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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01. 2025

정치가 쏘아 올린 온라인 카지노 게임

1961년 미국 항공우주국

1957년 12월 6일은 미국이 역사상 가장 큰 망신을 당한 날이다. 이날 미 해군은 뱅가드 TV-3라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세계 최초였어야 할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하지만 두 달 차이로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선수를 빼앗겼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다. 이에 놀란 미국이 부랴부랴 쏘아 올린 것이 뱅가드 TV-3였다. 그런데 이 위성은 발사대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폭발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광경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다음 날 언론은 이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며 ‘Flopnik(Flop + Sputnik,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소련은 인공위성의 사망(?)을 애도하며 미국에 조문을 보냈다.


스푸트니크 쇼크는 과학기술에 대한 미국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국방이라는 현실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우려였다. 만약 스푸트니크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은 로켓이 미국을 조준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핵탄두가 실린다면? 소련은 이미 1949년에 핵무기를 개발했다. 다만 그것을 미국 본토에 직접 투하할 공군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미국이 소련의 핵 위협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쓰일 수 있는 로켓이 개발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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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가드 TV-3 위성의 폭발 모습(왼쪽)과 이를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고 조롱한 언론 보도(오른쪽).




NASA의 탄생

미국은 본래 세계 항공기술의 발상지였다. 1903년 미국인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하면서 항공기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미국의 항공기술은 유럽에 비해 발전이 더뎠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항공무기체계의 중요성이 커지자, 1915년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NACA)를 설치하게 된다. NACA는 이름에서 보듯 자문위원회였고, 자체적인 연구 기능은 부족했다. 실질적인 항공기 개발과 제작은 각 대학과 연구소 등에서 나눠서 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는 이러한 느슨하고 분산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했다. 아무래도 리더십이 강력하지 못해서, 연구 경쟁력도 떨어진다는 자각이었다.


결국 미국은 1958년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새로 만들었다. 기존 NACA를 계승하되, 군과 민간 곳곳에 흩어져있던 항공기 관련 연구시설들을 통합하는 것이 골자였다. 또한 스푸트니크가 촉발한 소련과의 경쟁을 대비해 기관 명칭에 ‘우주’를 넣고, 관련 연구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그 결과 NACA의 랭글리연구소와 에임스연구소, 해군의 뱅가드 위성 프로젝트, 육군의 제트추진연구소와 탄도미사일국이 모두 NASA의 깃발 아래 모였다. 대통령 직속으로 항공기술은 물론 우주개발까지 전담하는 거대 연구조직이 탄생한 셈이다. 이렇듯 미국이 작정하고 항공우주 분야에 뛰어들게 했다는 것이야말로, 스푸트니크 쇼크가 가져온 직접적인 효과였다.


다만 신설된 NASA에 곧바로 대규모 지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소련에 맞서 뭔가 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입장은 신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젠하워의 목표도 소련을 꺾고 미국의 세계 패권을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핵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무력 대립만큼은 자제했다. 이러한 전략의 핵심은 간단했다. “소련의 도발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젠하워는 스푸트니크 쇼크를 빌미로 과도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군인 출신의 재정적 보수주의자였던 그가 보기에 적과 직접 맞서 싸우지 않는 일에 예산을 쏟아붓는 것은 온당치 않았다. 그래서 우주개발을 군보다는 민간의 과학연구로 남겨두고자 했고, 무제한의 예산 지원보다는 선택과 집중에 중점을 두었다. NASA 초대 국장 키스 글레넌이 1961년 예산으로 약 8억 달러를 요청하자, 너무 과하다며 연 5억 달러 수준이 적절하다고 반려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1961년 민주당의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케네디는 이미 1960년 대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우주개발을 정치 쟁점화했다. 즉 “미국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데도, 아이젠하워 정권은 우주개발 예산을 지나치게 아끼고 있다”라는 비판이다. 이는 우주개발이 과학연구를 넘어 미국의 자존심과 안보가 걸린 국가 전략임을 시사했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케네디는 ‘뉴 프런티어’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젊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뉴 프런티어는 미국 건국의 근간인 개척자 정신을 되살려, 과감한 혁신과 도전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의 영역을 저 멀리 우주로 넓히겠다는 계획은 이러한 뉴 프런티어의 국가 비전과도 잘 부합했고, 케네디가 역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주개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1959년 제작된, 흔히 '미트볼'로 불리는 NASA의 로고. 파란 구는 행성을, 별들은 우주를, 빨간 스월 문양은 항공우주공학을, 흰 궤도는 우주여행을 상징한다.




