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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Apr 15. 2025

술 한잔에 20억

이야기로 엮는 리더십



J기업의 이회장은 애주가였다. 술도 좋아했지만 그 분위기를 무척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돈 많은 집안에서 자라온 그는 씀씀이가 컸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회장의성격이 모나거나 행실이 나쁘지도않아 친구들과두루잘 어울렸다.친구들은 항상 그를 추켜세우며 엄지척을 해주었다.그는 폭탄주 제조에도 일가견이 있어대학시절부터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폭탄주 제조는 늘 그의 차지였다. 테이블 위에 인원수대로늘어선맥주잔에 양주를 채운 작은 잔을 넣고, 맥주병을 마구 흔든 다음주둥이를 삼분의 일 정도만 열어 치지직 뿌리거품 가득 그럴싸한 폭탄주가 완성되었다. 그렇게만든 폭탄주는부드럽고맛도 좋아친구들은 회장 최고를 외치며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밥값 술값은 회장이 부담하였고, 친구들은 택시비까지 얻어서 돌아가곤 하였다.


대학교와 경영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는 가업을 물려받아 J기업의 사장자리에 올랐다. 회사가 워낙 탄탄하여 현상유지만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으나, 나이도 젊고 기운이 왕성한 그는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먼저조직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사사건건 잔소리만 늘어놓는 원로들을 하나둘 정리하고,그 자리에 자기와 마음이 맞는 젊은 사람들을 앉혔다. 그가 사람을 볼 때 중요시 하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술이었다. '사내가 술을 마실 줄 알아야지 술도 못 마시는 게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였다. 그래서그는 술을 마시지 못하면 능력도 없을 거라고 단정하였고 절대로 임원으로 승진시키지않았다. 당연히그의 기준을 통과한 임원들과는술자리를자주 가졌고, 그때마다 이회장은 폭탄주를 돌리며 흥을 돋웠다.


회장이 술만큼 좋아하는 게 또 있었는데, 바로 골프였다. 실력은 싱글까지는 안되고 80대 반 정도 쳤다. 물론골프 코치에게 정식으로 지도를 받아가며 실력을 쌓았으면 진작에 싱글을 쳤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골프 스코어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 치는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운딩 후 동반자들과함께하는술자리. 거기서 폭탄주를 돌리며 술을 마시는 게 그에게는 삶의 큰 활력소였다. 골프 라운딩 후 이어지는 술자리에서의 폭탄주 제조는 좀 달랐다.


인원수+1 만큼맥주잔을 일렬로 세운다.첫 번째 잔을 제외한 나머지 잔에맥주를 반쯤 채운다.양주잔에 양주를 채워 두 개의맥주잔위에연이어 걸쳐 놓는다.안주머니에서 숟가락 크기의 주문 제작한모형 퍼터를 꺼낸다. 맨 앞의 양주잔 앞에서 자세를 취한 다음 톡 친다. 양주잔앞의 양주잔을 치면서 맥주잔에 빠진다.앞의 양주잔역시 그 앞의 양주잔을 치면서 맥주잔에 빠진다. 그렇게차례로양주잔이 맥주잔에퐁당퐁당빠지면서 폭탄주가 완성된다. 일동 모두 박수를 치며 '나이스 퍼트!'를 외친다.


회장은 사업에도 골프와 술을 적극 활용하였다. 친화력이좋은 그는 거래처 사장이나 주요 임원들과도 두세 번 정도만 만나면 이내 형 동생하며 어울렸다. 첫 잔은 무조건 자신의 폭탄주로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는 억지로 술을 권하지않았다.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그렇지 않으면 알아서 피하면 되었다. 술자리에서도 오버하지 않고 딱 적당한 정도의 룰을 지키는 그를 사람들이 다 좋아하였다. 덕분에 사업이 잘 풀려나갔다.세월이흘러 부친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그가 회장으로취임하고부터는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기존의사업영역에서는 확장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신규사업을 추진키로 하고 자신이 신임하는 신상무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것은 바이오에너지 사업이었는데, 유럽의 유수 회사로부터 원천기술을 도입하여 설비를 제작하여 국내와 미국 시장에 판매하는것이었다.


