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쿠폰이라는 소설은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 카지노 쿠폰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우리나라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 카지노 쿠폰가 탄생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재미보다는 깊이 있는 인간 통찰, 뛰어난 문학적 가치와 혁신성, 사회 및 역사적 메시지, 카지노 쿠폰의 독창적인 시각과 철학 등이 담겨 있어 문턱이 높은 편이다.
해피엔딩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을 수 없을 것이니.
비극적 상황에도 주인공만 해피엔딩이라면 전체 작품의 메시지가 훼손될 것이다. 사람들은 해피엔딩으로 비극은 다 잊어버릴 것이니까.
이 소설은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독서토론 프로그램 도서로 선정한 후 나를 독서 멘토 교사로 지정하면서 읽게 되었다.
읽는 내내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책 제목이 카지노 쿠폰인데 도대체 카지노 쿠폰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 천국 같은 카지노 쿠폰을 상상하는 것인지,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삶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 책의 주인공은 부유층도 권력층도 아니니 그에게 비친 카지노 쿠폰은 그저 이상향일 수 있을 듯했다. 아니면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키워가는 나름의 추상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을 막 대하는 경향이 있다. 가진 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인정받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탄압과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소설에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교육받은 자와 문맹, 재력을 가진 자와 가난한 자, 채권이 있는 자와 채무가 있어서 자녀를 담보로 맡겨야 하는 자, 종교를 가진 자와 가진 자 입장에서의 이교도,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강약 구조가 이분화되어 제시된다.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한 식민지와 피식민지...
무기를 가진 자와 저항할 수 없는 자...
필요한 물품을 쥐고 있는 자와 생존권을 그에게 의존해야 하는 자...
저자는 동아프리카 이슬람 출신으로 이런 억압과 탄압을 삶으로 겪었다. 그래서인지 약자의 입장으로 공감되는 묘사가 너무도 사실적이고 비참할 정도였다.
그 불균형의 관계에서 치욕과 수치심이 발생한다. 그 치욕과 수치심마저 생존 자체의 절박함으로 마비가 되면 인간의 존엄성까지 말살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현실과 상황은 다르지만 닮은 아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자의 인공 정원, 가지지 못한 자의 야생 숲...
정원은 위험으로부터 통제되고 아름다움을 강조한 인간 편의적인 공간이다.
아프리카 내륙으로 장사를 하러 떠나는 여정에서 보이는 야생은 있는 그대로의 웅장한 자연의 모습이지만, 위험한 요소로부터 보호받지는 못하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야생동물이나 벌레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묘사가 충격적일 정도로 영상을 본 것처럼 잔상이 남았다.
인간의 애씀으로 죽음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문명화가 되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갈라 놓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도시를 사는 사람들은 야생동물에 잡아먹힐 일은 없을 것이니.
카지노 쿠폰는 백인과 흑인의 강약 구도를 파괴한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흑인 중심주의자들은 아프리카의 아랍인, 인도인, 아시아인들을 탄압했다. 카지노 쿠폰는 아프리카 아랍인이었다.
카지노 쿠폰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기조를 유지하며 현실을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등장인물 각자의 비극과 고통을 담담하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스템적인 변화나 개인의 각성으로 초인적인 성장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냥 치열하게 각자의 영역에서 매 순간을 살아내는 인간들의 군상이 여기저기 가득 차 있다.
상인들과 원주민들의 대립, 그걸 가소롭게 보는 듯, 언제든 개입해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유럽 식민국가들의 존재...
대립과 갈등을 단번에 해결할 방법도 보이지 않고, 상하관계 같은 불합리한 불균형은 현실로 고착되어 있었다. 부당하고 억울해도 소극적 저항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무력감이 가득하다.
이분법적인 우월주의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의 명분이 되었고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노예에서 해방될 기회를 주었지만 자유를 선택하지 않은 노인 노예가 왜 자유를 선택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네가 이야기하는 자유가 뭔지 알아. 내가 태어난 순간 가지고 있던 자유지. 이 사람들이 넌 내 것이다, 나는 너를 소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비가 지나는 것이나 하루의 끝에 해가 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들이 좋아하든 말든 다음날 아침해는 다시 뜬다고. 자유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듣던 주인공 청년은 “인내와 무력감의 지혜”라고 평한다. 그 자체로 감탄할 지혜인지 모르겠지만 약자를 못살게 구는 자들의 탄압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니까.
노인 노예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그냥 공감해버릴 뻔했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모든 걸 수용하면서 제한된 자유에서 자신만의 자유의 영역을 찾아 의미를 부여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물론 탄압의 관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메시지가 여기 담겨 있다고 본다. 가난과 탄압과 위험과 설움과 어려움의 환경에서 순응하며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지만, 가진 자들과 가해자들은 영영 바뀌려 하지 않으며 인내하고 무력한 상황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을 제시한다.
물론 작품에서 변화의 희망이나 방향이나 방법도 제시하지는 않는다. 무력함과 인내가 강요되는 일상의 끝도 보이지 않는다. 카지노 쿠폰가 고향을 떠나 영국에서 교수를 하면서 자신의 삶은 완전히 변했지만, 아프리카의 현실은 이후로도 카지노 쿠폰의 유년 시절의 고통에서 완전한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랬다면 카지노 쿠폰가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인 느낌의 일련의 소설들을 계속 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픔과 상처에 대한 통찰은 그에게 카지노 쿠폰의 영예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당장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 청년이 부모님의 빚 대신에 담보로 와서 겪게 되는 성장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분명 성장은 있어도 제한된 테두리 안에서였다. 그에게 자유는 있으나 완전한 자유는 없었다.
주인아저씨의 부인과의 사건. 더 친밀한 접촉과 교감을 원했던 부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나온 장면은 성경의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했다. 요셉은 시기하는 형들로 인해 이국 땅에 팔려가서 노예로 지냈다. 그에게 정당한 변호권도 억울함을 풀만한 힘도 없었다. 그래서 감옥살이를 했다. 당장은 희망이 없어 보였으나 감옥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성장한 후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주인공 청년도 거의 노예 신분이나 다름없는 담보로 붙잡혀서 일을 하면서 권력자의 손길을 뿌리친 일로 자기변호의 기회 없이 파국이 예상되는 것 같았지만, 주인아저씨는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었고 그 일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요셉이 감옥에 갔던 것보다 더 큰 희망의 장면처럼 보였지만, 그 이상의 반전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권과 선택의 범위 내에서 소시민적인 변화를 이뤄가며 의미 있는 삶을 이뤄가야 할 삶의 이야기.. 비교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려는 세상적 시각을 거부하며, 그저 자신만의 성장과 변화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계급 같은 부와 권력 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불균형과 약한 자들의 신음 소리가 여전히 끊기지 않는 현대에서도, 세상을 뒤엎으며 카지노 쿠폰을 건설하는 일은 여전히 묘연해 보인다.
각자의 카지노 쿠폰을 꿈꾸며, 각자의 카지노 쿠폰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게 실존하는 카지노 쿠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