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의 힘
몇 년 전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라는 책이 있었다. 꽤 자극적인 제목이라 잊히지 않는다. 제목에 낚여 읽었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열심히 살지 말아라는 아니었던 것 같고, 방향성에 대한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나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숨이 멈춘 듯한, 숨도 못 쉬고 뛰어 온 느낌을 받곤 했다. 막내가 대학을 가고 난 후 2~3년은 그런 느낌이 자주 들어서 이제 숨 쉬고 살자, 그만 뛰자 했던 시간들. 조금은 미화된 과거겠지만 꽤 열심히 살았다. 요즘의 나는 그 시절이 기억도 안 날만큼 한가해졌다. 그래서 유유자적한 이 시간들이 한없이 좋다. 특히 지난 2년 동안은 평화로웠고, 안온했다. 기상알람을 끈 아침은 빛이 스며들듯이 고요히 왔고,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무얼 해도 쫓기거나 다급하지 않았다. 나의 미래만 생각하면 되는 시간들, 2년이었다.
어제 독서모임에 다녀왔다. 12월 말쯤 배추도사님과 또 다른 지인과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배추도사님이 독서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월 2회 토론과 글쓰기를 한다는 정보와 함께. 이미 아는 분도 두 분 계신다고 하고 이번 기회에 독서편식도 고쳐볼까 싶기도 해서 나도 하겠다고 나섰던 독서모임이 벌써 3개월이 되었다. 단편이라고는 거의 손도 대지 않던 내가 앨리스 먼로의 ‘일본에 가 닿기를’을 시작으로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기준영의 ‘축복’, 최진영의 ‘홈 스위트홈’과 ‘쓰게 될것’을 읽고 토론을 했다. 처음엔 단편의 함축성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아니 지금도 힘들다. 작가의 의도도,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발표한 작품은 독자의 것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내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아니 해석이 되면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친절하게 떠먹여 주는 책에 익숙한 탓이었다. 여하튼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을 어찌 든 둥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어제 토론한 책은 바로 최진영의 ‘쓰게 될것’이었다. 나의 독서스타일 중 하나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읽으면 그 작가와의 책을 두루두루 찾아 읽곤 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리 할 것이다. 최진영작가는 ‘구의 증명’ 이후로 조금 멀어진 작가였다. 토론 모임이 아니면 다시 그녀의 작품을 읽었을까 싶다. 토론은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어제 ‘쓰게 될것’소설의 첫 시작처럼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싸우지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싸워 볼 예정이다.
토론 후 숙제로 쓴 글을 합평하는 시간, 세상에 막 내놓은 내 글을 읽어주는 유일한 사람들, 내 글을 읽는 브런치 작가분들도 있지만, 사이버 속 익명의 독자들 말고, 내 눈을 바라보며 좋은 점과 잘못된 점을 말해주는 유일한 분들이다. 내 글은 나의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드러나는 속내가 부끄럽고, 자신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브런치 작가가 된 분이 -친구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라’고 ‘작가가 되면 내가 네 글을 읽어 줄게’란 말에 용기를 얻어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을 보며 나도 내 글을 읽어 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나에게도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생긴 거다. 바로 독서모임의 작가분들.
그 독서모임에 다녀오면 힘이 솟는다.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브런치가 나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면 독서모임은 나에게 지속하는 힘을 준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취나물을 꺼냈다. 이틀인가 사흘 전에 사다가 넣어놓은 취나물을 아직까지 요리하지 못했다.이걸 해결해야 글 쓰러 나갈 수가 있다. 집안일이 밀려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나의 글 쓰는 스타일이다. 취나물과 같이 사서 데쳐 놓은 단배추는 파를 듬뿍 넣은 멸치 육수로 시래깃국도 끓였다. 남편의 점심이 해결되었다. 과일과 함께 아침으로 먹을 피타브래드를 살짝 구워 양배추샐러드 듬뿍 넣어 샌드위치를 두 개 만들었더니 한 개는 내 점심도시락이 되었다. 오~ 룰루 랄라, 도서관으로 갈까? 스벅으로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산 등성이에 있는 도서관은 절로 운동이 된다. 운동도 하고 글도 쓰는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제목을 건강해지는 글쓰기로 해야 하나??
어제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알고 싶다’는 이유였다. 내가 나를 모르겠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즐거움에 이유가 있다. 그건 알기 쉬웠다. 즐거움은 작은 어린아이들도 금방 알아채린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때로는 불안한 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불안한 지 글이 나에게 그 이유를 알려줬다. 그러고 나면 난 더 이상 화가 나지 않게 되었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글을 쓰는 이유가 충분했다. 물론 애들 말로 간지 난다는 이유도 함께. 요즘 글쓰기와 책쓰기가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글 쓰기가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을것이다. 유행에 휩쓸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글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미리 어디까지 가겠다고 내 자신을 닦달하지는 않겠다. 그것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쓰겠다. 지금처럼. 또는 지금보다 조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