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 결성 시기 -
그는 쌍꺼풀이 두꺼운 데다 웃으면 얼굴이 더 둥글어지는 인상 좋은 아저씨였다. 그런 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매달리듯이 주저리주저리 내게 얘기를 했다. 평소에 공식적인 태도와는 너무나 다르게.
“......김 선생, 나 좀 살려줘. 이번에 전교조 탈퇴하지 않으면 김 선생도 짤리고, 나도 교장으로 발령받지 못하게 될 거야!”
복도 어느 구석에선가 찬 바람이 싸하게 불어왔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교조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 그냥 명석하고 인간성이 좋은 과학부장님을 통해, 전국교사협의회를 알게 되면서 몇 번의 모임에 참석을 한 것이 전부였다. 다만 모임에 소속된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논의가 좋았을 뿐, 그 당시 나는 협의회와 노조가 어떻게 다른 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교사협의회장이 노조에 가입하겠냐고 물었을 때, 내용을 잘 모르니,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었다. 그러던 차에 신문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교사의 실명이 공개되었고 거기엔 내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그러자 전교조를 결성하지 못하도록 문교부에서 교육청으로 명령이 하달되었고 그에 따라 신문에 등장했던 교사들을 일대일로 불러서 해체시키려는 회유와 협박이 진행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교감이 그런 말을 하니, 권력에 굴종하는 마음이 들어 편치 않았다.
“교감 선생님, 저는 전교조에 가입한 적이 없습니다.”
두꺼비같이 눈을 꿈뻑이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래? 그러면 해명서 한 장만 써 줘. 한 줄만 쓰면 돼.”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에게 말로 했으면 되지, 왜 그걸 작성해야 하느냐? 고 따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 상관이 아닌가?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써주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 인근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해직되었다는 소식도 들리던 즈음이라 쓰기도, 안 쓰기도 마음이 무거웠다. 퇴근 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제발 그냥 잘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로 무수히 나를 타일렀다. 뒷날 나는 해명서를 제출했다.
그 후에 전국적으로 1500명이 넘는 교사가 해직되었다. 그럴 동안에 참교육 선생님들의 해직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온 나라에서 벌어졌고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학생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건까지 생겼다. 그걸 읽으면서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교조에 가입했다. 회비를 내었다. 학교 안에서 해직 교사를 위한 모금도 주동했다. 적어도 그렇게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교부가 그런 것까지는 관심 없는지, 내가 그렇게 활동했음에도 나는 잘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전교조가 불법 단체였지만, 전국에서 동조하는 교사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지지하는 국민들도 많아 들쑤시기에는 무리였나보다.
우리 동네 해직 교사가 열었다는 슈퍼를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아저씨였다. 그런 그가 외벌이로 두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려야 했음에도, 당당히 목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졌다. 라면 한두 개나 과자 서너 개를 사면서 제발 가게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맘속으로 기도했던 생각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젊은 해직 교사가 와서 지회장을 맡았고, 무얼 어째야 좋을지 하는 논의가 매주 진행되었다. 마침, 한겨레 신문 보급소가 있어서 그곳에서 모임을 했다. 함께 모여 책도 읽고 소식지도 받아보고 어쩌다 함께 술도 마셨다. 만날 때마다 학교가 얼마나 비민주적인지, 경쟁 교육이 얼마나 나쁜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지 온통 그런 얘기들을 나누었는데도 싫증은커녕,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주고받는 대화가 기다려졌다.
어떤 날엔 친한 여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을 자취방으로 초대해서 만둣국을 나눠 먹으며 돌아가는 교육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정보가 또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이상한 해직 온라인 카지노 게임들과 어울리면 의식화된다며 그런 모임엔 가지 말라고, 교직원 회의에서 교장 훈시가 행해지기도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참교육을 하고 싶었고, 무조건 교장에게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했으며 교육 운동으로 바꿔야 할 것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구체적으로 무엇이 나를 밤새워 고민하게 했는지, 하낱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해직 교사인 그녀의 소박한 방안에서 꼬들꼬들하고 짭짤한 신라면을 국물까지 맛있게 다 털어먹던 기억이나 민주 교육에 대해서 말할 때만큼은 목울대를 울리며 목소리가 커지던 슈퍼집 아저씨의 표정밖에.
그 살벌했던 1989년 5월이 지나고 가을 무렵인가, 춘천에서 문화 공연이 있었다. 친한 제자 몇 명을 데리고 그 공연을 보러 갔었다. 제목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1등만을 강요하는 엄마 때문에 자살한 어느 여학생의 실화가 모티브였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 숨죽여 울다가 끝내 어깨를 들썩거렸던,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술을 깨무느라 혼이 났던 공연이었다. 마지막쯤인가, 해직 온라인 카지노 게임인 민선생이 부르는 직녀에게가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해직됐던 그들 대부분이 학교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들 거의 모두가 나처럼 퇴직했을 것이다. 그때 통사정을 했던 교감은 내게 낙인을 찍어두고 승진해서 학교를 옮겨갔다. 그러나 그런 그도 퇴직한 지 오래다. 그 모든 것들이 빛바랜 낙엽처럼 흐릿해져서 기억 속에 가물거리고 있다.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참교육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건 교사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 빚진 감정으로 숨죽여 응원하던 교사들이 많았었다.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은 내 새끼들이었고 반 아이가 밖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보다 먼저 호들갑을 떨며 경찰서로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우리’라는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강했던 그때였지만, 함께 하는 가운데서 강한 동지애를 나눠 가졌던 그때...... 가끔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