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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Jan 18. 2025

'세뇌'카지노 게임 단어가 떠올랐다

평화적인 계엄이라는 표현을 듣고 나는 세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올린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뻔한 일상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늙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12시간의 근무가 끝나고 도착한 집에서는 씻고 나면 자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일어나 있는 시간에는 밥을 먹거나 하며 배고픔을 해소한다. 그리고 다시 출근.

그렇게 생각할 시간도 마음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피곤한 육체를 돌보면 다음날이 밝아 오고 또다시 출근을 한다.

15일 동안 12시간 근무 10일을 하는 중 낮근무 5일, 밤근무 5일을 하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 피곤함의 내색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토요일에 전해야 하는 나의 일상이야기도 시간을 넘기고 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꼭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나는 지키고 싶은 약속, 그러나 잘 못지키는 약속.

매일의 일상에 크나큰 사건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출근을 하면 새로운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글로 옮길 수는 없다. 직장 동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직업상의 비밀유지를 파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비밀을 유지하면서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까 곰곰 생각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 같아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런 중에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동료의 험담은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 그것마저 좀 어렵다. 대부분 혼자 근무하는 경우가 많고, 동료와 스치는 시간은 30분 내외가 된다. 그래서 남들은 잘도 하는 직장이나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길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나의 일상과 상관없이 대한민국은 난리가 난 것 같다.



대통령이 드디어 관저에서 벗어나 공수처로, 구치소로 향했단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나라는 인간도 계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안다. '평화적 계엄'은 도대체계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을 하면 그런 표현이 되는 걸까? 계엄에 대한 시(詩)를 적으려고 해도 그 표현은 앞뒤 맥락을 짚어야 할 것 같다.

요즘 윤씨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혹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듣지를 않는다'라고 했다. 그런 말들은 나에게 소위 '세뇌'카지노 게임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카지노 게임!' 이것처럼 무서운 말은 없다. 나는 한때 '내가 카지노 게임당했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때는 1989년 이집트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 카지노에 가보기로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카지노카지노 게임 곳을 가 본 적이 없던 내가 우겨서 갔다. 당시로서 나는 외국 여행이 처음이었고, 그런 곳도 처음인지라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다.

카지노 입구의 카페에서 팔레스타인 친구와 요르단인과 함께 이집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요르다니 친구 중 하나가 '저 사람들 한국인이야. 아는 척해봐.'라고 했다. 그곳에 가족처럼 보이는 4-5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아는 척을 하며 한국인이냐고 물었더니 중년의 신사가 약간의 경상도 억양으로 그렇다고 했다. 한국인은 혼자인 일행의 여행이라 반가워서 앉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살짝 경계하면서 "우리 북한 사람이에요. 합석하면 아가씨가 곤란할 거예요."카지노 게임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약간 당황했지만, "저는 괜찮아요." 했더니, "괜찮지 않을 거예요. 카지노 가려는 거 같은데 일행들이랑 들어가세요."라고 했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씨에 약간의 걱정 어린 눈빛으로 주시하지만 자리를 마련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인사해서 반가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내 마음은 복잡했고 의문이 남았으며, 몸이 떨렸다. 그 북한 가족은 나와 똑같이 생긴 한국사람이었다. 고향이 원래는 경상도라고 대답했던 중년의 신사는 깍듯했고 아이들도 반듯한 한국아이들이랑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란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던 북한사람의 이미지가 아니었었다. 그날, 나카지노장 안에서의 기억이라고는 10달러를 잃었고,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는 기억만 있다. 뭘해서 잃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북한사람의 이미지는 붉은 피부색에손등에는 털이 숭숭하게 자라있으며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인민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젊은이들도 약간 붉은 피부색에 털은 없으나 날카로운 눈매로 총을 들고 있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약간 붉은 도깨비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서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제3공화국 시절에 태어나 제4공화국을 거치며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제5공화국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녔던 세대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강력한 반공교육을 받았고, 방학숙제로는 어김없이 반공포스터나 표어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거의 괴물의 모습으로 카지노 게임당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담임교수의 추천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취업한 나는 1년의 계약을 종료하고 한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집트와 남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배경에는 당시 외국에 한 번 나간다는 것이 평범한 시민인 나의 배경으로는 힘든 경험이기에 바로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은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즉,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는 외국에 나왔는데 여행도 못하고 귀국은 한다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번 돈을 몽땅 털어서 여행계획을 했던 것이다. 그때 휴가를 맞은 팔레스타인 친구가 이집트에 친구가 있어서 방문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고, 잠자리가 해결된다는 생각에 여행의 시작점을 이집트로 잡은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여행에서 북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1980년대에는 외국취업을 나갈 때 일주일간의 반공교육을 포함한 애국교육을 한 달간 받았야 했다.당시 중동국가로의 취업을 하는 경우는 영어와 기본 아랍어 교육을 빙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국가에 대한 교육을 3개월간 받아야만 출국할 수 있었다(물론 반공교육 일주일도 포함된다). 당시 중동건설 붐으로 많은 한국의 아버지들이 이런 애국교육을 포함하여 짧게는 한 달, 길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필수로 받아야만 출국이 가능한 시대였고, 자유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여행을 가기 전에는 반드시 3일 이상의 반공교육을 받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 반공교육에서도 북한사람의 이미지는 강화될 뿐이었다. 북한사람과 인사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그때가 제5공화국의 시대였다.


