몇 차례 방문 이력이 있어 혼자 알아서 잘 찾아오셨다. 문제는 남쪽 끝에서 오시는 주주님이다.


이분은 오시는 내내 수많은 톡으로 우여곡절을 알려왔다. 결국 아파트 단지를 잘못 찾아 빙그르르 한번 돌고 겨우 주차를 했다는 톡을 받았다. 다시 한번 동과 호수를 이야기해 주고 고양이가 초인종 소리만 들으면 도망가므로 문 앞에서 톡을 달라고 덧붙였다. 우리 집은 1층이므로 주차만 하면 거의 문 앞에 선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주차했다는 톡 이후 남쪽 카지노 쿠폰의 연락은 없었다. 남쪽 카지노 쿠폰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디야?"

"11층 아니야?"

"..."


왜 이러는 걸까요.

남쪽 카지노 쿠폰은 11층에 당당히 올라가 벨을 누른 후 안에서 들리는 할머니의 누구세요라는 말에

"나지, 누구냐."라고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할머니와 친구 목소리도 구별 못하다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40년 가까이 어떤 목소리를 나로 인식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층과 11층만 헛갈렸다면 실망이 덜했겠지만 호수도 전혀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3명의 주주님이 한자리에 모였고 총회가 시작됐다. 점심 메뉴 정하기부터 의견 모으기가 쉽지 않다. 한 명은 원래 국적이 베트남이신가 할 정도로 베트남 음식을 매번 입에 올리고 한 명은 중식과 이탈리안을 번갈아 외치며 한 명은 샐러드나 한식을 주장한다. 매번 같은 대답을 하지만 주문 전에 서로 한 번씩은 묻는다. "너는 오늘 뭐가 당기니?" 얼마나 의미가 없는 질문인가.


그렇지만 오늘따라 오랜만에 수제햄버거로 의견이 통일되었다. 햄버거를 고르는데 또 한 번 난관이 있다. 너는 통새우칠리버거라고? 그럼 나는 리코타치즈버거로 할까? 머쉬룸은 어떨 것 같니? 감자튀김에는 치즈를 얹어야지. 그러다 치즈 얹은 감자튀김을 1인 1개는 소화가 안 될 수 있으니 2명이 한 개 시키기로. 나머지 한 명은 코울슬로를 선택했다. 그다음은 세트를 시키느냐 단품을 시키느냐가 남아있다. 갑자기 이제 와서 돈을 아낀다며 단품과 세트에서 줄다리기를 해본다. 남쪽 주주님이 재빨리 암산으로 숫자를 뱉어주신다. 북쪽 주주님과 중간 주주님이 방금 전에 11층 가서 벨 누르고 온 분이 맞냐며 그녀의 빠른 두뇌회전에 물개박수를 쳐드린다.


사회적 신분으로는 총괄매니저이기도 부장님이기도 한 우리이지만 주주총회에서의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주제와 행실로 가득하다. 아무렴 어떠랴. 우린 그저 만나서 좋은 친구일 뿐이고. 화딱지 났던 그간의 일을 서로에게 고자질하며 위로받고 위로함으로 또 한 달 출근할 힘을 충전할 수 있다. 이번엔 남쪽 주주님 퇴직을 막고, 다음번엔 중간 주주님 퇴직을 막으며 그렇게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힘을 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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