과학이 아닌 정치의 결정

원래 후발주자가 돋보이려면 선두보다 더 파격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케네디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소련이 선점해버린 우주개발의 판을 뒤집을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고. 그것은 기술적으로 더 어려우면서도, 우주개발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상징적이어야 했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화제성도 있어야 했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귀환시키는 유인 달 탐사 계획. 달 탐사에 있어 무인과 유인은 사람이 직접 하냐 마냐의 차이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기술적 난도를 몇 배는 높이는 원인이 된다. 무인 탐사는 달까지 편도로만 가면 성공이다.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반면 유인 탐사는 반드시 지구로 귀환해야 한다. 비행 거리도 2배이고, 무엇보다 싣고 가는 탐사선과 착륙선이 비교도 안 되게 커져야 한다. 따라서 유인 달 탐사에는 훨씬 더 강력한 발사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케네디를 자문한 과학자들은 이런 어려움과 비효율성을 이유로 유인 달 탐사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달보다는 인공위성으로 지구 근처 우주환경을 탐사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굳이 달에 가겠다면, 유인보다는 무인이 비용도 저렴하고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당시 기술 수준에서 유인 달 탐사는 사람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특히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장이자 MIT 교수였던 제롬 위즈너는 대놓고 케네디에게 비판적이었다. 위즈너는 이 위험한 계획이 실패한다면 국가적 재앙이 될 거라며, 유인 달 탐사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국 위즈너는 얼마 못 가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장직을 그만둬야 했다.


케네디의 상황은 좀 더 복잡했다. 임기 시작 직후부터 다중의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우선 1961년 4월 12일 소련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해 세계 최초로 유인 우주여행에 성공했다. 미국으로서는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 또 한 번의 카운터 펀치를 얻어맞은 셈이다. 선거 때부터 적극적인 우주정책을 설파한 케네디로서는 정말로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4월 17일에는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피그만 침공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 특히 이 사건은 전쟁 영웅이었던 전임 아이젠하워와 대비되면서 케네디의 리더십을 실추시켰다. 이런 거듭되는 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결국 케네디는 1961년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10년 안에 달에 가겠다”라며 유인 달 탐사를 선언했다. 과학자들의 반대와 여러 리스크를 감수한, 그야말로 대통령이라서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이것의 정치적 성격은 케네디가 NASA의 국장 제임스 웹에게 한 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이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이기려고 달에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엄청난 비용을 들이지 않을 겁니다."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로 지구 궤도비행에 성공했을 무렵, 미국은 앨런 셰퍼드가 15분의 탄도비행만 겨우 해본 수준에 불과했다. 이 차이를 뒤집으려면 케네디의 말마따나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고, 그는 실제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NASA에 몰아주었다. 1961년부터 급증한 NASA의 예산은 1967년에는 연방정부 예산의 무려 5.5%를 점유하게 된다. 인류를 달에 착륙시킬 ‘아폴로 계획’은 그렇게 정치와 자본의 결합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1961년 의회 연설에서 케네디의 유인 달 탐사 선언(왼쪽) 이후 NASA의 예산은 엄청나게 증가온라인 카지노 게임(오른쪽).




나치 출신의 천재 과학자

아폴로 계획의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난제는 역시 발사체였다. 전인미답의 달 착륙을 성공시키려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스펙의 로켓이 필요했다. 비유컨대 기존 로켓이 작은 어선 정도였다면, 달에 갈 수 있는 로켓은 거대한 항공모함과도 같았다. 이는 단순히 크기만 키우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게, 연료, 추진력, 내구성, 제어 시스템 등 모든 요소가 새로운 기준에서 다시 설계되어야 했다.


