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요
나는 머리가 썩 좋지 않은 편이다.'머리가 안 좋은데 어떻게 의사가 됐냐?'며 기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어린 시절학교에서 했던 IQ 테스트 상에서도 100 정도로 평균적인 편이었고, 특별히 창의력이 뛰어나다던지, 기억력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사실 기억력은 오히려조금 안 좋은 편에 속한다. 특히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서 예전에 진료를 보았던환자의 이름을 잊어버리거나, 심리학적인 현상에 대한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그 현상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딱히 머리가 좋지 않았어도공부를 남들보다 조금 잘할 수 있었던 나만의 비결은 엉덩이에 있다. 공부를 할 때 흔히들 말하는 '엉덩이 싸움'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능한 편이었던 것 같다. 오래 앉아있는다고 계속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뇌과학적으로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러나 나는 머리도 안 좋은 데다가, 집중력도 짧아서 공부를 잘하기 위해 오래 앉아있는 것을 택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의 전형적인 표본인 셈이다.
한창 공부를 많이 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번 공부를 시작하면 8시간에서 길면 14시간 정도를 공부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일어나서 잠깐 걷고 오기도 하고,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오긴 했지만 그 외의 시간은 어떻게든 앉아있으려고 했다. 멍 때리더라도 앉은자리에서 했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다른 짓도 앉아서 했다. 어쨌든 앉아있기만 하면 조금이나마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무식한 생각을 했던 시절이다.다행히 머리가 특출 나지 않은 나에게는 그 전략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됐다.그 덕분에 허리 디스크를 얻긴 했지만.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10시간씩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그 반대에 속했다. 어릴 때는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들어했던 아이였다. 그게 얼마나 심했냐면, 초등학교 때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식사 시간에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서 밥을 한 숟갈 먹고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또 한 숟갈 먹고 돌아다니고를 반복해서어머니에게 자주혼났던 기억이 있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나서 여러 주의력 결핍 장애(ADHD)환아들을 보면서, 나도 어릴 때는 ADHD를 진단할 정도는 아니지만 경계선 정도에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렇게집중력이 짧았던 나를 자리에 앉도록 한 것은 '만화책'이었다.오랜 시간 앉아있을 수 없는 나에게 긴 줄글의 책은 당연히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용도 짧고, 그림도 많은 만화책은 내 호기심을 사로잡았다. 당시 만화책은 지금만큼 어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는데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내가 만화책만은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으시고 그때부터는 오히려 내가 읽을만한 만화책을 사주시기도 했다. 당시 부모님께서 사주신 만화책이 '전략 삼국지'와 '닥터 노구찌'라는 만화책이었는데 아마 어느 정도는 역사와 교훈이 있는 만화책을 읽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만화책으로 나는 '엉덩이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아파트 상가의 책방에 드나들며 한 권당 200원에 책을 빌려 읽었다. 때로는 책방 사장님에게 혼나가면서 책방 구석에 앉아서도 몇 시간씩책을 읽곤 했다. 한동안 그렇게 만화책을 읽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만화책은 다 한 번씩 읽게 되었는데, 그때 책방 사장님이 나에게 소설책을 추천해 주었다. 전이라면 줄글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만화책으로 기초가 다져진 '엉덩이힘'과 집중력은 이제는 줄글을 읽어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공부는 책 읽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책 읽기란, 단순히 글을 읽거나 글을 이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앉아서 책을 오래 읽을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 나는 글을 읽는 능력뿐만 아니라 책을 오래 읽도록 앉아있을 수 있는 '엉덩이힘'까지도 만화책과 소설책을 읽으면서 단련했다. '오래 앉아있는다'는 행위를 지속할 '의지력'을 아주 사소하고 재밌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 단련했다.그 덕분에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남들보다 두세 배는 오래 앉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 걱정과 의심의 눈을 가진 보호자(대부분 부모님)와 같이 오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다행히 정신과적인 병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 병의 원인을 '의지력'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적지만 아직도 '마음의 병'은 '의지력'이 부족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보호자들이 꽤 많다.
우리 애가 의지력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어요. 좀 나가서 활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하는데 누구를 닮았는지 그럴 의지가 없어요
나는 이런 보호자들을 만나면 사실 '의지력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라는 한마디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보호자들도 얼마나 답답한 마음에 그런 말을 할까라는 생각에 간신히 다시 말을 삼킨다.
이런 보호자들처럼 '의지력'이라는 것이 머릿속의 스위치처럼 쉽게 켜졌다, 꺼졌다 하듯이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의지력'은 그렇게 만만한 친구가 아니다. 사람들은 내가 14시간을 앉아서 공부하는 능력이 타고났거나, 어느 순간 그런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 만화책부터 시작해서 수 만 시간을 책을 보며 앉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사랑', '연민', '공감', '행복'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실천하고 내뿜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신적인 능력도 신체적인 능력과 같이 시간을 들여 갈고닦아야 발휘할 수 있다.
의지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뇌에는 의지력을 담당하는 '전방대상회 피질'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뇌를 잘 활성화시킬 수 있어야 충분한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근육을 키우는 과정보다 훨씬 어렵다. 뇌의 세포는 근육의 세포만큼잘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지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의지'를 가져라고 말하는 것은, 걷기도 힘든 사람에게 갑자기 100m 달리기를 달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도 남들보다는 '의지력'이 조금뛰어나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특히 이상하게 설거지에 대해서는 의지력이 약한 편이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그릇들을 보면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외면하게 된다. '좀 더 쌓이면 해야지'라는 효율적인 생각과 '옷에 물이 튀는 게 싫어'라는 생각이 연합했을 때 내 의지력을 이기는 게 아닐까 싶다.
나조차도 사소한 설거지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의지력'이 필요한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거나 우울증이 있는 환자들은 얼마나 '의지력'을 발휘하기 힘들지는 가늠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옆에서 봤을 때 '의지력'이 없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신도 그 상황이 많이 답답할 것이다. '청소를 해야지', '씻어야지', '밥을 차려 먹어야지',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처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야 어린 시절, 우연과 부모님의 노력이 겹쳐 만화책과 같이 쉬운 단계부터 '의지력'을 쌓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이런 행운과 사치를어린 시절부터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일조차 시작할 '의지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쉬운 일이라도 못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의지력'이 부족하다며 비난하거나, '의지력'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지양했으면 좋겠다. 스위치 켜듯, 켜질 수 있는 능력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못하는 것'을 '안 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화가 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네가 의지를 가지지 않아서 그래'라는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부끄러움, 죄책감을 심어주게 된다.
나는 내가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꽤 많은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오늘은 퇴근하고 꼭 바로 설거지를 해야지'라는 다짐을 해도 못 지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단 낫지만. 그래서 나는 그런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설거지에 필요한 '의지력'보다는 '의지력'이 덜 필요한 빨래 돌리기, 청소기 돌리기와 같은 행동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런 작은 활동들을 하다 보면 '의지력'을 담당하는 '전방대상회 피질'이 잠에서 깬다. 활성화된 뇌는 관성이 생겨서 '의지력'이 조금 더 필요한 활동도 할 수 있게 만든다. 만화책을 읽던 '의지력'이 관성이 생겨서 공부를 하기 위해 앉아있던 '의지력'이 된 것 같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가면 일단 청소기의 손잡이를 잡고 본다. 청소기의 모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계속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물 한 컵을 마시고, 가끔은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러다 문득,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그릇들은 마치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들도 내가 조금 더 의지를 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로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쌓인 설거지 앞에서 망설이지만,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앞에 설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마치 예전에는 줄글조차 읽기 힘들었던 아이가 지금은 하루 종일 진료실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