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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y 05. 2025

전화번호 없이 산 2년

해외 생활

한번이라도 더 떠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지난 두학기 동안 최소76끼를라면으로떼웠고,아직도 내방에는헤어드라이기와베개가없다.이불은침낭뿐.나름따뜻하다.물론, 헤어드라이기는 원래 자연 건조를 선호해 구매하지 않았고, 베개는 베고 자면 목이 아파 쓰지 않는다. 여하튼 이러한 종류의 절약은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이라 티를 내지 않는 다음에야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사실 굳이 구태여 알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사회적 영역에 걸쳐, 가끔 나와 모두를 불편케 하는 절약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지난 2년 간 전화번호 없이 살았다는 점이다. 있다 한들 누군가가 전화번호를 물어봐 유의미한 관계로 발전할 일 따위는 적거나 없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뭐가 달라졌겠냐마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광고하는 민트 모바일이 저렴함을 표방함에도 다달이 25달러* 정도 든다고 가정할 때, 내가 지난 1년 간 미국에서 전화번호 없이 살며 아낀 금액은 25달러 * 12개월해서 360 달러. 작년 가을의 칸쿤 여행 경비가 320불 정도 들었으니, 딱 주말 여행 한 번인 셈이다. 유럽에서는 이심을 썼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정말 전화번호만 없었고, 일 500메가바이트의 데이터로 어떻게 살아갔다.


일적으로도 전화번호는 불필요했다. 지난 여름에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갈 기회가 없으리라 확신해 가장 친한 친구들과 사촌동생을 대동해 무려 유럽에 올림픽을 보러 갔다. 당연히 인턴십을 구하지 않았으니 전화번호가 필요치 않았고, 마찬가지로 이번 여름에 여름학기를 듣는 것 역시 오래 전부터 확정된 사항이라 구직은 자연스레 선택지에서 배제됐다. 지난 가을 연구실을 구하는 건 이메일로도 충분했다. 공적인 연락은 이메일, 팀즈, 간혹 가다 슬랙으로 처리했고, 사적인 연락은 주로 인스타그램과 카톡, 간혹 가다 왓츠앱으로 해결했으니 실제로도 전화번호가 필요할 일이 딱히 없었다.


사실 요즘 세상에 전화번호가 왜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한다. 팀즈에 전화 기능이 없는 것도, 이메일에 알림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영상통화 기능이 없는 것도, 카톡에 메시지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굳이 전화번호를 부득불 원할 이유가 있을까. 업무 시간 외 시도때도 없이 전화해 괴롭히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발현이 아닌 다음에야. 아니면 전화번호는 어떠한 비뚤어진 소유욕의 표상이라도 되는가. 둘 다 그럴 리가 없다.


전화번호를 가졌을 때의 이득이 없을 때의 이득을 넘지 않는 다음에야 사실 전화번호를 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1)이라는 숫자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 와이파이는 휴대폰에서는 5분이 멀다하고 끊기지만 노트북에서는 잘만 돌아갔다. 그럼에도 사회에는 관례라는 게 존재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청구지 주소가 명목상으로는 카드 도난 방지와 세금 처리에 쓰이는 것처럼, 나 역시 구직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전화번호가 필요해 결국 여름학기를 앞두고 전화번호를 하나 새로 팠다. 이번 여름 학교에서 라이프가드로 일하고, 다가올 가을 강의 조교로 일해 겨울의 여행비를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단점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택배를 주문할 때, 무언가를 인증할 때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잦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편하다는 것. 이심을 미리 활성화하지 않았다가 여행 가는 길 지하철이 고장 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공항으로 갔던 일도 있고, 수강신청이 꼬인 적도 있지만, 1년 365일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보면 전화번호 없어 일어났던 예외적 사건들의 충격은 크지 않았다. 더불어, 예외적인 사건들은 주로 훌륭한 글감으로 거듭나니 사양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나는 원체 호불호가 명확하고,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인간인지라 굳이 따지자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부재로 인한 단점보다 독립성 보장으로 인한 장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전화번호의 부재로 인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영역은 아무래도 인간관계였다. 작게는 조별과제를 하는 일부터 크게는 여행지에서 만난 누구와 연을 이어가는 일까지. 학생임을 고려하면 선후가 뒤집힌 것도 같지만, 확실히 전화번호가 없으니, 인간관계를 확장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할 필요가 없어 편하고 좋았다. 이미 좋은 사람들과 연락하고 지내기도 바쁜데, 바쁜 일상의 틈에 부담스러운,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을 욱여넣을 필요 따위는 없었고, 실제로도 전화번호가 없었으니, "전화번호가 없어서 다른 소셜미디어 연락처 알려줄게."라고 받아치는데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현재 세대의 주류 문화인 틱톡 혹은 스냅 챗은 늙었는지 어렵고 어울리고 싶지도 않아, 당장의 확인을 요하거나 유행을 요하지 않는 플랫폼들만 사용할 수 있었고, 그러한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어 편리했다. 미국에 자리 잡는 중인 고교 동창들은 예외긴 한데, 대부분 기인이 기행을 벌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듯 하다. 그들의 머릿속에 박힌 나의 이미지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본인 삶들이 한창 바쁘고 바빠야 할 때라 별 신경도 안 쓰지 않을까. 여행지에서 미국에 사는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두 번이고, 둘 다 부담스러웠기에, 전화번호는 그 경우에도 합리적인 변명으로 활용되었다. 더불어, 바쁠 때는 모든 알림을 끄고 살다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적어도 전화라는 직접적인 수단을 통해나의 고요와 분주함을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2년 동안 전화번호 없이 산 소회를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저 "별 거 없어."라 답하겠다. 학교 와이파이는 5분이 멀다하고 끊어져 내 학비가 도대체 누구 주머니로 새고 있는 건지 매일 의심하게 했으나, 그 외의 영역에서는 정말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전화번호를 요청받는 게 아닌 다음에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부재는 내게의지의 발현에 가까웠다. 가는 길, 학교 와이파이가 끊길 때면, 내가 데이터 없이 살기를 '선택'했고 이유는 '여행'이었음을 되새기는.


12월까지 여행하지 않는다. 제대 이후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을 쉰다. 연구와 가능하면 구직에 집중하고, 겨울방학에서야 중남미로 떠날 예정이다. 전화번호는 삶의 변화와 함께 찾아와 내가 새로운 장에 접어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어쩌면 전화번호라는 것은 내게'부재'의 단계에서 '존재'의 단계로 넘어와, 다시 한번 전환점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역할이 무엇보다도 크지 않을까.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징글징글할 정도로 매일 연락하는 친구들이 아닌 다음에야 아직 새로 판 전화번호를 공유하지 않았는데, 3개월 약정이 끝난 후에도 지금의 전화번호를 유지할지 불확실해 그렇다는 게 내 변명이다. 그 안에 전화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면 고맙겠다. 2년 동안 없었으니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연락을 늘려가고 싶다면야 기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프로모션 기간이라 첫 3개월 45달러(세금 붙으면 51달러). 미국에선 유튜브를 틀면 정말 지겨울 정도로 민트 모바일 광고가 나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내가 요금제에 가입했음을 인정하고 그만 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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