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듀, 전교조 -
내가 막 모 대학에서 파견을 끝내고 학교 현장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40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해냈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월급 받으며 연구를 마친 데 대한 보답으로 교육에 헌신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어쭙잖은 공명심과 의욕이 버무려진 채로 성당에 앉아 좋은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복직 발령을 받고 내가 마주한 교육 현장은 녹록하지 않았다. 경기도 △시의 **중학교는 오래된 연립주택들이 대부분인 동네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교무실은 대체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술 마시고 와서 담임에게 주정을 부렸다. 잦은 결석 중인 자기 딸무료 카지노 게임를 상담하러 와서는 딸 때문에 힘들다고 취중 하소연을 해댔던 것이다. 어떤 날은 자기 조카를 때린 놈을 찾아 쏴 죽인다고, 삼촌이 사냥총을 들고 나타나 교무실을 흔들었다. 또 어떤 날은 교무실에 들어온 묘령의 아주머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여선생의 명품 백을 들고 사라져 버렸다. 또 다른 날은 자기 딸에게 훈계했다고 어머니가 교실로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본드를 흡입한 아이도 있었고 부모가 일 나간 낮에 학교에 오는 대신 여자 친구를 불러다 담배를 피고 술 마시고 섹스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것도 어린 동생이 옆 방에 있는데도 말이다. 규칙은 왜 지켜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포르노를 보거나 일탈한 어른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골이었어도 선생님을 믿고 애들을 맡겼는데 **중학교에서는 교사에 대한 존경심은커녕 아이를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권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것은 그 학교라기 보다, 시기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때가 2005년이었으니까, 2000년경부터 시작된 촌지에 대한 떠들썩한 구설들이 온 나라에 들끓면서,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신뢰가 깨져버린 탓이 컸던 것 같다.
그래도 보통의 학부모 같으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교사를 막 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어서인지, 막무가내인 학부모가 더러 있었다. 그들이 흔들면, 교사는 의욕을 잃었고 교사가 흔들리면 학교 현장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의 아이들은 더러 근태며 학교생활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행동이 엉망인 아이들을 불러다 하나씩 설명하며 깨우치다 보면 수긍은 했다. 다행인 것은 그 당시 아이들은, 교사 앞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미안해했으며 뭐라도 듣는 시늉을 했었다.
그러나 하루 6시간 중 5시간의 수업에다 나머지 시간엔 잡무 처리를 해야 한다. 교재 연구는 당연히 집에서 해도, 쉬는 시간에까지 무료 카지노 게임들을 만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 있었다. 그러다 보면 화장실 가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는데, 그런 가운데 문제아(?)가 하나둘 문제를 일으키면 종일 온통 정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우선 생활 태도부터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교사, 교장, 학부모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논의하고 마음을 모아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해 나가야 옳았다. 그러나 교장은 자신의 영전을 위해서 일단 무조건 학력 점수를 올리라고 강짜를 부리며 반별로 은근히 비교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고과점수를 쥔 교장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든 반 아이들을 닦달해서 학습을 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도 교장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았고 우수한 교사로 윗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막 교육 석사 학위를 받고 파견에서 돌아온 상태가 아니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일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무슨 개선장군처럼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반 아이의 부모가 교장실에 전화했다. 그것도 연거푸 서너 번이나 한 것이다. 담임 때문에 자기 아이가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교장은 아이를 살살 다루라고 주의 줬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아이가 여러 날 결석했고 조직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조근조근 따지면서 바로잡으려던 참이었다. 상담하려고 엄마를 불러도 오지 않았고 엄마는 대놓고 아이만을 편들고 있어서 굉장히 다루기 힘든 상황이었다. 반 아이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도 결석도 봐 줄 것이 없었다. 무릎을 꿇리고 혼을 내는 다른 샘과 달리, 단지 말로써 아이에게 훈계하고 있었는데, 뭘 어떻게 살살 다루란 말인가? 그게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교장의 말에서 내가 느낀 것은 ‘여차해서 아이가 엇나가기라도 하면 나는 끝장이구나.’는 두려움이었다. 교장이 말하기 전까지는 ‘참 어려운 학부모를 만났구나’는 생각뿐이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부모가 나의 실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등이 서늘해졌다. 그 학부모가 꿈에 어른거렸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심한 고립감 속에서 사정을 알만한 누구에겐가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얘기하면 말만 와전될 수 있었다. 학교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얘기해 보나마나였다. 둘러보아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교조 교권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 얘기를 했다. 아이의 문제와 가정 환경과 부모 그리고 내가 느끼는 위기감 등을 내 딴에는 자세히 전했다.
한참을 들은 후, 그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도 품어안아야지요!”
무료 카지노 게임 충격을 받았다.
‘내가 품으라고?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데 어떻게 품으란 말인가?’
그가 말하는 바는 알 것 같았다. 그 부모는 고교 졸업도 전에 그 아이를 만들었고 그래서 부모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학교 규칙을 지키지 못해 졸업하지 못했던, 학교를 불신하는 학부모였던 것이다. 게다가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물품을 빼돌리는 가난한 사람들이기에 그 부모까지 품으라는 것이었다. ‘전교조 교사답게’ 가난하고 힘든 가정이니, 니가 솔선해서 잘 품고 도닥거려서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하라는 의미였다.
이제 와 보니, 복직 당시의 나는 어쭙잖은 자부심에 차서 교과뿐 아니라 생활지도에도, 완벽주의적인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교장이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주의를 주니, 절망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교권 담당 국장이라면, 심각한 갈등 상황을 겪는 나를 우선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앞으로의 대응 방법과 닥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같이 의논하고 나가자는 대안적인 얘기를 기대했었다.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는 교사가 막다른 골목에 서 있으면, 바람막이가 돼주는 것이 교권 국장이 할 일이 아닌가 하는 바램이었다. 어쩌면 내가 기댄 마지막 희망이랄까? 따라서 내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그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떠나갔다. 속으로 아듀, 전교조! 하면서.
2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고 보니, ‘그들을 품었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모나고 뾰족했던 내 심성이 살면서 뭉그러지고 둥글어진 이제 와서야, 가르치는데 참 부족했었구나! 나는 쓸데없는 자존심과 명예욕이 버무려진 채로 교단에 서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심리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이른 후에야 학교에 근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게다가 지금은, 학교 현장 어디서나 교권이 위협을 받고 교사가 자살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
나는 죽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 일이지라고. 그러나 막다른 골목길에서 벼랑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면, 시야는 좁아지고 한 곳으로 내몰리게 된다. 나는 다행히 부모의 거짓을 증명할 기회를 찾아 나의 교권을 되찾음으로써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왔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혹은 학부모 간에 갈등이 생기면,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