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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1. 2025

진실은 상상보다 낯설다.

stranger than fiction, 2006



만약, 내가 어느 소설가가 쓰고 있는 글 속의 주인공이라서 작가에 의해 내가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혹은 내가 글로 만들어낸 인물이 실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람이라서 그의 운명이 자신의 글에 달려있다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은 각각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장 쉬운 해결책은 작가를 찾아내서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거나 스토리를 바꾸게 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작가를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에선 그저 누군가는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죽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르고 작품을 발표했으리라. 그리고 죽은 이를 아는 누군가가 그 책을 읽었다면 그의 인생과 너무나 닮은 책이 있더라고 조금쯤 놀라며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만으로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이 숨겨둔 삶의 의미와 변화를 찾아내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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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는 미국 국세청의 유능한 직원이다. 정확한 수치를 다루는 사람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루틴을 12년째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양치를 할 때도 각 부분마다 칫솔질 온라인 카지노 게임 횟수가 일정하고, 연두색 사과 한 알을 입에 물고 집을 나서는 시간, 건널목을 건너는 보폭 수, 버스 정류장에 도착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간, 점심이나 커피를 위해 할애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간 따위가 정확하다. 가족도 없고 애인도 없고 혼자 밥을 먹고 11시 13분에 혼자 잠자리에 든다. 데이브라는 친구가 한 명 있지만 그와도 회사밖에서 만나지는 않는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아침에 평소대로 횟수를 세며 이를 닦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녀는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에 대해서 내레이션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 마치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의 지켜보며 중계방송을 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고 자신에게만 들리는 이 목소리때문에 혼란스러운데 게다가 새로운 일감까지 생겼다. 애나라는 제빵사의 세무감사를 나가게 된 것이다.


애나는,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던 시절에 기숙사 주방에서 우연히 빵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행복했고, 자신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은 학생들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마움을 표하자 신이 난 그녀는 계속 온갖 종류의 쿠키를 만든다. 하지만 자신은 낙제를 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아예 베이커리를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눔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세금의 일부를 체납한 이유는, 정부가 자신이 낸 세금을 극가안보나 기업홍보, 선거운동 따위에 사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말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토록 당당하고 자유로운 그녀를 보면서 해롤드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빠져든다.


해럴드는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치 환청처럼 계속 들리는 내레이션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루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전자 손목시계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본다. 하지만 그 남자의 시계가 3분 빨리 간다는 것을 몰랐던 해럴드는(시간을 가르쳐 준 남자도 몰랐으므로 악의는 전혀 없다.) 의심 없이 그 남자가 알려준 대로 시계를 맞춘다. 그때 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해롤드가 이 행동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난데없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거의 미칠 지경이 된 해럴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가 위해서 정신과 의사를 거쳐서 문학과 교수인 쥴스까지 만나게 된다. 쥴스는 해럴드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강박증 정도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하지만 해롤드가 기억하는 내레이션의 한 구절(little did he know :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함.) 때문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면서 계속 상담을 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럴드는 쥴스의 방에 켜있는 텔레비전에서 한 작가의 인터뷰 방송을 보면서 자신에게만 들리는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카렌이라는 유명한 작가였다. 카렌의 작품에 대해서 잘 아는 쥴스는 깜짝 놀라며 말한다. 그녀의 소설은 늘 주인공이 죽는 비극이라고.


쥴스는 해럴드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면 그 소설의 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실행해 보라고 한다. 해럴드는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면서 화장실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포크레인이 그의 집 벽을 부순다. 황당하게도 주소를 잘 못 안 작업자의 실수였다. 이를 안 쥴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누워만 있었는데도 이런 위험한 일이 벌어졌으니 아무래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면서,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며 삶을 즐기라고 말한다.


해럴드는 감정이입도 없이 단정적인 쥴스의 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자신이 삶의 방식을 바꾸면 소설의 내용도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을 포기할 수 없어서 휴가를 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을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매사에 숫자를 세지도 않고, 어릴 적부터 소원이었던 기타를 배우고, 데이브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애나에게 색색의 플라워(flower) 대신 여러 종류의 플라워(flour)를 주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날 밤, 애나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그는 기타를 치며 그동안 연습했던 노래를 부른다.


화면을 절반쯤으로 나눠서 달그락 거리며 설거지를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애나와 혹시라도 들릴까봐 조심스럽게 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르는 해럴드를 한 프레임 안에 넣은 장면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아무런 화려한 풍경이나 장식도 없이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모습이 주는 긍정적인 삶의 기류가 화면에 가득하다. 그가 부른 Whole wild world 라는 노래의 가사 또한 맞춤하게 사랑스럽다. 그 어느때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행복한 4주를 보낸 해럴드에게 가장 정점은 '애나'였을 것이다..


