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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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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반창회)

우리가 여고를 졸업한 지는 37년이 되었지만, 여고 입학 사십 주년을 기념하며 맞이하게 된 1-4반 반창회가 열리는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9일이었다.


여고 시절 은사님이었던 현직 목사님의 정치적 성향과 제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조금 우려되었던 반창회가 열리기 전에 다행히 윤석열 파면 선고가 있었다. 물론 윤석열 탄핵선고 이후에도 나라는 어수선하기 이를 없었지만, 적어도 절체절명의 시급한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창회가 열리는 날, 나는 공연히 아침부터 분주하였다. 모든 것은 진즉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가끔 들르는 꽃집에 가서 선생님께 드릴 꽃다발만 준비해서 행사 장소로 이동하면 되는 일이었다.


멀리서 오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맞을 생각에 나는 약속 장소에 이십 분 일찍 당도해 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오시고 친구들이 하나둘 도착하였다.


타임테이블까지 만들어서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사람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가르치려는 듯이, 여주에서 오는 친구 한 명이 엉뚱한 장소로 갔다가 약속 장소로 늦게 오는 바람에 타임테이블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깟 종이 한 장의 타임테이블쯤이야, 휴지통에 버리면 그만이었다. 모두가 자리에서 만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모두들 음식은 뒷전이고 한 개만 있는 입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친구들의 사십 년 묵은 이야기는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사십 년 전 여고생들의 등쌀에도 밀리지 않던 선생님의 눈빛이 얼추 늙은 제자들의 이야기 폭포수에 조금씩 흔들리는 듯하였다. 사십 년 묵은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는 그 시절엔 차마 들추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담겨 있었다.


4.19 혁명의 혼령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사십 년 동안 봉인된 비밀 서책의 포장지를처음 뜯어버린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반듯한 모범생 수현이었다.가난한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수현이는 고3 시절 반장을 하면서 보게 된 어른들의 세상을 고발하였다.


돈과 권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교사들의 난폭하거나 무분별한 행동의 희생양은, 늘 언제나 어김없이 가난하거나 부모의 조력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똑똑하고 성실할뿐더러 타의 모범이 되는 수현이도 촌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수모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참 동안 수현이의 폭로가 이어지자, 선생님의 눈동자가 힘 없이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몇몇 교사들이 돈과 권력 앞에 굴종했던 모습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던 수현이가 반장이라는 이유로 출석부로 맞았다는 대목에서는 선생님도 적잖이 분노하는 기색이었다.


수현이의 고발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주에서 온 친구가 몸을 미세하게 떨며 조용한 목소리로 2차 폭로전을 이어갔다. 선생님은 그날 온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주에서 온 영진이의 1학년과 3학년 때 담임을 겸했었다.


영진이의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선생님의 배려로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장학 제도가 고3 때 생겼는데, 그 첫 번째 수혜자가 영진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영진이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교장 선생님과 동료 교사들을 설득해서 새로운 장학 제도 하나를 더 만들었던 것이다.(1985년 우리가 여고에 입학할 당시에는 무상교육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진이는 그 장학제도의 수혜자가 된 것이 마냥감사한 일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당시에도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선생님은 다른 교사들에겐 시기 질투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을 시기하는 다른 교사들은 직접적으로 선생님을 공격하는 대신에 영진이를 따로 불러 상처를 주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던 선생님은, 사십 년 만에 제자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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