그런데 NASA에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천재가 있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라는 독일 출신 로켓 과학자다. NASA의 발사체 부문 책임자였던 그는 새턴 5호 로켓을 개발하여 아폴로 계획의 성공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의 과학자들이 대거 이주해왔고, 이들이 미국의 과학 발전을 견인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베르너 폰 브라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한스 베테와는 반대의 경우였다. 즉 그는 유대인이 아닌 순수 독일인이었고, 나치의 탄압이 아니라 수혜를 입은 과학자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친위부대로서 수많은 전쟁 범죄를 주도한 나치 친위대의 장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국책사업을 총괄한 격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도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열세로 몰린 독일군은 과학자들이 발명한 신무기들을 앞세워 전력 차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중 V-2 로켓이라는 최첨단 항공병기가 있었다. 길이 14m에 무게 900㎏의 거대한 로켓으로, 최대 고도는 약 189㎞였으며 최대 속도는 5,760km/h(음속의 약 3배)에 달했다. 이 정도였으니 당시 연합군에서 이걸 격추할 수 있는 전투기가 없었다. 그 파괴력도 엄청났다. 전쟁 막판인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V-2 로켓의 폭격으로 인해 영국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이렇게 평온라인 카지노 게임.“만약 독일군이 V-2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비롯한 신무기를 6개월만 일찍 투입했다면, 연합군의 유럽 침공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폰 브라운은 V-2 로켓 개발 계획의 핵심 과학자였다. ‘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독일 귀족 출신이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우주비행 동호회에서 로켓을 만들어 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이러한 천재성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래서 베를린공과대학 졸업 후 같은 동호회 회원이자 V-2 로켓 개발 총책임자였던 발터 도른베르거 소장에게 발탁되었다. 나치당 입당 및 친위대 가입도 이 무렵 이루어진 일이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폰 브라운은 단순한 나치 가담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례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에 재직할 때 노르트하우젠의 지하공장에서 로켓을 생산하던 노동자 1만여 명이 몰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자를 차출해 로켓 생산에 투입한 것은 분명 연구진의 책임이었다. 또한 나치의 아르덴 대공세에 맞춰 V-2 로켓으로 안트베르펜을 폭격해서 항구 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폰 브라운은 이 공로로 히틀러로부터 기사 전공십자장을 받았다. 그의 최종 계급은 소령이었지만, 이렇듯 전쟁 기간의 역할은 일개 소령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패전 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폰 브라운의 천재성을 탐낸 미국이 그를 위기에서 부활시켰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나, 그 외의 과학기술은 독일에 많이 뒤처져 있었다. 특히 로켓 기술은 20년 이상 차이가 났다. 독일의 V-2 로켓은 이미 1944년 우주에 도달할 수준이었으나, 미국은 1960년대 초에도 엄두조차 못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로켓을 비롯한 나치의 신무기 기술들에 욕심을 낸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음 적은 공산주의 소련이 될 것이 자명했다. 만약 패전한 독일의 과학기술을 소련이 흡수한다면, 전후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은 은밀하게 나치의 과학기술자들을 이주시키는 작전을 입안했다. V-2 로켓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폰 브라운은 그중에서도 영입 1순위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인 나치의 V-2 로켓은 후일 미국 우주개발의 원천기술이 된다.




페이퍼클립 작전과 NASA의 성장

이 ‘페이퍼클립 작전’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영입 대상 과학자들의 인사 파일에 종이 클립을 끼워 넣은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45년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할 때, 미국 합동정보목표기구의 전문가들이 동행하여 과학자들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조사 대상은 로켓, 항공, 생화학, 의학 등 나치 신무기의 핵심 분야를 망라했다. 과학자들을 회유해 데려오는 일은 육군 방첩대 요원들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국방 및 군 주요 시설에 배치된 독일 과학자만 1,600여 명에 이르렀다.


작전 초창기에는 ‘전쟁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거나, 열성적 나치 당원이 아닌 이들’만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육군과 국방부의 반대자들을 달래기 위한 정책 용어였을 뿐이다. 현장에서는 나치 전력을 일일이 조회할 여유도 없었고, 그중 부역자를 철저히 가려내면 데려올 만한 과학자가 훨씬 줄어들었다. 결국 합동정보목표기구는 영입한 과학자들의 나치 이력을 삭제해버렸다. 물론 이러한 발상이 위험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 엘레노어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치 출신이라도 “중요한 과학기술 자산을 소련에 뺏기는 것보다 낫다”라는 차악의 논리가 이를 정당화온라인 카지노 게임.


폰 브라운의 연구팀도 130여 명(가족까지 포함하면 300여 명)이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이들이 그대로 초창기 NASA와 아폴로 계획의 중추가 된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폰 브라운은 워낙 (나쁜 의미의) 유명인사였기에 곧바로 고위직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텍사스의 포트 블리스 미군 기지에서 로켓 관련 지식을 전수하는 자문 역할만 맡았다. 하지만 우주개발에 국가적 관심이 쏠리면서 그의 역할도 점점 커지게 된다. 여기에는 폰 브라운의 셀프 이미지 메이킹도 한몫했다. 그가 자신을 미국 우주개발의 강력한 적임자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필은 공식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폰 브라운은 공상과학소설을 출판하고 디즈니의 우주 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고자 노력했다.