카렌은,

한 소설을 십 년 동안이나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일명 writer's block(작가들이 주로 심리적인 요인으로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걸려있었다. 이유는 주인공을 어떤 방법으로 죽일지를 결정하지 못해서다. 그러자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출판사에서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서 페니를 보낸다. 페니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작가들의 심리적, 일상적인 관리를 하며 출판에 성공하도록 만든 경력이 많은 유능하고 꽤 현명한 사람이다. 덕분인지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던 카렌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사과 한 알을 보며 영감을 얻어서 드디어 어떤 방식으로 주인공을 죽일지 결정하게 된다.


한 편, 쥴스와의 대화 후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예감한 해롤드는 작가의 번호를 찾아내서 전화를 한다. 해럴드와 대면한 카렌은 첫눈에 그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임을 알아채고 몹시 놀란다. 해럴드는 예정된 자신의 죽음을 바꿔달라고 하지만 카렌은 아직 탈고를 하지 않았을 뿐, 이미 해럴드의 죽음은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절망감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는 헤럴드를 보고 페니는 소설을 읽게 하자고 한다. 아마도 페니는, 해럴드가 글을 읽기만 하면, 자신의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걸 알아채리란 확신이 있었나보다.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이겠지만 정말 현실이라면 지독하게 비인간적이다. 예술이, 문학이 뭐라고...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나도 모르게 이성은 물리치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영화적 속내를 알면서도 미묘하고 이상한 긴장감과 기대를 갖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해럴드는 그 원고를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쥴스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한다.


원고를 읽고 난 쥴스는 이건 카렌의 걸작이 될 거라면서 소설 속에서의 해롤드의 죽음은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서 완벽하고 불가피한 설정이라 바꿀 수는 없지만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해럴드를 위로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이토록 시적이고 의미있는 죽음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한다, 주인공은 비극적으로 죽지만 영웅이 된 그의 스토리는 영원히 남을거라고.


현실에서라면 쥴스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을 것이다. 걸작이 될 소설을 위해서는 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혐오스런 탐미주의자다. 타인의 목숨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건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상실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쥴스는 겉으로는 유능한 대학교수이자 멘토지만 반복되는 자신의 일상을 그 누구보다도 지겨워하는 사람이라서 대리만족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치 IV로 영양제를 맞듯이 달고 사는데,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나 드라마, 책, 등을 통틀어서 커피가 이토록 역겨운 음료로 비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늘 그 반대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설정이나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커피뿐만이 아니라 요거트를 떠먹고 치간칫솔을 사용하는 등 식욕을 떨어지게 하는 '먹는 것과 관련된 행위'가 매번 반복되고, 늘 서둘러 걸을 만큼 할 일이 많은데도 수영장에서 안전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한다. 그러면서도 해럴드에겐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줄스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쥴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후, 해럴드는 시내버스 안에서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버스가 종점을 오가는 동안 원고를 다 읽은 해럴드는 카렌을 찾아가고, 원래대로 소설을 완성하라고 말한다. 해럴드는 카렌의 소설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자신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나뿐인 친구의 오래된 꿈을 이뤄주기 위한 선물을 보내고, 애나를 찾아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원래의 루틴대로 다시 출근한다. 글을 쓰고 있다는 뜻인 카렌의 내레이션대로 움직이면서.


해럴드는 시계를 고치면서 3분 빨리 가는 시간에 맞췄었다. 그래서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건널목을 건넌 후 바로 떠나기 직전의 버스에 올라타던 평소의 루틴대로가 아닌 3분 일찍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때, 자전거를 탄 소년이 찻길로 내려서고 달려오던 버스와 부딪치기 직전에 헤롤드가 소년을 구하고 대신 버스에 치인다. 바로 다음 장면엔 헤럴드가 죽는 순간을 타이핑한 후, 절규온라인 카지노 게임 카렌이 보인다. 정말 이런다고? 이렇게 끝난다고? 라며 허탈을 넘어서 뭔가 불편해지는 순간, 이게 끝이 아님을 알고 순식간에 스트레스 지수가 뚝 떨어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피할 수가 없다. 나만 마음 편할 순 없잖아요..)


