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미국 로스앨러모스카지노 게임 추천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었다. 불도저와 트럭이 모여들었고, 건축 자재들이 쌓였으며, 나무들이 베어졌다. 인적이 드문 고원 지대에 어울리지 않는 대공사였다. 현장 주위로는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군사지역이므로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과 함께. 공사장 내부만큼이나 외부도 시끄러웠다. 갑작스러운 퇴거 명령에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정부의 명령입니다. 곧 보상금이 지급될 겁니다.” 사람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쫓겨나야 카지노 게임 추천. 20년 넘게 운영되었던 학교도 문을 닫았다.
1942년 가을, 미국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은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원자폭탄을 개발할 연구소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경 지대의 뉴멕시코는 미국에서 오지나 다름없었다. 황량한 사막이 대부분이었고, 로스앨러모스 고원에는 수백 명 정도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지리적 조건이 연구소 건설에 적합했다. 폭발의 위험과 보안 유지라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1939년 핵분열이 이론적으로 규명되었으나, 폭탄으로 만드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자연계의 90여 원소 중에 핵분열 연쇄반응이 가능한 것은 가장 무겁고 불안정한 우라늄뿐이다. 우라늄은 우라늄 235와 우라늄 238의 두 종류 동위원소로 존재한다. 문제는 핵분열 연쇄반응이 그중 0.7%에 불과한 우라늄 235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라늄 235만 분리해서 충분히 모으는 과정, 즉 우라늄 농축이 필요하다. 이건 모래사장에 0.7%만 섞여 있는 특정 색깔 모래만 골라내는 일과 같다. 우라늄 238과 우라늄 235는 화학적으로 동일해서 물리적으로 분리해야 한다. 그 질량 차이가 겨우 1.3%다. 이 미세한 차이를 이용한 분리 공정이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시 레오 실라르드와 닐스 보어의 대화다. “우라늄 235를 분리해서 원자폭탄을 만들면 되겠네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려면 미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이 정말로 전국 곳곳에 거대한 공장들을 지어 돌린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맨해튼 계획이다. 핵분열과 원자폭탄의 원리를 이해하는 과학자들은 영국, 독일, 일본에도 있었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 어마어마한 자원과 인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했다. 1941년 10월 영국 마우드위원회의 보고서를 받아본 미국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의 실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원자폭탄에 필요한 다섯 가지 기술을 보고서로 정리해 백악관에 제출했다. 원자폭탄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니, 속전속결로 자원을 투입해 독일보다 빨리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OK FDR”이라고 서명하면서 맨해튼 계획이 본격화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할까. 원자폭탄은 과학연구와 군사계획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모두 갖고 있었다. 즉 전인미답의 지식을 발견하는 동시에, 철통 보안과 빠른 속도도 요구되었다. 그래서 백악관 과학연구개발국장 버니바 부시는 장고 끝에 계획을 – 그 자신이 과학자였음에도 – 육군에 맡기기로 했다. 대규모의 국가 예산을 비밀리에 쓰기에는 과학 프로젝트보다는 군사 기밀이 더 적합했다. 그렇게 해야 국회의 예산 심사와 언론의 감시를 막을 수 있었다.
이에 육군 공병대의 레슬리 그로브스가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관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면, 그로브스야말로 참군인이었다. 그는 특히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기간과 예산 내에 해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2001년 9.11 테러 때도 건재했던,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 그의 대표작이다. 1942년 그로브스는 이 거대하고 복잡한 건물을 불과 18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러한 가공할 업무처리 능력의 비결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이것은 원자폭탄 개발 임무에도 아주 잘 맞았다.