당시, 이집션 친구의 말로는 카이로에 북한은 대사관이 있고 남한은 영사관이 있다고 했다. 이집트는 북한이랑 외교관계가 남한보다 더 돈독했다. 그래서 남한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을 먼저 물어봤다. 그런 질문이 무례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여권색깔이 뭐냐?'라고 돌려서 질문했다. 당시 남한의 여권색은 갈색이 주였고 초록색으로 바뀌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북한의 여권색은 회색이었다.

나의 팔레스타인 친구의 요르다니친구는 은행에 근무했었는데 그는 북한 대사관과도 관계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북한사람들을 몇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북한사람을 알아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년의 북한인을 '젠틀맨'이라고 표현했다. 나에게도 확실하게 신사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어딘지 여유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의 가족들. 내가 만난 첫 번째 북한인들이었다. 그 만남에서 나는 '세뇌'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고, 내가 한국이라는 사회가 원하는 세뇌당한 청년이라는 생각에 여행하는 며칠 동안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던 때였다. 그 사건으로 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북한사람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모든 외국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너무 많고 내가 모르는 문화와 내가 모르는 지식이 너무 많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각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상당히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여행이카지노 게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재취업을 했고 몇 년 동안 휴가를 이용하여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로 여행을 했다. 당시가 20세기말이었고 여행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남한인으로서 홍콩의 반환을 홍콩에서 지켜보고 싶었으나 세상일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귀국을 하면서 21세기를 맞았고 나의 여행은 20세기에 끝났다. 그래서 홍콩반환은 집에 앉아 텔레비전 중계로 보면서 밀리니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게 북한사람과의 짧은 만남은 '카지노 게임'의 무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요즘의 윤씨의 행동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극우'라는 표현이 한국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지 안다. '극좌'라는 표현도 얼마나 심각한지 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 한 번 '이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한 사람의 단호함은 "세뇌"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지금의 윤씨는 유튜브로 인해 세뇌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로도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만약 그가 한쪽으로 치우친 설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면 결국 그 사상으로 세뇌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자신의 신념에 맞는 행동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한쪽의 말만 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양쪽의 말을 잘 듣고 판단을 해야 하는 자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깊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자리가 대통령이라는 자리"라고, 정치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고 국회위원은 사기꾼이며 정치인은 돈 벌기 위해 정치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라 생각하는어리석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런 나도 대통령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론의 자유, 좋은 말이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관용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언론이 자유인만큼 남의 언론도 자유여야 한다. 세상에 가장 이기적인 표현이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다. 언론의 자유는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언론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뉴스가 보기 싫다.

카지노 게임하려고 덤벼드는 정치인들과 카지노 게임당한 듯한 언론. 꼴 보기 싫다. 그리고 그 백골단은 뭐냐.

할 말이 많다. 다음에 해야겠다.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듯하다. 반성하지 않은 집권당이 존재하니 이렇게 시끄러운가 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평화적인 계엄"이라는 것은 존재하면 안되는 표현이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인지... 쯧!


사진) 나니야의 다꾸 작품, 제목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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