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룰 때 유의해야 할 카지노 게임: 억압

카지노 게임, 억압(suppression)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경험할 때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방어기제가 마치 한 사람의 ‘흠’인 것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어기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말 그대로 자아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방어’하는 방법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갖은 불편한 자극에 그대로 노출되어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방어기제는 성숙한 방어기제와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성숙한 방어기제의 대표적인 예시로 승화(sublimation)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옛 문학이나 음악에서 쉽게 접할 수 있듯이 심리적 고통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승화시킴으로써 이를 해소하는 유형이다. 반면, 미성숙한 방어기제는 일시적으로나마 불편한 자극을 막아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고 정신건강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미성숙한 방어기제의 대표주자가 바로 억압(repression, suppression)이다. 마음에 들어있는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억누르고 막으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억압이 정말 효과적으로 우리를 불편한 자극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을까?

2024년 6월, 임상심리학 학술지인 Health Psychology Review에 억압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게재되었다. ‘건강한 성인에서의 감정 억제 및 급성 스트레스 반응(Emotion suppression and acute physiological responses to stress in healthy populations: a quantitative review of experimental and correlational investigations)’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살펴보자.

본 연구는 감정을 억제하는 방어기제가 우리 몸이 스트레스를 느낄 때 일어나는 생리적 반응과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24편의 선행 연구를 종합 분석했다. 그중 14편은 자기 보고식 설문조사를 통해 평소의 감정 억제 성향을 측정했고, 나머지 12편은 실험을 통해 감정 억제를 유도했다. 예를 들어, 참가자에게 불편한 영상을 시청하도록 하며 “영상을 보는 동안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라”고 요구하거나 개인적으로 힘든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며 “기억에 대해 말할 때 감정을 표출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또한 스트레스 반응을 유추할 수 있는 심박수, 혈압, 코티솔 분비 등을 측정했다.

그 결과, 실험상 감정 억제를 지시받은 참가자가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은 대조군보다 전반적으로 높은 스트레스 반응을 나타냈다. 심박수 및 심박출량이 상승하는 등 심장 반응이 증가했으며, 혈압 및 혈관 저항 역시 높게 측정되었다. 더 나아가, 스트레스 반응을 총괄하는 호르몬인 코티솔이 더욱 민감한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는 실험뿐만 아니라 설문조사 상으로 감정 억제 성향이 강하다고 답했던 그룹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됐다.

한 마디로, 몸이 불편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험에서는 제한된 시간 내의 일시적인 반응만을 확인할 수 있지만, 평소 감정을 억제하는 습관은 장기적으로 만성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특히 혈압과 코티솔이 지속해서 높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고혈압, 심혈관질환, 대사 장애 등의 성인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한 문제는 신체건강에 해당하는 결과이며, 논문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억압은 우울, 불안, 대인관계 문제 등의 다양한 정신적인 어려움을 유발하는 위험인자이기도 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누군가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정말 그럴 수 있는가? 아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머릿속은 코끼리 천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카지노 게임의 역설이다.

우리는 의식 속으로 튀어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짓누를 수 없다. 그러니 그 생각 자체를 막으려고 애쓸 게 아니라, 생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건강한 방식으로 이를 처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참고 문헌

Tyra AT, Fergus TA, Ginty AT. Emotion suppression and acute physiological responses to stress in healthy populations: a quantitative review of experimental and correlational investigations. Health Psychol Rev. 2024;18(2):396-420. doi:10.1080/17437199.2023.225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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