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 에세이
나의 어른, 카지노 쿠폰, 마음을 울리게 한 내 카지노 쿠폰
“우리 사회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에서 작가님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세대이다보니 젊은이들이 어른처럼 살고 싶지 않고 배우려하지 않으며 어른을 꿈꾸지도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른은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강원국 작가님께서 대통령 연설비서관으로 일할 때, 그때 당시 대통령께서 “딱히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썩 마음에 들지도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작가님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까지는 역량 밖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한때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소수가 누리는 것을 다수가 누리게 되는 게 역사의 진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렸는데, 당시 강원국 작가님에게 “청와대에서 8년간 일했으니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세요. 그게 당신의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셨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소수의 권익으로 보장받지 못한다면 다수의 집단지성으로 소수의 권리를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어른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교과서에나 있는 것같이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이야기 하지만 우리의 삶으로 들어왔을 때 당장 내 가족과 내 이웃의 일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 편하게 삶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난 오랫동안 특수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내 삶의 대부분을 장애를 가지고 있는 특수교육대상학생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왔다. 정말 마음 아픈 사연들이 많고 많지만 그 아이들과 가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정형편이 힘들고 어려워도 가족들이 있어서 서로 돌보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도 너무 많이 보았고 그들은 행복했기 때문이다. 지치고 힘들었던 과거를 끌어않고 살아가기 보다는 지금의 삶이 소중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많이 힘들 때는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믿음을 잃지않고 희망을 가지며 살아갈 힘을 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곁을 떠나는 슬픔만큼 힘든 일이 없다. 그런 아픔은 오래 간다. 한동안 잘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르며 마음을 훔쳐간다. 마치 날 잊지말고 기억해 달라는 듯이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해 준다,
나의 카지노 쿠폰는 평생을 청각장애을 가지고 사셨다. 원인도 알 수 없이 그렇게 평생을 불편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보며 너무 불행하다 여길 수 있지만 나는 한번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누군가 지나친 관심을 보일까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일상이 조금 불편한 뿐이지 특별히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너무 많은 차별이 존재했다. 똑같은 사람인데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사람을 속이고 무시하고 괴롭히는 인간들이 너무 많더라. 우리나라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가부장적 시대에 7남매의 장남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병들어 계신 노모의 병수발을 들고 5명이나되는 시누이의 학대를 받으며 우리 다섯명의 자녀를 말없이 키우셨던 일생사는 카지노 쿠폰에게도 그것을 보고 자랐던 나에게도 말못할 큰 아픔이었다.
카지노 쿠폰의 일생에 가장 큰 역할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시카지노 쿠폰의 병수발이었을까? 아니면 평생 옆에서 동고동락해 줄 남편이란 사람이 밤낮없이 나가서 술마시고 밖으로 돌아다니던 한량인 남편에 대한 억울함 이었을까? 간간히 벌어다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며 몇마지기 안되는 논밭을 일구며 소소하게 채소도 팔고 과일도 팔면서 온 가족 굶지않도록 따뜻한 밥을 지어주는 것이 삶의 전부였을까?
내가 보아온 50년간의 삶 뿐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40년 넘는 삶은 어떠하셨을까?
귀가 들리지 않으면 가장 불편한 것은 소통이다. 모든 관계가 소통하면서 이루어지는데 장애가 있다면 시작부터 순탄하지는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을 하려다 멈추고 이유를 설명도 하지 말고 말리기부터 한다. 무엇이라도 해 볼려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된다고만 한다. 사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누군가 물어보면 알아듣고 말을 해야 하는데 눈치만으로 말을 알아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 안통하면 손님을 뺏기게 되고 일을 하려면 답답해 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되면 계속 문제가 생긴다.