그로브스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 막 부임한 그를 맞은 것은 전임자들이 처리하지 못해 6개월 넘게 쌓인 미결 문서들이었다. 그것을 단 하루 만에 결재해 버렸다. 계획의 암호도 정해야 했는데, 당시에는 ‘대체 자원 개발’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적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이유로 ‘맨해튼(육군 공병대 사무소가 있던 지역)’이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으로 바꿨다. 연구소 부지 계약에서도 그의 저돌성은 돋보였다. 계약에 비협조적인 전시생산국을 찾아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밖에 없다”라고 협박하는가 하면, 상부 보고 중에 오크리지의 부지를 보러 간다며 나오는 일도 있었다. 결국 육군 내부에서 그로브스는 엄청난 욕을 먹게 된다. 그중 압권은 “내 살다 살다 그런 개XX는 처음 본다.”였는데, 심지어 부하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 덕분에 맨해튼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볼보의 CEO를 지낸 레이프 요한슨은 “리더는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라고 했는데, 그로브스가 50년도 더 빨리 그 진리를 증명한 셈이다.
맨해튼 계획의 과학 부문 책임자는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폭탄을 설계 및 조립하는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과학자 그룹의 대표로서 총책임자 그로브스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맨해튼 계획의 투톱인 두 사람의 캐릭터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190cm에 100kg이 넘는 거구의 군인 그로브스는 갈등과 분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혈질이었다. 반면 180cm에 60kg도 되지 않았던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달변가였다. 그런데도 둘의 케미는 아주 좋았다.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모두 최고의 전문가이면서도, 자기 분야가 아닌 영역에서는 상대를 존중하며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이라는 거대한 과학·군사 프로젝트는 뛰어난 두 관리자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본래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을 맡기에 약점이 많았다. 그가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의 석학이었음은 분명하나,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 – 엔리코 페르미, 어니스트 로런스, 아서 콤프턴, 해럴드 유리 등 – 보다 업적이 크지는 않았다. 이들이 죄다 받은 노벨상을 그는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형 프로젝트를 관리해 본 경험도 없었고, 이론가라서 실험과 공학 지식에도 약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이 결정적이었다. 실제로 친동생, 연인, 동료가 공산당원이었고, 본인도 공산당에 여러 번 기부한 이력이 있었다. 이 모든 결격 사유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가 발탁된 이유는 그로브스의 고집 때문이었다. 원래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로 유력했던 과학자는 어니스트 로런스였다. 탁월한 실험물리학자이면서 정부와 관계도 좋았으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만나본 뒤 그의 박식함과 통찰력에 매료되었다. 결국 “로런스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오펜하이머는 모든 것을 아는 천재”라는 이유로 오펜하이머를 최종 낙점했다.
로스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자는 아이디어도 오펜하이머가 낸 것이다. 그는 맨해튼 계획 이전부터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면 외딴곳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그로브스의 지론과도 일치했고, 오펜하이머가 어린 시절을 보내서 잘 알고 있던 로스앨러모스가 부지로 선정되었다. 그로브스가 전국을 돌며 부지를 물색하고 시설을 건축하는 사이, 오펜하이머는 동료 과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오지에 틀어박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연구를 몇 년이고 해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보안 때문에 연구결과를 발표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과학자가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나치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있었지만, 오펜하이머 개인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었다. 미술품 수집과 철학에 뛰어난 식견이 있었고, 취미로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하고 시를 썼던 그의 지적인 아우라는 남달랐다.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쉽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일례로 로스앨러모스연구소 이론팀장 한스 베테는 그의 세미나가 매우 세련되었다고 극찬했다. 무엇이 중요한지 늘 꿰뚫고 있어서 소통이 자유로웠다는 이유에서다. 이지도어 라비도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들을 매료시키는 ‘지적인 성적 매력’이 있었다고 평했다. 반면 폴 디랙은 오펜하이머가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반문했다. “물리학을 하면서 시도 쓴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물리학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지만, 시는 그 반대 아닌가?”
