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 써 놓은 글을 작가의 서랍에서 꺼내봅니다.
작년 12월 중순에 김장을 하였다. 늘 김장은 친정엄마와 했는데 2023년 2월 말에 친정엄마가 하늘나라에가신 후부터 남편과 둘이 김장을 하고 있다. 친정엄마가 해 주시던 김장 김치 맛이 나진 않아도 사 먹는 김치보다는 입맛에 맞기에 매년 김장을 한다.
김장하는 날 다발무 석 단을 사 왔다. 마트 직원에게 무청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는데 안된다고 해서 그대로 배달시켰다. 남편보고 무청을 잘라서 김장 봉투에 넣어서 버려달라고 했는데 남편이 "이 귀한 걸 왜 버리냐."며 무 윗부분을 잘라서 바깥으로 설치되어 있는 앞베란다 화분대에 걸쳐서 널어놓았다. 겨울에 차가운 바람과 눈비를 맞으면 맛있는 시래기가 된다고 했다.
남편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시어머니께서 한겨울이면 무청을 말리셨다며 어릴 때 많이 해보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께서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결혼해서 따로 살았는데 내 생일날과 특별한 날에는 늘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주셨다.특히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시래기나물 등 여러 가지 나물을 가져다주셨다.정말 맛있었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오래 사셨으면 좋은데 회갑을 하고 몇 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그나마 회갑잔치를 크게 해 드려서 위안이 된다.
시래기를 삶는 것도 번거로워서 버리려고 했던 무청은 우리 집 베란다화분대에서 연말까지 바람에 흔들리며 제자리를 지켰다.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시래기가 잘 있는지 우리 집 베란다를 올려다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도시에서 이런 풍경을 보다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께서 시골 학교 선생님이어서시골에 사셨는데 내 장래를 걱정하셔서 강릉에 있는 외갓집으로 나를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교 가기 전까지 강릉 외가에서 살았다. 시내가 아닌경포 쪽변두리에서 살았기에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조카들과 사시는 이모와 외할머니는 집 옆 작은 텃밭에서 시금치 등 농사를 지어 채소를 내다 팔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봄부터여름까지는 누에를 쳐서 생활비를 마련하셨다. 뽕잎을 먹으며 꼬물꼬물 기어 다니던 누에가 고치 집을 지으면 누에치기는 끝났다.
늘 김장철이 되면 외할머니가 새끼줄로 무청을 엮어서 뒤란에 걸어 놓으셨다. 무청이 말라서 시래기가 되면 한겨울에 커다란 가마솥에 무청을 삶아서 시래깃국도 끓여주고 시래기무침도 해 주셨다. 시래기밥도 해 주셔서 양념간장에비벼 먹기도 했다. 시래기는 한겨울 우리 집 귀한 반찬이되었다.
요즘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시래기를 살 수 있다. 온라인 매장에서도 주문할 수 있고 삶은 시래기도, 물만 부으면 된장국이 되는 양념한 시래기도 살 수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인데 어렸을 때 먹었던 외할머니 손맛이 나지 않는다.
연말에 퇴근하는데 남편이 시래기가 잘 말랐다며 삶아야 한다고 베란다에서 춤추고 있던 시래기를 거둬왔다. 물에 담갔다가 큰 냄비에 삶았다. 신정을 쇠는 우리 집에 새해 첫날에 아들 며느리가 모였다.껍질이 질겨서 겉껍질을 벗기고 잘라서 들기름을 넣고 시래기나물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연하고 맛있었다.새해 첫날 상에 올려진 시래기나물을 먹으며 아버지덕분에 먹는다며 모두 즐거워했다.
세 번 정도 먹을 양이라 두 덩이는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시래기 된장국 한 번 끓여 먹고 마지막 한 덩이는 시래기 간고등어조림을 만들어 먹었다. 버릴뻔한 무청이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했고 어릴 적 추억도 불러주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인데 늘 귀찮다며 버리는 것이 많다.
외할머니도 이모도 지금은 곁에 안 계시지만, 가난한 살림에 나까지 돌보느라 힘드셨을 거다. 시래기를 보면 늘 외할머니와 이모가 생각난다. 두 분이 잘 돌봐주신 덕분에 잘 자라 손주까지 둔 행복한 할머니가 되었다. 매년 김장할 때마다 무청을 말려 시래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