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새입니까?
가끔 현대미술을 접할 때는 “너무 성의가 없다”. 또는 “저건 나도 그리겠다.” “뭔지 모르겠다.”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림 감상에 꽤 취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조예가 깊지는 않으나, 뭘 너무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떤 배경지식을 갖아야 할지 의문이 든다.
변기를 떡 하니 갖다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도 있고, 진짜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벽에 붙이고 이것을 코메디안(Comedian)이라 명명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는 1억 5천만 원에 팔리기도 했다. 이처럼 현대 미술은 감상자들에게 많은 상상과 이해기술(?)을 요구한다.
이것이 새입니까?라는책을 선물로 읽게 되었는데, 실제 사건을 만화형식으로 그려내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 화가와 예술가들이 책 속에 잠깐씩 등장카지노 게임. 마침 음악회에 가서 잔뜩 Eric Satie를 듣고 온 날 책 속에 사티(Satie)가 등장했다. 뒤이어 오귀스트 로댕, 마르셀 뒤샹, 포브스 왓슨, 알렉산더 칼더, 만 레이, 페르낭 레제, 제이콥 엡스타인, 장 프루베가 등장카지노 게임.
이야기는 콩스탕탱 카지노 게임(Constantin Brancusi)가 뉴욕으로 자신의 작품 “공간 속의 새”를 뉴욕으로 보내면서 세관원들이 예술품인지 잘 모르겠다. 는 이유로 실용적인 물건으로 간주해 40%의 관세를 붙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품만 봐서는 이것이 “새”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과, 이것이 작가가 찍어낸 것이 아닌 수공예로 만든 하나밖에 없는 작품인지가 관건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보이는 것을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본질을 조각”카지노 게임고 말했다. 회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상의 재현과 자연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미 독자들은 뒤샹을 통해 “레디 메이드”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법은 아직도 시대를 소화하지 못했다.
마르셀 뒤샹은 ”Conceptual art”를 창시하며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아, 예술을 행위와 사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오귀스트 로댕 이후부터는 조각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에서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복잡함과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는 움직이는 조각을 처음으로 만듦으로써 “예술은 정지해 있지 않아야 한다. 살아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며, 만 레이(Man Ray)는 사진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화가이면서도 혁신적인 사진 작업을 펼쳤다. 끝으로 산업기술을 건축과 가구 디자인에 접목한 장 프루베(Jean Prouve)까지 시대에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던 예술가들은 카지노 게임를 지지했다.
카지노 게임는 형태의 순수함을 강조하며 선과 곡선만을 남긴다. 수많은 고민과 구상, 끝없는 연마질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지만, 이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언제가 그 값을 치러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용기일 수도, 고집일 수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카지노 게임의 의도가 아무리 분명하여도, 작품은 결국 카지노 게임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해석하는 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정확한 것은 의도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여러 작품을 감상할 때도 특별히 눈이 가고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구별된다. 기호와 상관없이 그림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력이라고 할까? 작가의 오랜 수련, 기발한 상상, 부단한 붓질들이 마치 캔버스에서 숨을 쉬며 한 해 한 해 자라난 것같이 작품에도 그것들이 느껴진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은 작가와 나누는 참 주관적인 소통인 셈이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고, 표현하는 자와 느끼는 자의 자유로운 대화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