맨해튼 계획의 추진 과정은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도 원자폭탄을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여러 선택지가 주어질 경우,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다 해본다.”가 제1원칙으로 적용되었다. 실제로 우라늄 235의 분리와 농축에는 그때까지 알려진 기체확산, 열확산, 전자기 분리의 세 가지 방법이 모두 시도되었다. 폭탄 설계에도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을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역시 둘 다 쓰였다. 어떤 방법이든 들이는 자원에 비해 얻는 결과는 극히 미미했다. 하지만 전시라는 특수 상황이 모든 비효율을 정당화했다. 그로브스는 무제한의 예산편성 권한 – show me the money – 을 휘두르며 계획을 밀고 나갔다. 미국 전역에 비밀 연구시설을 짓고, 각자 미션을 나누어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곳들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시카고의 야금연구소. 이 생뚱맞은 이름은 보안을 위해 위장된 것이었다. 야금연구소의 실제 임무는 원자로 개발이었다. 아서 콤프턴, 엔리코 페르미, 헤럴드 유리, 유진 위그너 등 노벨상 수상자 4명이 핵심 멤버였다. 시카고대학 풋볼경기장 지하에 이들이 설치한 ‘시카고 파일-1’은 핵분열 연쇄반응을 제어할 수 있는 최초의 장치였다. 핵분열이 시작될 때 우라늄 원소가 너무 적으면 연쇄반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핵분열이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할 위험이 있다. 이 과정을 통제하려면 원자로는 필수였다. 페르미는 우라늄과 흑연 감속재를 쌓은 구조물을 완성하고 여기에 더미를 뜻하는 파일(pi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현대 원자력 발전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둘째는 버클리의 방사선연구소. 어니스트 로런스가 이끈 이곳은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 235의 분리 방법을 고안카지노 게임 추천. 입자가 사이클로트론의 자기장에 들어가면, 질량에 따라 궤도를 다르게 그리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이 방법은 기체확산이나 열확산과 비교해 효율성이 더욱 떨어졌다. 다만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서 리스크는 적었고, 그래서 이렇게 확보한 우라늄 235는 전체 계획에서 큰 비중을 차지카지노 게임 추천. 로런스는 실험 장비의 대가답게 사이클로트론을 우라늄 235 분리에 특화된 형태로 개량카지노 게임 추천. ‘칼루트론(캘리포니아와 사이클로트론의 합성어)’으로 불린 이 장치는 주로 오크리지에서 우라늄 235 분리에 활용되었다. 이와 함께 버클리팀의 중요한 기여로 플루토늄도 꼽을 수 있다. 로런스의 제자인 글렌 시보그가 1940년 우라늄 충돌 실험으로 합성한 이 인공 원소는 원자폭탄 응용 가능성 때문에 그 즉시 비밀에 부쳐졌다. 당시 우라늄 235 분리가 워낙 어려웠기에 플루토늄은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았고, 로런스가 그 적용 가능성을 구체화하여 폭탄 개발의 선택지가 늘어날 수 있었다.
셋째는 오크리지의 우라늄 농축 시설. 우라늄 235를 생산하는 맨해튼 계획의 메인 공장이었다. 테네시강이 흐르는 이곳은 뉴딜 시대에 건설된 수력발전소가 많아서 엄청난 양의 전력 공급이 가능했다. 이러한 장점을 알아본 그로브스는 부임 직후 2만 4천 ha가 넘는 땅을 사들였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건물들을 지었다. 그 안에는 우라늄 235를 분리하기 위한 칼루트론이 대거 구축되었다. 그런데 칼루트론의 오퍼레이터들은 대부분 인근에서 농사를 짓던 저학력 여성이었다. 이들은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준다는 공고를 보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기기를 작동하고 눈금을 기록하는 등 단순 업무만 반복했다. 당연히 감독관과 비밀 요원의 감시도 받았다. 혹시라도 업무에 대해 궁금해하면 즉시 해고되었다. 작업자를 해고한 감독관들도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이 ‘칼루트론 걸스(훗날 이 여성들에게 붙은 별명)’는 과학적 지식이 없었음에도 성실한 근무 태도로 우라늄 235의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오크리지에서만 이들을 포함해 8만여 명이 우라늄 235를 생산했다. 이곳이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 시설이었음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밝혀졌다.
