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베의 <생트펠라지 감옥의 자화상
<그림으로 다시 읽는 프랑스 혁명사 연재 글입니다. 그런데 브런치 북은 30회로 마감되는 모양입니다. 편집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31회차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ㅎㅎ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의제2 제정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루이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하는 임시 국민방위정부가 구성되었다. 9월 19일, 프로이센 군은 카지노 가입 쿠폰를 완전히 포위하자,국민방위대 인원이 36만 명으로 늘고카지노 가입 쿠폰는 화포 3,000문을 갖춘 요새로 바뀌었다. 바르비종파의 카미유 코로가 대포 제조에 거금을 내놓았다. 훗날 인상주의를 이끌게 되는 모네와 피사로는 징집을 우려하여 런던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프레데릭 바지유는 본 라 롤랑드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기병대에 입대한 르누아르는 이질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해를 넘겨 1871년이 되었다. 1월 18일,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머물고 있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거울의 방’은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 사이에 위치했는데, 정원 쪽으로 17개의 창문이 달린 길이 73미터 갤러리에 357개의 거울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따라서 카지노 가입 쿠폰는 분연히 일어나야 마땅했으나 휴전과 반전,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프랑스는 1919년이 되어서야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과 같은 장소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려고 했다)
포위된 지 132일 만인 1월 28일에 카지노 가입 쿠폰가 마침내 항복했다. 길어야 4주를 예상했던 유럽인들은 굶주림과 추위를 무릅쓰고 항쟁을 지속한 카지노 가입 쿠폰 시민의 결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각각 15만 명에 이르렀다. 카지노 가입 쿠폰 포위전에서만 전사자 4,000명, 부상자 2만 5,000명이었다. 비전투원도 6,251명이 죽었는데, 유아 아사(餓死)가 4,800명에 이르렀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꼼뮨까지≫)
종전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독일은 대표성 있는 정부와의 협상을 요구했다. 임시 정부는 3주간 휴전을 얻어내 2월 8일, 프랑스 전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독일군이 43개 도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실시한 선거에서 왕당파가 60%가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그들은 왕정복고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2월 17일, 루이 필리프 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아돌프 티에르가 프랑스 공화국 임시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2월 26일부터 독일 측과 협상에 착수했다. 티에르는 10억 프랑을 감액하고 벨포르 지방을 지켜냈으나 ‘(철광석과 석탄이 대량 매장된) 알자스-로렌 지방 할양,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 독일군의 한시적 카지노 가입 쿠폰 입성’ 안을 들고 돌아왔다. 의회는 546표 대 107표로 강화조약을 인준했다.
3월 1일부터 이틀간 샹젤리제 대로에서 독일군의 카지노 가입 쿠폰 입성식이 거행되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 시민은 43개 의석밖에 배정받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모멸감을 느꼈다. 3월 18일,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자 티에르가 “카지노 가입 쿠폰를 무질서로 몰고 갔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베르사유로 피신하면서 카지노 가입 쿠폰에 정치 공백이 생겼다. 3월 28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카지노 가입 쿠폰 코뮌을 구성 후 입법과 행정기관의 역할을 병행했다. 지식인과 예술가 그리고 시민이 힘을 모아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코자 했다. "소유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라는 프루동의 신조를 물려받은 쿠르베가 코뮌에 참여했다. 연초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을 거부했던 그는 미술 장관으로 지명되어 보나파르트 왕조의 영광을 상징하는 방돔 기념비를 파괴하는 데 관여했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유럽 전역에서는 프랑스의 정치 중심에 노동 계급이 다시 등장하자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독일은 포로가 된 프랑스 병사를 임시 정부에 돌려준 후 사태를 지켜보았다. 5월 21일 밤 카지노 가입 쿠폰 시내로 들이닥친 베르사유 정부군 2만 명이 자국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면서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5월 28일 오후 2시, 시청 정면에 게양된 붉은 깃발이 내려졌다. (대문 그림; 마네의 <바리케이드 혹은 내전(1871)
열흘 뒤 체포된 쿠르베가 재판정에 섰다. 방돔 광장 내 나폴레옹 기념비의 철거 책임을 물어 금고 6개월, 벌금 500프랑이 부과됐다. 그해 8월 31일 티에르가 제3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한 달 뒤 쿠르베는 수감되었다. <생트펠라지 감옥의 자화상에서 역광을 받은 쿠르베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정체성이 확실하다. 영락없는 화가의 모습이다. 강렬한 빨간 목도리가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런데 감옥 환경이 생각과 달리 쾌적(?)하다. 철창이 설치되었지만, 여닫이 창문이다. 나무가 보이는 안뜰 풍경도 험하지 않다. 극형을 받은 동지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배어 있는 것일까?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골똘히 한 생각에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이 당당하나 치열하지 않다.
