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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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되어 현실에 남겨진 <허울뿐인 삶과, 진실을 찾고자 숨 가쁘게 잠수하는 <영혼의 삶이 겹쳐서 나아간다. 여기서 하나의 주체가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평행우주 개념이 끼어든다. 가출 후 서울 공사장에서 추락한 후 병실에 입원해 있던 인선이 같은 시간에 엄마를 찾아와 죽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던 정심의 전언, 제주공항 지하에 주검으로 누워있을 오빠와 경산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빠져나간 오빠, 두 명의 오빠가 동생 정심의 가슴에 겹쳐 자리했듯이, 손가락 봉합 수술로 병실에 있는 인선과 서울-제주라는 공간적 한계와 폭설 쌓인 한밤의 산길을 훌쩍 넘어 공방에 나타난 인선은 동시에 존재한다. ‘돌’을 빠져나온 혼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든 가 있다. 몸은 저승에 있어도 마음은 님 계신 곳에 머문다는 ‘춘향유문’의 시구처럼. 여기 이승과 그곳 저승,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허술해진다. 춘향의 그리움이 세계의 담을 허물 듯이, 사랑과 그리움의 힘은 우주의 시공을 넘어간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웜홀의 출구가 아빠의 서재에 가 닿은 것처럼 다른 시간이 같은 공간에서 겹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무한한 우주의 시공을 넘나드는 것.
눈은 시공의 융합과 연속을 매개온라인 카지노 게임 상징이다. 눈이라는 액체의 순환적 사고를 통하여 거대한 시공의 우주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지금 여기’로 귀결된다.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맞은 첫눈과, 서른 살의 내가 서울 천변에서 젖었던 소낙비와 칠십 년 전 제주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을 덮었던 눈과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을 덮쳤던 그날 베트남의 흙탕물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던 결정들과 피어린 살얼음들.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는 문장은 피에 젖은 세상과 빼앗긴 자들의 역사를 한 줄로 꿴다. 대만의 삼만 명과 오키나와의 십이만 명을 포함하여 밤의 권력이 유린한 무고한 모든 숨탄것까지. 눈은 오늘도 시공의 담을 넘는다. 시공의 담을 넘어 만들어지고, 내리고, 쌓인다. 덮어서 묻어버린다. 그리고 누구의 역사 위에서 녹거나, 누구의 지옥 위에서 녹지 않는다. 눈은 영원하다.
이제라도 아린 봉합 수술과 바늘 찌름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들은 왜 한사코 되돌아가려 하는지, 왜 끝내 작별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아무리 아파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 뒤돌아보는 이의 시선 끝, 그 소실점 속에 박힌 사랑과 그리움, 진실과 양심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것. 함께 들여다보며 함께 공명하며 울고 아파하겠다는 것. 빙의된 무녀처럼 온 영혼을 다하여 공감해 주겠다는 것…. 죄없이 부서져 버린 어린 혼과 맑은 영 들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런히 할 때다. 금기로써 덮어 감추려는 부당한 권력의 음모를 역겨워하고 삼 분마다 찔리는 고통을 기꺼이 참겠노라 각오할 때이다. 지금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