넷째는 핸포드의 플루토늄 생산 시설. 오크리지에 우라늄 공장이 건설됐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카지노 게임 추천. 무엇보다 민간 거주지역인 녹스빌과 가깝다는 문제가 있었다. 만약 오크리지에서 폭발 사고라도 터진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대안을 찾던 그로브스는 워싱턴주의 핸포드가 기가 막힌 조건을 가졌음을 알아냈다.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를 냉각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카지노 게임 추천. 핸포드의 컬럼비아강이 바로 그걸 감당해줄 수 있었다. 내륙의 깊은 사막에 있어서 보안에도 용이카지노 게임 추천. 1943년 이 지역을 매입한 그로브스는 (오크리지에서 그랬듯) 주민들을 반강제로 내보내고 건물들을 지었다. 오래지 않아 5만 명이 넘는 인력이 집결카지노 게임 추천. 한적한 농촌이었던 핸포드는 단숨에 워싱턴주에서 세 번째로 큰 마을이 되었다. 오크리지와 핸포드는 닐스 보어가 말한 “원자폭탄은 미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바꿔야 가능하다.”의 현실 버전이었던 셈이다. 오크리지에 이어 핸포드에도 시설이 완성되자, 비로소 맨해튼 계획은 전속력으로 가동될 수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연구소는 이 모든 결과를 종합하는, 맨해튼 계획의 화룡점정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연구소보다는 작은 과학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과학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연구시설 외에 거주지, 학교, 어린이집, 영화관 등도 갖춰져 있었다. 1943년 100여 명이었던 거주자는 1945년 6,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밖에서 이주해온 사람도 있었지만,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많았다. 그만큼 로스앨러모스는 평화롭고 낙천적이며 열정이 넘쳤다. 겉모습만 봐서는 무시무시한 살상 무기를 만드는 비밀 연구소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과학자들은 폭탄에 대한 윤리적 고뇌는 제쳐 두고, 마치 학회에 온 것처럼 열띤 발표와 토론을 이어갔다.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텔러, 리처드 파인만 등이 이렇게 오래 한 팀이 될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었다.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파티가 열렸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으며, 가끔 음악회도 개최되었다. 천혜의 자연에서 등산과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오펜하이머로부터 비롯되었다. 비록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구소였지만, 오펜하이머는 그 안에서만큼은 자율과 협력으로 상징되는 과학의 기본정신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과학, 문학, 예술을 넘나드는 그의 카리스마는 로스앨러모스를 과학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1945년 7월 두 개의 원자폭탄(리틀보이, 팻맨)이 만들어졌다. 폭탄의 재료를 모으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것을 마음먹은 대로 터뜨릴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은 매우 불안정하여 의도치 않게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폭탄을 작동시키려면 임계질량의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을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조각조각 떨어뜨려 놓았다가, 원하는 타이밍에 확 모아서 핵분열이 완료될 때까지 강한 압력으로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과학자들이 2년 동안 고심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우라늄 235로 만든 리틀보이는 포신형으로 설계되었다. 즉 포탄을 거대한 포신 안으로 쏘아 넣어 기폭하는, 직관적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형태다. 임계질량 이내의 우라늄 235 두 조각을 만든 후, 한 조각을 날려서 다른 한 조각에 맞춰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 설계의 장점은 기폭이 매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라늄 235를 임계질량(약 52㎏)만큼 모으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그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3년을 꼬박 소모했으나 단 한 발을 만들 양밖에 못 모았다. 그래서 리틀보이는 실험도 안 거치고 바로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이후 포신형 폭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팻맨은 포신형의 대안으로 시도된 내파형 폭탄이다. 이것은 새롭게 발견한 94번 원소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졌다. 플루토늄의 임계질량은 약 10㎏여서 우라늄 235만큼의 노가다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라늄 235보다 결합 속도가 빠르고 불순물이 많아서 포신형 설계가 불가능카지노 게임 추천. 