당시 희생자는 정부군 측 인원(전사자 877명, 행방불명자 183명)만 발표되었다. 그러나 카지노 가입 쿠폰 코뮌 측은 전사자와 학살자를 빼고도 피의 주간 중 즉결 재판에서 처형된 인원만 적게 잡아 2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노명식의 ≪프랑스혁명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 꼼뮨까지≫) 투옥된 43,522명 중 36,309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는데 4년에 걸쳐 10,13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중 사형 93명, 무기징역 251명, 유형 4,586명, 나머지는 전부 금고형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쿠르베에 대한 처벌은 개인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기득권층의 두려움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카지노 가입 쿠폰 코뮌의 잔재를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쿠르베는 이듬해 3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의회로부터 불신임을 받은 티에르가 사임하고 1873년 5월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크림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카지노 가입 쿠폰 코뮌을 무너트린 베르사유 정부군 총사령관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했다.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킨 후 모든 책임을 쿠르베 한 사람에게 물었다. 루브르궁의 창문을 모두 막아 약탈로부터 문화재를 지켜낸 그의 공적은 모른 척했다. 합법이라는 명분 아래 쿠르베의 저항적인 예술혼을 말살시키려는 술책이었다. 재건립 비용 31만 3,091프랑(당시 우리 돈 약 16억 원 정도)을 부과했고, 그의 그림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몰수했다.
가혹한 처분과 작품 활동 및 신변에 대한 불안을 느낀 그는 1875년에 뮌헨과 빈을 거쳐 스위스로 망명했다. 1877년 5월, 카지노 가입 쿠폰로부터 매년 1,000프랑씩 분납하라는 최종 판결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카지노 가입 쿠폰에 남겨 둔 재산과 그림을 모두 경매 처리하였음에도 1만 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쉰여덟 살 마지막 날에 한과 아쉬움을 모두 내려놓은 쿠르베가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명은 지나친 음주로 인한 부종이었다. 그가 지킨 정직성에 대한 대가치곤 시련이 지나치게 혹독했다.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와 달리 권력과 부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았던 쿠르베의 시신은 1919년에 고향 오르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사후 프랑스 화단에는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미술이 자리 잡았다. 여기엔 쿠르베와 절친했던 클로드 모네를 비롯하여 많은 후배 화가가 그에게 크게 빚졌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카지노 가입 쿠폰 코뮌은 72일간 유지되었다. 정치적 평가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존재하지만, 그 결기와 정신은 오늘날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어쨌거나 코뮌을 무너트린 티에르 정부에 대한 당시 국민 다수의 신망은 대단했다. 1872년 30억 프랑의 공채 모집에 14배 이상 응모했고, 그중에는 독일인 응모도 270억 프랑에 달했다. 그는 배상금 지급을 완료하고 ‘국토 해방자’가 되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파스퇴르가 개발한 저온 살균 기술로 와인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한 데 힘입은 바 컸다. 프랑스는 90년 남짓 끌어오던 혁명에 마침표를 찍었다.
1873년에는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 다르투아가 거론되면서 한때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백작은 삼색기를 거부했다. 완고했던 그에게 국기란 왕정을 상징하는 백색기만 용납되었다. (미셸 파스투로, ≪파랑의 역사≫) 이후 1875년 1월에 개정된 새 헌법적 질서에 의해 '7년 재임, 연임 가능'한 입헌군주적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제3 공화국이 가동되었다. 대혁명 이후 세 차례 입헌군주정, 두 번의 공화정과 제정 등 총 일곱 개 정치 체제를 겪은 후 세워진 공화정이었다.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티에르조차 그 생존 가능성을 크게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제3 공화정은 프랑스 최장수 체제가 되었다. 무려 93개의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정책 연속성이 보장되었고 법적, 제도적 보완을 통해 1940년까지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