바이오에너지 사업의 성공에 크게 공헌한 직원이 있었다. 신사업팀의 최부장이었는데, 그가 미국 유학시절 알게 된 인맥을 통하여 백만 불에 이르는 오더를 따낸 것이었다. 그것은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꼭 필요한 오더였을 뿐만 아니라 그 오더가 교두보가 되어 미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총력을 다하여 설비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제작된 설비는 미국 현지에무사히설치되었다. 그리고 육 개월 후 설비성능에 만족한 미국 회사로부터 천만 불 규모의 추가 오더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들은 이회장은 크게 기뻐하며신사업팀을 비롯하여 프로젝트에 관여한 임직원 모두를 모아 축하연 자리를 마련하였다.


축하연은 고풍스러운 한옥의 멋이 도는 한우식당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한 가운데 당연한수순으로폭탄주가 제조되었다.참석 인원이 육십여 명에 이르다 보니 이회장이 폭탄주를 다 만들 수는 없었고,임원들이 앉은 메인테이블은 이회장이그리고 다른 테이블에는 임원이 한 명씩 가서 폭탄주를 제조하였다. 임원들 역시 이회장의 폭탄주 맛을 워낙 많이 봐왔던 터라 테이블마다 거의 비슷하게 폭탄주가 완성되었다. 모두들 앞에 놓인 잔을 하나씩 들었다.


"이번 신사업 프로젝트가 멋지게 성공한 데 대하여 임직원 여러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 기세를 쭉 이어나가 신사업이 회사 성장의 한축을 담당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신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며 건배합시다. 건배!"

"건배!"


회장의 인사말과건배가이어졌고, 모두들 폭탄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한우 한 점씩을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야들야들한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하였다. 맛있는 한우 고기와 더불어주거니 받거니 술잔이오가분위기무르익었다.


직원들이 맛있는 고기로 배를 채우고 술을 곁들이며 회식을 즐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회장은 문득 신사업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최부장을 치하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메인테이블 인원수에 +1을 하여 폭탄주를 제조하였다. 그리고 최부장을 불렀다.


"자, 최부장! 이리 오게. 이번 신사업에 큰 공을 세운 우리 최부장과 한잔하고 싶구먼. 와서 이 잔을 받게."


회장이 폭탄주 잔을 들고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최부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실내가 조용해지고 사람들 시선이 모두 최부장에게로 쏠렸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며 잠시 머뭇거리던 최부장이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빈 잔이 들려 있었다.


"회장님, 이 잔에 사이다를 주십시오. 전 술을 안 마십니다."


자신 앞에 내밀어진 이회장의 폭탄주를 외면한 대신가져온 잔을 내밀며 최부장이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술을 안 마신다니? 술을 지고 가지는 못해도 뱃속에 넣고는 간다는 사람이 바로 자네 아닌가?"


회장이 폭탄주를 든 손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건넨 폭탄주를 거절당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였다. 게다가자신이 알고 있는 최부장은 술을 잘 마시는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폭탄주를 거절하다니, 그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말고 딱 한잔만 하세. 더는 안 권하겠네."

"회장님, 사이다를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최부장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이회장은 난감하였다. 자존심에 손에 든 폭탄주를 거둘 수도 없고, 그의 빈 잔에 사이다를 따라 줄 수도 없었다. 곁눈으로 주위를 슬쩍 훑으니 임직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허어, 난감했다. 회장 체면에 화를 낼 수도 없고, 좋았던 축하연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이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최부장! 자네가 이 술을 마시면 내가 전 직원에게보너스100%를 쏘겠네."

"와!"


이게 웬 떡인가? 술 한잔에 보너스 100%라니?전 직원에게 보너스 100%는 20억 원에 이르는 큰돈이었다.직원들모두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모두들최부장의 손을 주시하였다. 어서 손을 내밀어 이회장이 들고 있는 폭탄주를 받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손은 꼼짝 하지 않았고, 이회장의 손에 들린 폭탄주만 허공에 멈춰 있었다.