결국 스푸트니크 쇼크가 폰 브라운에게도 기회가 되었다. 1960년 그의 연구팀은 NASA에 합류하여 달 탐사 로켓 개발을 총괄했다. 폰 브라운은 NASA에 신설된 마셜우주비행센터의 소장과 새턴 5호 로켓의 수석 엔지니어를 겸했다. 그의 부하이자 역시 나치당원 출신인 쿠르트 데부스는 플로리다에 건설된 케네디우주센터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케네디의 유인 달 탐사 선언은 1961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래전부터기회를 노려왔던 만큼 새턴 5호의 설계는 이미 폰 브라운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래서 개발 과정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1962년 1월 개발에 착수했는데 1967년에 시험 비행을 했고, 1969년에는 마침내 달 착륙에 성공온라인 카지노 게임. 케네디가 약속한 10년의 기한을 무려 2년이나 단축한 것이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이주한 104명의 독일 로켓과학자(위쪽)와 NASA에 합류한 폰 브라운 연구팀(아래쪽)


새턴 5호의 위엄은 세부 지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 거대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총질량은 2,800t이 넘는다. 그리고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최대 탑재 화물 질량은 52.7t이다. 이 정도가 되었기에 달 탐사에 필요한 사령선과 착륙선을 운반할 수 있었다. 세부 구성은 총 3단으로 이루어진다. 그중 가장 강력한 1단에는 지름 3.7m의 대형 엔진인 로켓다인 F-1이 5개 장착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추력은 34,500kN에 이른다. 이는 해수면 높이의 중력에서 3,500t 이상의 질량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의 힘이다. 2021년 우리나라가 발사한 KSLV-II 누리 로켓의 경우 약 300t의 추력을 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당시 NASA의 기술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앞서 있었는지 실감이 된다. 세계를 대표하는 항공우주 연구소로서 NASA의 위상은 이때부터 확고부동해진 것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다인 F-1 엔진 다섯 개로 구성된 새턴 5호의 1단 앞에 선 폰 브라운(위쪽)과 아폴로 11호의 발사 모습(아래쪽)




유인 달 탐사가 가져온 효과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아폴로 11호의 선장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면서 남긴 감동적인 말이다. 이 문장은 인류가 과학을 발전시켜온 역사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유인 달 착륙은 위대한 과학의 업적으로서 강한 진보성을 함의한다. 그럼에도 그것의 발단, 전개, 결말을 살펴보면 과학만으로 이룬 성과는 아님을 알게 된다. 유인 달 탐사는 미국이 소련을 누르고 패권을 독점하려는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나치 출신 과학자들을 NASA로 끌어들여 추진했으며, 미국의 확고한 우위가 증명된 1972년 이후로 두 번 다시 시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주를 향한 도전이라는 과학적 열망보다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정치 논리가 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연구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과학이 일으킨 파급효과는 인간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기 때문이다. NASA의 유인 달 탐사도 그렇다. 그것의 의미는 단지 “인류가 드디어 달을 정복온라인 카지노 게임.”라는 상징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달에 가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발명된 기술들은 이후 사회 곳곳으로 스핀오프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는 달 탐사 연구개발에 NASA와 계약을 맺은 기업, 대학, 연구소들이 참여한 결과이기도 하다. 1961년 당시 신생 기업이었던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NASA는 컴퓨터 크기를 줄이면서도 연산 능력을 높여야 했고, 이를 위해 최신 기술이었던 집적회로를 도입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 집적회로의 발명자가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등이 세운 페어차일드 반도체다. 바로 오늘날 인텔의 전신이 되는 회사다. 이후 집적회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발전하며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 혁명을 촉진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 밖에도 디지털 비행 제어 시스템, 단열재, MRI와 CT, 건조식품, 휴대용 정수기 등 일상생활에 필수가 된 기술들이 매우 많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자본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이루지 못했을 과학적 성과다. 이 점에서 NASA의 아폴로 계획은 원자력을 발명한 맨해튼 계획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NASA 연구시설들의 분포(위쪽)와 그 모습들(아래쪽).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본부(워싱턴 DC), 존슨우주센터(휴스턴), 랭글리연구소(버지니아), 케네디우주센터(플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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