플루토늄 폭탄을 포신형으로 만들려면 우라늄 235보다 훨씬 큰 포신이 필요한데, 그걸 실을 수 있는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 모양의 플루토늄을 TNT 등의 재래식 폭약으로 둘러싸고, 이것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플루토늄 조각들이 한가운데로 모여 임계질량을 넘게 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이렇듯 내파형 폭탄의 개념은 비교적 간단카지노 게임 추천. 그러나 구의 모든 방향에서 완전히 동일한 압력으로 폭발해 내려가도록 하는 데는 고난도의 수학적 계산이 필요카지노 게임 추천. 이 이론 작업에만 몇 년이 걸릴 정도였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진은 마지막까지 이 내파형 폭탄의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다. 1945년 7월 16일 로스앨러모스 인근 앨라모고도에서 이루어진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TNT 폭탄 2만t의 위력을 가진 폭발이 일어났다. 이 엄청난 광경을 본 오펜하이머는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이는 오펜하이머의 고뇌와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여전히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로써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었던, 그래서 불가능해 보였던 맨해튼 계획은 단 3년 만에 목표를 달성카지노 게임 추천. 물론 어마어마한 지출이 수반된 과업이었다. 무려 20억 달러의 예산과 13만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투자한 만큼의 성과도 있는 일임에는 분명카지노 게임 추천. 핵실험의 성공을 지켜본 그로브스의 한 마디처럼, 그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세계패권을 미국이 혼자서 거머쥐게 되었다.
1945년 등장한 원자력은 ‘제3의 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제1의 불은 자연에서 직접 얻는 불, 제2의 불은 석탄과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에 의한 불이다. 이것들이 이전까지 인류의 산업과 경제 활동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제3의 불 원자력은 여러모로 앞의 둘과 달랐다. 우선 그것은 뭔가를 태워서 얻은 것이 아닌, 물리학의 첨단 지식으로 알아낸 결과였다. 따라서 이제껏 인류가 해왔듯 자연을 파괴하지 않아도 되었다. 효율성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우라늄 235 1g이 분열할 때 발생하는 열량은 석탄 3t이 연소했을 때와 비슷했다. 즉 원자력은 석탄보다 질량 대비 약 300만 배 많은 에너지를 내는 셈이다. 모든 산업은 결국 에너지를 기반으로 작동한다고 할 때, 원자력에는 기존의 산업 구조를 바꿀 잠재력이 있었다. 원자력이 과학을 넘어 문명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이런 배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원자력을 민간으로 이관하는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브라이언 맥마흔 상원의원은 원자력위원회 설립을 골자로 하는 ‘맥마흔법’을 발의했다. 원자력위원회는 맨해튼 계획의 성과를 육군으로부터 넘겨받아, 공공복지와 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맨해튼 계획의 비밀 시설들도 민간 연구소로 바뀌어 원자력위원회로 귀속되었다. 1977년 원자력위원회가 에너지부로 개편되었지만, 이 관리체계는 지금도 동일하다.
1946년 시카고 야금연구소가 아르곤국립연구소로, 버클리방사선연구소가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로 되어 원자력위원회로 편입했다. 1947년에는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와 오크리지국립연구소도 합류했다. 뉴욕주의 브룩헤이븐에서는 프린스턴, 컬럼비아, 하버드, MIT 등 9개 대학의 주도로 원자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가 되었다. 미국 동북부에는 원자력 관련 시설이 없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핸포드의 플루토늄 생산 시설은 1965년 국립연구소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퍼시픽노스웨스트국립연구소다.
이렇듯 맨해튼 계획을 거치며 현대의 연구소는 더욱 고도화·복잡화되었다. 국가, 과학, 산업이 대규모로 결합하여 세계질서를 완전히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와 카이저빌헬름협회에서 보듯 20세기의 연구소는 부국강병의 시대적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전쟁과 무기 개발에 과학이 동원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과학은 이 역사적 과정의 피해자이면서 수혜자이기도 했다. 전쟁의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지만, 동시에 과학연구에 큰돈이 몰리고 연구소 조직이 비약적으로 커지는 기반도 되었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과 로스앨러모스연구소는 그것의 가장 극적이고 완성된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