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온라인 카지노 게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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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삶, 빼앗긴 죽음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래서 사람은 다가오는 죽음을 의식하며 짧은 인생속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산다. 영화 <미키17속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삶은 이 공식에서 어긋나 있다. 미키는 개척행성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소모품인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군에 속해 임무를 수행하며 사망해도 다시 반복해서 태어난다.
잔인한 사채업자에게 죽임을 당하기 싫어 지구에서 도망친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사실 죽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끔찍하게'죽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계약의 순간 그의 선택은 끔찍하게 '죽지 않으려'한 것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끔찍하게 죽는 방식으로'서의 영생을 살게 된다. 그의 선택은 블랙홀로 끌려 들어가 뒤틀려 버렸다. 죽음과 탄생의 반복 속에서 그의 생은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삶을 과연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온라인 카지노 게임 선택이 영화에서는 그의 어리석음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이 단서가 될 수 있다. 그에게는 혈육이나 친족, 고향이 없다. 친밀한 애정과 따뜻한 기억으로 연결된 사람들이나 장소가 없는 사람이다. 운명공동체랄 것도, 사회와의 끈도 없는 그에게 지금보다 더 가혹한 삶이란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인한 계약서는 뒷면에 치명적인 조항들을 깨알처럼 숨기고 그의 몸을 그로부터 빼앗는 일종의 노예계약이다. 우주선의 과학자들은 미키의 몸을 함부로 다루고 죽을 것이 뻔한 임무에 그를 투입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닌 노예를 다루는 방식이다. 노예에게는 온전한 이름이 없다. 이름은 혈통과 출신을 표시하는 성(family name)이 있어야 하는데 미키는 성이 있을 자리를 번호가 대신한다. 이것은 그가 노예임을 상징하는 표지이다.
노예는 사회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실상 노예인 까닭에 그가 죽을 때 누구도 슬퍼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례도 없이 다만 불구덩이 속으로 치워질 뿐이다. 보육원에 맡겨진 미키가 태어났을 때 축복의 의례가 없었을 것이니 상징적으로 그는 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고 죽음조차 어떤 추모와 눈물도 없으니 진정한 의미의 죽음 또한 없는 셈이다. 설사 그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다 해도 백업 받아 놓은 그의 기억과 생체정보에 의해 동의없이 재생될 것이다. 그는 죽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너에게 죽음을 돌려줄게
나샤는 반복되는 죽음과 재생으로도 변하지 않는 미키의 선한 본성을 인정하고 그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려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샤는 노예처럼 함부로 다뤄져 죽음을 맞고 부주의하게 재탄생되어 비틀거리는 모든 미키를 환대해준다. 새로 태어나 쭈뼛거리는 그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준다. 미키는 나샤옆에서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자리와 장소를 갖게 된다. 나샤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며 공동체에 그가 노예가 아닌 그들과 같은 사람임을 각인시킨다. 노예처럼 바깥에 존재하던 미키는 나샤가 뻗은 손길에 끌어당겨져 조건부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성원이 된다. 그녀는 미키의 탄생을 기뻐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미키를 끌어안으며 그의 죽음을 배웅한다. 종국엔 익스펜더블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단 한번의 죽음을 미키에게 선물한다. 미키는 나샤 덕분에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죽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성(family name)또한 되찾을 수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온전하게 살아가기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랑을 친밀한 관계에서의 '상호 인정'이라 정의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속에서 서로의 욕구와 감정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려 하고, 수용을 경험한 사람은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능동성이 더해진다. 사랑은 내가 인정한 상대방의 가치에 동의하고 나로 하여금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
미키와 나샤는 사랑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온전하게 인정해주는 친밀한 경험을 한다. 서로의 욕구를 인정하고 감정을 수용해준다. 더 나아가 공포와 두려움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공동체를 구하는 행동을 한다. 그들의 사랑은 상호구원과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2단 구원에 성공한다.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사람의 자리를 미키는 혹독한 자격시험을 치르고 얻게 된다.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죽는건 도대체 어떤 기분이냐고 빙글거리며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말문이 턱 막혀 제대로 대꾸조차 못했던 미키가 더 야무진 사람이 되어 남은 생을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나샤가 내어주고 그가 확장한 자리에서 서로를 조촐하게 인정하는 사랑을 품고 온전하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