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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29. 2025

인생은 짧고, 카지노 쿠폰 길다

1874년 인상주의 첫 번째 전시회

<그림으로 다시 읽는 프랑스 혁명사 연재 32차이자 마지막 글입니다. 그간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소재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패전 후 제3 공화국은 수년 내 안정을 이뤘고,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1875년의 정부 예산은 1억 프랑의 흑자를 냈다. 정부 공채가 5년간 10퍼센트 상승했으며, 저축은행 예금액은 27퍼센트 늘어났다. 주요 원자재 생산량이 석탄 60퍼센트, 철강 26퍼센트, 주철 23퍼센트 그리고해외 무역은 21퍼센트, 항만사업은 배로 증가카지노 쿠폰. 1878년, 드디어 프랑스의 재기를 대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로 파리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나폴레옹이 살아서 이런 상황을 목도하였다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영토 확장에 애썼나?"라는회한을 불러일으킬 만한 결과였다. 그해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를 프랑스에 양도카지노 쿠폰. 고대 강국 카르타고가 위치했던 튀니지는 시칠리아섬 남쪽에 근접한 과거 로마의 속령으로 이탈리아와 역사, 지리적으로 밀접카지노 쿠폰.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분쟁을 도발하여 프랑스로 하여금 라인강 방면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의식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종주권을 인정받은 프랑스는1881년 튀니지를 침공하여 1956년까지 보호령으로 편입, 통치카지노 쿠폰.

카지노 쿠폰마네의 <맥주 한잔(1873)

이제 프랑스는 문화적 번성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소설가 에밀 졸라가 1871년 7월, 고향 친구 폴 세잔에게 “우리의 시대가 오고 있어”라고 예견한 세상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1869년,예술 수준을 높이려고 살롱전 상금을 파격적으로 인상(10만 프랑)을 하고, 심사위원 3분지 2의 선출 자격을 살롱에 한 번이라도 입선했던 작가로 이미 확대한 터였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살롱전의 당락으로 화가의 실력을 가늠하던 시대에 그들의 기득권은 강고했다. 1873년 살롱전에서 마네의 <맥주 한 잔 등 두 점만 입선했고, 르누아르를 비롯해 많은 신진 화가가 낙선했다. 정부는 다시 낙선전을 개최하여 불만을 잠재우려 했으나 가난한 젊은 화가들은 심사 없는 전시회를 고대했다.

1874년 4월 15일, 드디어 사진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민간 주도 독립 전시회인 인상주의 첫 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울리케 베크스 마로르니의 ≪폴 세잔≫) 특정한 화풍을 지향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무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유한회사’란 이름으로 결성한 전시회에 30명의 미술가가 참여했다. 그들은 화상(畵商) 폴 뒤랑 뤼엘의 후원에 고무되었는데, 이제 별개의 자본주의적 민간 유통 채널을 확보했다는 의미였다. 훗날 뒤랑 뤼엘은 인상주의 작품을 무려 1만 2천여 점 수집했고, 전속 계약제를 최초로 도입하여 해외 전시회까지 지원했다.


카지노 쿠폰모네의 <카퓌신 대로, 파리(1873)

전시회의 주인공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 대문 그림)였다. <르 샤리바리지의 기사에서 “유치한 벽지도 이런 바다 풍경보다 낫다”라고 평했던 작품이었다. 기사는 루이 르루아가 조제프 뱅상의 평론에 의지했다. 뱅상은 명문 에콜 데 보자르의 교사이자 아카데미 회원 그리고 큐레이터였다. 따라서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가 강조했던 데생의 중요성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부류에 속했다. 그는 모네의 또 다른 작품 <카퓌신 대로, 파리를 보면서 그림 아래쪽 행인을 향해 ‘시커멓게 혀로 핥는 듯한 수많은 반점’이라고 조롱했다. 그리다 만 미완성 작품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화가들은 기사에서 “날로 먹는 장인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냉소적인 이름을 기꺼이 단체 이름으로 선택했다. 인상주의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교범이 되어 왔던 미적 기준, 즉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을 송두리째 거스른 아방가르드였다. 그리고 개별 활동하던 화가들에게 공동체의 힘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훗날 고흐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공동체를 결성하려던 것도 이에 고무되었다. 결국 정부는 1881년에 200여 년 역사를 지닌연례 살롱전의 공식 후원을 철회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프랑스 제2 제정에 대한 손쉬운 승리에 도취해 있던 자국 독일인을 향해 용감하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승리는 커다란 위험이다. 프랑스와의 최근 전쟁에 따른 모든 위험한 결과 가운데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아마 독일 문화가 마치 이 전쟁에서 승리카지노 쿠폰는 보편적 오해일 것이다. (···) 프랑스 문화는 계속되고 우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존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로 독일 문화에 승리는 있을 수 없다.”(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혁명의 결과물로 등장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는 혁명의 실패나 패전에 따른 트라우마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예술적 자유는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와 같은 정치적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유행이 지난 암시나 이상주의를 버리고, 개인의 영감을 사로잡는 대상에 충실하라’고 부추겼다. (줄리언 벨의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 따라서 무정부주의자 카미유 피사로조차 캔버스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이러한 파리의 예술 운동이 독일의 뮌헨,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로 이어졌으니, 니체의 경고는 시의적절했다.하지만 프랑스 내 정치적 지배 계층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카지노 쿠폰카유보트의 <대패질하는 사람들(1876)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대패질하는 사람들을 완성카지노 쿠폰.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마루의 대패질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강렬하게 대비를 이룬다. 웃옷을 벗은 노동자들에게서 드러난 상체 근육은 마치 그리스 시대의 토르소처럼 아름답다. 실제 파리의 노동자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육체였다. 하지만 도시 노동자의 삶의 현장을 최초로 소개카지노 쿠폰는 이유만으로 당시에는 충격과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미혼에 부자이며, 배를 건조하고 정원을 가꾸면서 여가에 그림을 그렸던 화가였다. 굳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태도를 노출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의 사후 정부에 기증하려고 했던 컬렉션 65점이 문화정책 담당자로부터 거부당카지노 쿠폰. 사회는 여전히 혁명의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있었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1876)

