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복제되는 인간
창작이란 무엇일까?
창작은 인간 존재의 흔적이며 고통의 발효이고 삶을 견뎌낸 증거다.
밤을 지새우며 단 한 단어를 고치는 시인.
화폭 앞에서 자신과 싸우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화가.
결과를 위해 살지 않았다.
과정 자체가 삶이고 그 삶을 통과한 외침이다.
창작은 기술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소진되고 나서야 끝나는.
이제는 카지노 게임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쓴다. 음악도 만들고 영상도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을 창작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몇 초면 해낸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가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카지노 게임는 실재(實在) 하는가?”
“카지노 게임는 고통(苦痛) 하는가?”
카지노 게임는 수많은 인간이 쌓아 올린 데이터 더미를 읽고 조합한다. 카지노 게임는 데이터 하나하나에 담긴 인간의 절박함을 이해하고 있을까?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자가,
어떻게 슬픔을 노래할 수 있는가.
고통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가.
그 차이를 간과하고 과연 카지노 게임를 창작자라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을 흉내 내는 카지노 게임의 바탕은 인간이다.
어떤 이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이는 믿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고 그들의 시간, 감정, 땀방울은 카지노 게임의 데이터가 되었다.
허락받지 않았다.
감사받지도 못했고
이름도 남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는 이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말끔한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감탄한다.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뛰어난지.
“우리는 대체 무엇에 감탄하고 있을까?”
저작권은 법적 권리 이전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누군가의 고통과 시간을 존중하는 행위.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지 않겠다는 다짐.
저작권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지워버리는 일일 수 있다.
‘인간의 고통과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저작권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기술은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기술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배신하게 된다.
카지노 게임가 아무리 정교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 안에는 ‘살아있는 흔들림’이 없다. ‘망설임과 떨림’이 없다.
우리가 창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불완전하고 치열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카지노 게임는 그 불완전함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카지노 게임는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카지노 게임가 만든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대신,
그 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누구를 딛고 만들어졌는지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시간과 고통을 몰래 훔쳐 조합한 결과물에 열광하는 것. 그것은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성의 패배다.
기술의 발전을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흔적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저항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기술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는 환상 앞에 창작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존엄이다.
저작권은 법적 권리이기에 앞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고통하고 망설이고 다시 일어서는 존재라는 증명이다.
우리가 저작권을 지킨다는 것은
창작자의 고통을 존중하고 그들이 남긴 시간을 기억하고 인간 존재의 깊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불완전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증명해 온 인간의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