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마당의 변증법
우리가 거짓된 자유의 환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광장'과 '마당'이라는 두 공간의 대립 속에서 직면하는 진실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광장과 마당은 단순한 건축적 형태의 차이가 아니라, 주체화의 두 가지 대립되는 양식, 두 개의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구체화된 표현이다.
우리는 광장에 대한 순진한 오해를 버려야 한다. 소위 '자유로운 시민의 광장'이란 것은 가장 정교한 형태의 억압이다. 이는 마치 카프카의 『심판』에서 K가 법정에 도착했을 때와 같다 — 그는 법원이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광장의 '열린 공간'은 권력의 가장 교묘한 형태, 즉 보이지 않는 감시의 완벽한 무대장치다.
하버마스의 이상적 공론장? 웃기지 마라! 이것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외치는 장면만큼이나 순진한 환상이다. 광장에서 당신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권력의 문법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이야말로 라캉이 말한 "대타자의 시선(gaze of the big Other)"이 아닌가?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으로 광장의 사진을 찍으며 SNS에 업로드한다. 그러나 이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앨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의 완벽한 예시다. 당신이 셀카를 찍는 순간, 당신은 이미 신자유주의적 자기감시의 주체로 호명된 것이다. "여기 광장에서 자유를 즐기는 나!"라고 외치는 순간, 당신은 이미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마당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더 교묘한 변증법적 역전을 목격한다. 마당은 겉보기에 '닫힌'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열려있다. 이것은 헤겔적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의 완벽한 예시다. 마당이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열린 공간이 된다.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이, "의식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결정한다."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실천 — 김장, 제사, 밥상 — 은 담론적 선언 없이도 공동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행위(act)'를 발견한다. 마당에서의 행위는 라캉적 의미에서 상징계의 표면을 찢는 행위다. 그것은 선언하지 않고 수행한다.
이것은 마치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서 스코티가 마들렌을 따라다니는 장면과 같다. 겉보기에 그는 그녀를 감시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이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마당은 겉보기에 통제된 공간이지만, 그 통제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자유를 생성한다.
오늘날 광장과 마당은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양쪽을 모두 식민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한 '부정적인 것의 힘(power of the negative)'의 악용이다.
광장은 이제 스타벅스와 애플 스토어로 둘러싸인 소비의 신전이 되었다. 당신이 광장에서 느끼는 자유는 소비할 자유, 브랜드를 전시할 자유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가상세계와 같다 —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환상이다.
마당은 어떤가? 그것은 이제 부동산 가치로 환원되었다. "한옥의 정취"는 에어비앤비의 광고 문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적 실천은 '인스타그램의 미학적 배경'으로 전락했다. 마당의 비어 있음은 이제 자본에 의해 채워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부정은 새로운 긍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광장과 마당을 식민화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라캉이 말한 '환상을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fantasy)'다. 광장이든 마당이든, 두 공간의 낭만화된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대신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
'다층경(多層境)'이라는 새로운 공간 모델? 이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진정한 해방은 공간의 재배치가 아니라, 그 공간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 변혁에서 온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카지노 게임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당과 광장의 변증법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진정한 빈 공간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어려운 혁명적 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 진실에 도달한다: 진정한 공공 공간을 원한다면, 우리는 "공공 공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마치 네거티브 신학에서 신에 대해 말할 수 없음으로써 신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공 공간을 거부함으로써만 진정한 공공 공간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말한 것과 같다: "내일이 오면, 저 소위 '시민들'은 서로를 먹어치울 것이다." 조커는 여기서 사회적 질서의 허약한 기반을 정확히 짚어냈다. 마찬가지로, 광장의 질서는 그것이 감추고 있는 혼돈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마당은 어떤가? 그것은 끝없는 라캉적 주이상스(jouissance)의 공간이다. 마당에서 우리는 상징적 질서의 요구에서 벗어나, 실재계(the Real)와 직접 마주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시작점이다.
결론적으로, 카지노 게임 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동시에 모두이다. 진정한 해방된 공간은 소유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초콜릿 케이크 없는 초콜릿 케이크와 같다 — 순수한 부재의 현존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유토피아적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