영화 중간에 갑자기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한 장면씩 지나간 적이 있다. 아빠에게 자전거를 선물 받고 기뻐하는 소년, 직업을 찾아 구인란을 뒤지며 애쓰다 비로소 버스운전사가 된 여자, 이들은 휴가를 끝낸 해럴드가 다시 출근하는 그 아침에도 비슷한 시간에 각자 외출 준비를 하는 장면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누굴까? 누구와 연결되는 사람일까? 생각했는데 일종의 복선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헤럴드가 구해준 자전거를 타던 소년과 그 버스를 운전하던 여자가 그들이다. 만약 만약 해럴드가 죽었다면 버스 운전사는 물론 자전거를 탔던 소년과 그 자전거를 사준 아빠까지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만약 그때 조금만 빨랐더라면, 혹은 조금만 늦게 움직였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할 때가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으로 인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기도 하고, 때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도와 감사를 배우기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도 간발의 차이로 벌어졌던 나쁜 일들을 몇 번 경험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삶의 진행 속도를 조금 늦추거나 앞당길 수 있을까 라는 심각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고 할 수 있는 것이라야 아주 사소한 습관이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그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비극에 대해서 지나친 자책을 하느라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어차피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자신을 혹은 타인을 비난하고 원망하며 그 절망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좀 먹지 않도록 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이 기억의 상처를 치유온라인 카지노 게임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비극에서조차 나도 모르게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위로의 말과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는 일이 곧잘 일어나는 걸 보면 말이다.


작가는 결말이 바뀐 소설을 들고 쥴스를 찾아온다. 달라진 결말 부분을 읽고 난 그는, 나쁜 건 아니지만 걸작이 될 수는 없다면서 왜 바꿨는지 물어본다. 그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걸 모르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젠 그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막을 수도 있는데 기꺼이 죽겠다고 한다면 당신이라도 그런 남자를 살리고 싶지 않겠어요? 나는 뜬금없이, 비장한 마음도 없이, 이순신 장군의 명언을 떠올린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

잘하던 일도 더 잘하려는 욕심이 들어가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는 허세가 들어가면 망치기 일쑤다. 하다못해 평소에 잘 만들던 음식도 손님을 초대하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건 초대한 손님에 대한 부담의 정도에 따라서 변하는 징크스기도 하다. 자랑이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불순물처럼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망쳤다는 걸 남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자신만은 안다. 정확한 기준치를 아는 건 오직 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는 타인의 시선으로는 절대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그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스스로 어리석은 타인이 되기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답게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늘어나는 게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해럴드는, 시간을 잘못 맞추어서 죽음의 이유가 될 뻔했던 손목시계 덕분에 살아난다. 온몸은 부러지고 상해서 만신창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사인이 될 수 있었던 손목 동맥의 파열로 인한 출혈을 사고당시 깨진 시계의 파편이 막아 주었던 것이다.


처음과는 다른 결말로 책을 마무리하면서 작가는 이렇게 쓴다.

온몸에 깁스를 하고 병상에 누워서도 에나가 만들어 온 슈가쿠키를 한 입 먹으며 모든 게 잘 될 거란 느낌이 드는 해럴드처럼, 우리가 삶에서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희망은 잃고 비극에 빠져 있을 때라도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것들, - 이를테면 사랑하는 이의 익숙하고 다정한 손길, 타인을 배려하는 친절한 행동, 진심 어린 격려, 위로의 포옹, 둘이서만 공유하는 부드럽고 사소한 비밀, 아직 먹어보지 못했던 데니쉬나 쿠키 한 조각 같은 것들- 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저 시시한 일상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훨씬 크고 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게 사실이란 걸 안다. 해럴드의 손목시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늘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자각하면 허무주의에 빠질수도 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 하러… 라며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망할 줄 알면서도 사과나무를 심는 무모한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향해 예의를 지키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행복해서 내 삶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비극일지라도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어서 소중하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그러니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이면에 숨어있는 사소한 기쁨을 찾아내는 세심함과 타인을 향한 마음씀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자고 나 자신을 격려한다. 삶에서 가장 긍정적인 기류를 숨기고 있는 건 바로 오늘이다.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


제목으로 쓰인 stranger than fiction 은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에서따온 표현으로 시인 바이런(Byron)이 돈 주앙(Don Juan)에서 14번째 시편에 처음 쓴 말이다.

Tis strange—but true; for truth is always strange; Stranger than fiction.


현실에서 벌어진 어떤 일이, 만들어진 스토리보다도 훨씬 더 믿을 수 없거나 놀랍다는 의미로 일상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허구보다 낯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세상을 살고 있어선지 십오 년쯤 전에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보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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