순간 최부장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술을 받자니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일이고, 거절하자니 동료 직원들의 바람을 외면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니 그얼마나 큰 일인가 말이다. 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최부장은 술꾼이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엔지니어로서 중량물의 설비를 다루며 현장 작업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일을 마치고 나서마시는 술 한잔이 쌓인 스트레스를 날리는 해소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술이라는 게 한잔이 두잔이 되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한병이 두병이 되었다. 어제는 현장 작업자들과, 오늘은 사무실 직원들과, 다음날은 친구들과 그리고 그다음 날은 거래처 사람들과... 일주일에 거의 오륙일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을 좋아하는 최부장이었지만 계속되는 음주에는 버텨낼 장사가 없다고, 그에게도 이상이 왔다. 때로는 필름이 끊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현관 앞에서 잠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어김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던 그는 그만 크게 취하고 말았다. 그날따라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그게 심적으로 부정적인 작용을 해서인지 평소 마시던 양을 오버하였다. 바래다주겠다는 친구를 만류하고 헤어져 택시에 올라 집 근처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필름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밝은 기운에 정신이 든 그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고, 강한 햇살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손으로 해를 가리며 주위를 살폈다. 너른 마당, 붉은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 계단, 활짝 열려 있는 현관, 하얀 벽, 빨간 지붕, 회색 첨탑 그리고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십자가가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랬다. 그곳은 바로 교회였다. 최부장은 술에 취해 교회 출입문에 기대어 쓰러 진 채 잠이들었던 것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마당 한구석에 있는 수돗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맑은 물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두 손을 오목하게 받쳐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한번 두번 세번. 그러고 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를 흔들어 털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쓱쓱 빗어 넘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이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때까지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아니 교회에도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예배당 정면에 걸린 십자가에서 은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의 눈을 시리게 하였다. 그 기운이 그의 얼굴 가슴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기운은 이내 뜨거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몸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움, 열기, 뭉클함, 격정, 환희, 황홀함 같은 이상하면서도 신비로운 감정을 느꼈다.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뺨을 타고 눈물이주루룩흘러내렸다. 그는 예배당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거둬주소서!'그의어깨가 들썩였다. 그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 퍼지며그를감싸 주었다. 그날이후로 최부장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술을 끊었다. 그날 그는예수님 앞에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서약하였다.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고 최부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서 회장님이 건네는 폭탄주를 받아 단숨에 삼키고, 회장님 체면도 살리고, 덕분에 보너스도 받고.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상황이 종료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최부장은 요지부동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최부장의직속 상사인 신상무는 진땀이 흘렀다. 회장님 표정을 보아하니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싶었다. 자칫하면 신사업 성공 축하연 자리가 신사업팀 해체 자리가 될지도 몰랐다. 그가 최부장 옆으로 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최부장, 어서 회장님 잔을 받게. 회장님 팔 떨어지겠네."


최부장 눈썹이 꿈틀 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 조직을 지킬 것인가? 투 비 오아 낫 투 비. 자신이 비운의 주인공 햄릿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내 결심한 듯 최부장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술잔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술을 끊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폭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사람들 모두 '아!' 하고 탄식하였다. 신상무는 아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하였다. 그리고 회장님 눈치를 살폈다. 이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씰룩거렸다. 이미 거품이 반쯤 가라앉은 폭탄주가 출렁일 정도로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단히 화가 났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한 기업의 회장은 역시 회장이었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상무, 최부장에게 사이다를 따라주게. 그리고 이 술은 자네가 받게."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었으나 축하연 분위기는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사람들 모두 숨죽이고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축하연 자리가 끝났고, 20억 원의 보너스는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다음날 아침 일찍 신상무는 이회장에게 불려 가 최부장의 금주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심하게꾸지람을 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 동료 한명이 최부장에게 물었다.


"자네 그때 회장님 술잔을 왜 받지 않았나? 자네한테 폭탄주 한잔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잔에 20억이나 달렸는데..."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최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깟 20억에 내가 예수님 앞에서 맹세한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었네. 암 그렇고 말고."


최부장은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착실하게 교회에 나가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끝내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J기업에서 이회장의 폭탄주를 거절한 유일무이한 인물로 사사(社史)에 길이 남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살면서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 이 이야기는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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