언젠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도 안되었을 때 서울의 한 변두리에서 방 2개가 붙어있는 작은 옛날집에서 살았는데 그냥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카지노 쿠폰는 아버지가 떼어다주는 과일을 길거리 리어카에서 팔았다. 농사를 짓던 분이어서 맛있는 과일을 잘 알기 때문에 제법 과일 장사는 잘 됐다. 다행히 사거리 약국 주인은 약국 앞에서 과일장사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셨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장사하시는 카지노 쿠폰에게 가서 과일도 먹고 장사도 거들었다. 큼직큼직한 과일들이 리어커에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님 심부름으로 가게에 갔다 온 나는 리어커가 뒤집어지고 바닥에 수박이 다 깨지고 과일들이 바닦에 뒹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카지노 쿠폰는 땅을 치며 울고 계셨고 주변 사람들은 웅성웅성 모여들며 쳐다보기만 하였다. 나는 카지노 쿠폰에게 달려가 같이 엉엉 울었다. 누가 어떻게 그랬는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때 아무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기억한다. 카지노 쿠폰는 내게 집으로 가라고 성화셨지만 나는 무서움과 슬픔이 범벅이 되어 과일을 하나씩 리어커에 옮겼다. 그리고 달려온 가족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며 내내 울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작은 언니와 그 얘기를 한다. 그때 누가 그랬는지는 언니도 어려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아마 사거리 모퉁이에 있다보니까 자동차가 우회전하면서 리어커를 치고는 뺑소니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땐 경찰에 신고해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상심은 말도 못했을테지만 카지노 쿠폰는 마음을 다부잡고 다음날도 계속 과일 장사를 하셨다. 언제까지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갔을때는 카지노 쿠폰가 공장에 다니셨기 때문에 그 중간에 정리를 하셨을 것 같다.
카지노 쿠폰가 길거리에서 과일장사를 해도 그 이후에는 미싱으로 지퍼나 인형들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실 때도 나는 카지노 쿠폰를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카지노 쿠폰는 내가 학교가 마치면 꼭 들려서 집 열쇠를 받아가게 하셨다. 도둑이 많던 시절이니 열쇠를 함부로 어디에 두고다니지는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도둑 들 일도 없지만 어린 나에게 항상 공장에 들려 열쇠를 받아가게 하셨다. 그런데 공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예뻐해 주셨다. 카지노 쿠폰는 인사를 잘하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카지노 쿠폰는 그때마다 백원짜리 동전을 주시곤 해서 난 매일같이 열쇠를 받으며 용돈도 받아서 돼지저금통에 꼬박꼬박 저금도 잘 했다. 아버지는 통운회사에 다니셨다가 손가락을 다치셔서 일을 못하게 되어 일용직 생활을 하셨다. 도시로 이사와서는 늘 지치고 힘들어 하셨기 때문에 저녁에 내가 허리를 밟아드리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럴때마다 너무 시원하다 하시며 아버지도 꼬박꼬박 용돈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없는 살림에 용돈을 받으며 사랑가운데 자랐다.
아버지가 내가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효도도 하지 못한채 보내드려서 추억도 많이 없다. 뱃속에 이미 둘째를 임신하고 있어서 마지막 가시는 장지도 험난하여 오르지 못했다. 장례를 처음 치르는 것이라 서툴고 어떻게 떠나보내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할 때였다. 60세도 안되어 돌아가신 다는 것이 얼마나 일찍 작고하신 것인지도 잘 깨닫지 못했고, 암이라는 거이 수술을 잘 끝내고도 불현 듯 삶을 앗아가는 괴물인지도 몰랐다.
그 후로 혼자되신 카지노 쿠폰를 모시게 되었다. 결혼한지 3년차라 사실상 카지노 쿠폰와 떨어져 산 것은 신혼때 이후론 없었다. 늘 카지노 쿠폰를 보며 카지노 쿠폰의 그늘아래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카지노 쿠폰를 보내드릴때는 정말 충분히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감사했으며 속으로 많이 슬퍼하고 힘들게 떠나보내드렸다.
지난 장례식에서 혼자서 휠체어로 이동하시며 힘들게 찾아온 손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박사님이셨다. 박사님께서는 카지노 쿠폰를 보내며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가지라고 하시며 위로의 말씀을 많이 주셨다. 장례식 기간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인친척들과 지인들이 많이 방문해 주셔서 슬픔에 놓여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불쑥불쑥 하지 못한 대화들이 계속 머리에 머물고 이내 눈물이 흘러 슬픔의 감정을 온전히 누릴 수도 없었다. 슬픔의 자리는 마음 한구석에 터를 잡고 조금만 허전한 마음이 들면 불쑥불쑥 올라왔다.