카유보트의 유언 집행인이었던 르누아르가 '19세기 전체에 걸쳐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언급'되는<물랭 드 라 갈레트를 그렸다. (페터 파이스트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곳은5년 전 파리 코뮌 당시 학살의 현장이었던 파리의 변두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방앗간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그러나그날의 아픈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 시민들이 떠들고, 마시고, 춤추며 일상을 만끽한다. 그들의 얼굴과 옷에 쏟아지는 햇살로 인해 생긴 그늘이 다양한 색으로 표현되었다. 인상주의 양식의 특징이다.

르누아르는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그림 입히는 일을 해야 카지노 쿠폰. 가난했음에도 명랑했고, 겸손했으나 엄숙한 이론에 무관심카지노 쿠폰. 노동자의 그늘진 삶보다는 중상류층의 향락적인 소재와 여성 누드를 많이 다루었다. 훗날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차남 장이 아버지에게 “속물적인 그림만 그린다”며 대들었다.


“인생 자체가 어두운데, 그림이라도 밝아야지. 그림은 기쁨이 넘치고 활기차야 해. 비극은 누군가가 그리겠지.”


르누아르의 답변은 ‘벨 에포크’ 시대를 살았던 대중의 내면을 대변카지노 쿠폰.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란 19세기말~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프랑스의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번성 시기를 말한다. 1889년 파리 국제 박람회가 열렸을 때 에펠탑 꼭대기에서 삼색기가 펄럭였고, 물랭 루주가 문을 열었다. 1900년 파리에 지하철이 들어왔다. 1914년에는 철도의 총연장 길이가 64,000킬로미터로 늘어났다. 도시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지난 20년간 50퍼센트가량 상승했으며, 그들의 주요 식품인 빵과 포도주의 소비 역시 그만큼 증가카지노 쿠폰. 음악당이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농민과 노동자 등 중·하층 계급에서도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넓어졌다. 19세기 중반 이전 지방 신문의 발행 부수는 1~2만 부를 넘지 못카지노 쿠폰. 그러나 최초의 대중지 <르프티 주르날은 1890년대에 100만 부를 돌파카지노 쿠폰.


이 시기에 가장 놀라운 정치적 반전 중의 하나는 우파가 과도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동안 좌파는 복수심을 접었다는 사실이다. (콜린 존스의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제3 공화정을 가장 큰 위기에 빠트린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유대인에게 시민적 평등권을 부여하자 주변 국가에서 탄압을 피해 많은 유대인이 이민을 왔다. 반유대주의가 확산카지노 쿠폰. 이런 상황에서 1894년에 군 내부의 기밀 누설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군부가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간첩 혐의를 덮어씌웠다.우파의 반드레퓌스주의자들은 이 사건이 공화정을 공략할 좋은 기회로 삼았다.

사건의 쟁점은 개인의 유, 무죄가 아니었다.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다. 인권 연맹은 좌파 지식인을 규합하여 드레퓌스의 석방을 주장하면서 12년간 프랑스 사회는 둘로 쪼개졌다.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기사로 유명해졌다. 반면 에드가 드가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었다. 뜻밖이었다. 그는 마네와 함께 사실주의 화가임을 자처하면서 어린 무용수가 상류층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회성 짙은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었다.

4년간 유배 생활 중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한 드레퓌스가 다행히 1906년 무죄 판결을 받아내면서 사건은 종료되었다. 제도권이 유연성을 갖추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프랑스에서 물리적인 혁명은 자취를 감췄다. 프랑스는 일상을 회복했고, 오로지 혁명을 독창성으로 받아들인 파리의 예술만이 날로 번성했다.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의 거대한 서사는 도대체 파리의 어느 그늘 아래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저 무상할 따름이다.


“인생은 짧고, 카지노 쿠폰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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