카지노 쿠폰는 평생을 사시면서 내게 따뜻함을 보여주셨다. 늘 인자한 미소로 나를 예쁘게 바라보셨다. 살아생전에도 내 이야기면 다 들어주시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셔서 가끔 고집을 부리고 병원에 안가시는 걸 나는 설득도 잘했다. 아마 암으로 떠나보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병원을 신뢰하지 않으신다는 걸 이해한다. 카지노 쿠폰도 아버지가 떠나신 후 70세에 신장암이 발견되셨고 그때 이미 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암은 받지 않으시고 약으로 지내셨다. 카지노 쿠폰는 그래도 10센티가 넘는 암 덩어리를 신장에 가지고 사셔도 먹고 싶은 것 다 드시고 건강하셨다.
원래 정말 부지런하시고 억척스럽게 사신 분이라 한시도 가만히 계신 적이 없다. 밭도 부지런히 일궈서 모든 채소와 김치는 직접 만들어서 드셨고 고추장 된장 뿐아니 계절마다 김치를 담아 차곡차곡 쌓아두셨으며 집 살림도 화분도 잘 가꾸셨다. 옷이 헤어지거나 단추가 떨어져도 돋보기를 쓰며 일일이 수선하여 주셨고 우리 집 개구쟁이 아들과 이것저것 만들기 좋아하는 딸의 뒷바라지도 부지런히 해 주셨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자기들의 뒷배였다. 못먹게 했던 아이스크림을 항상 숨겨놓고 먹이셨고, 엄마가 뭘 못하게 하면 그냥 냅두라며 아이들 편이셨다. 온통 어질러진 집안은 꼼꼼히 정리되었고 항상 마루가 반질반질 깨끗했으며 퇴근 전에는 늘 맛있는 나물들과 된장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90세가 될 때까지도 여기저기 같이 여행도 다니시고, 식당 음식도 잘 드시고 아이들 좋아하는 피자 치킨도 같이 맛있게 드셨다.
그래도 세월에는 장사없다고 갑자기 혀부터 맛을 잃어가시더니 다리에 기운이 없어서 넘어지시고, 넘어지실 때마다 허리를 다쳐서 병원 신체를 지며 살아가셨다. 그래도 제삿날은 잊지 않으시고 꼬박꼬박 조상님께 자식들 다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다. 나중에 교회를 다니시게 되어서도 늘 기도도 정성스럽게 하셨다.
새집에 이사오니 카지노 쿠폰의 흔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슬픔의 기억이 없더니 얼마전 꿈에 나타나셨다. 카지노 쿠폰는 생전에 다른 카지노 쿠폰들에게 있는 패물이 하나도 없으셨다. 분명 부자집에서 태어나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중풍으로 누워계시는 노모와 작은 논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름만 양반인 집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패물보자기를 보여주시는 것 아닌가!! 여러 가지 패물을 구경하며 놀라는 나에게 따뜻한 미소로 건네주시면서 어떤 것이 이쁘냐고 물어보셨다. 루비에 진주목걸이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카지노 쿠폰의 낡고 투박한 금반지가 보였다. 맞다. 카지노 쿠폰는 손가락에 오로지 금반지 하나만 있었다. 오랜 세월 긇히고 낡아빠진 금반지였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카지노 쿠폰가 주신 패물들을 받으며 직접 끼워주신 금반지에 눈물을 쏟은채 눈을 떴다.
꿈을 깨고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이 감정을 잊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기억이 있지만 나는 카지노 쿠폰가 주신 금반지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건 함께 한 세울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90평생을 부지런하게 사셨던 그 모습을 잃지않고 꿋꿋하게 잘 살아낼 것이다. 세상의 험악한 소리를 듣지 않고 친절한 말소리조차 듣지 못해도 눈으로 세상을 보고 깨달아 냈던 것처럼 장애는 살면서 불편한 것이지 그런 신체 조건 때문에 마음까지 병들면 안되기 깨문이다.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고 조용하지만 착하다고 생활기록부에 쓰여진 이유가 늘 부지런하고 선한 마음 씀씀이가 좋은 카지노 쿠폰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서인 것 같다. 늘 나를 믿고 의지하고 자랑스러워 하셨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삶도 사는 날까지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강원국 작가님의 말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할 때는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아프다고 괴로울 때는 병원에서 만났던 더 아픈 사람들을 떠올리며 살아가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어렵게 살아갔던 부모님을 생각하며 내 일처럼 도와야 한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되는 것이다. 좀 더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어른, 김장하 선생님처첨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며 돈을 벌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는 데 보탬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인 것이다. 부모님이 안계셨다면 나는 이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터, 항상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들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다 잊혀진다. 오로지 지금의 내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