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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Apr 26. 2025

봄과 가을, 그리고 카지노 게임

지난주, 시댁 윗대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시숙모님이 돌아가셨다.

시아버지의 형제 중 막내 동생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만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날이 지지난 금요일이었고, 토요일에 우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몇 년 전부터 아프셨던 분이라 결말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접한 소식은 멜랑꼴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약간 침체된 기분으로 방문한 장례식장은 어느덧 일상의 장소가 된 기분이었다. 몇 년 동안 많은 장례식장을 방문한 이력이 붙었나 보다.

반면, 장례식장이 처음이라는 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몇 년 전 친올케가 생을 마쳤을 때, 너무 어리다고 데려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딸의 인생에서 처음인 장례식장 방문이었다. 난 담담히 "큰소리로 웃지만 않으면 돼."라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있는 장소에서 마냥 슬픈 대화만 오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한 분의 영정에 애도를 표하는 자리이다.그러나일가친척들과 왕래가 없었던 어른들도 방문하는 자리이다 보니 그렇게 슬픈 분위기만을 가지고 있는 장소는 아니다. 지금은 장례식장이 우선적으로 선택되지만 예전의 장례문화는 마을의 잔치였다.


거의 20년 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골반뼈가 부러진 후 1년가량 자리를 보전하더니 돌아가셨다. 그때는 마을장으로 지냈다. 회관에 영정을 모시고, 할머니 딸들과 며느리들, 아들들과 친척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놀며 그렇게 지냈다. 며느리들과 딸들 그리고 손녀들은 상을 차리고, 치우고, 음식을 하고, 간간히 놀이하는 어른들이나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3일을 보냈다. 80이 넘으면 본인의 명을 다 사시고 더 살았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나이라는 의미의 '너믄살'이라고 한다고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었다. 그래서 본인은 충분히 사셨다고 했다. 젊어서 아들만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남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우리 엄마의 시댁 방문을 허락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그렇게 좋아하던 아들이던 남동생보다 '아플 때 신경 써주는 네가 낮다'라고 했다. 그 말이 할머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장례는 마을장이 되어 온 동네에 음식 냄새를 풍겼다. 그때 누군가가 '호상'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가족에게 '호상'이란 없다. 내 어머니, 내 할머니가 몇 년을 살아오셨던, 돌아가시면 없는 사람이 된다. 그 가족들에게는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지는데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애통해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만든 말이지 싶다.


20년 전에도 도시의 장례와 시골의 장례는 달랐다. 나의 시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도시의 장례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모시고, 손님들이 찾아오고,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도시의 장례식장 풍경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은 시골의 장례문화가 거의 없어졌다. 이제는 시골에도 병원 근처의 장례식장에서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있고, 그 절차에 따라 지내는 장례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일까, 친할머니의 장례에서 느꼈던 마을 안에 존재하던 죽음이 이제는 없다. 이제 죽음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이야기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직업상 죽음을 항상 옆에 두고 일하고 있지만, 내 딸과 아들에게 죽음은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닐 것이다.

20대 초반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죽음과 장례는 처음 접하는 사건일 것이다. 둘째와 막내는 태어나니 친조부모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죽음이라는 사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명절마다 만나던 사람이 돌아가시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생에 처음으로 '입관'이라는 자리에 함께했다. 물론 친자식이 아닌 우리 부부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평소 그분을 좋아했던 나는 그분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막연한 상상의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지난 명절에도 만났던 분의 주검을 눈으로 보며 인생이란 것에 대한 생각을 했으면 했다. 그래서 신실한 불자였던 분의 불교식 입관 절차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종교라는 것에 대한 생각도 함께하기를 바란 나의 생각이 전해졌으면 한다.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대학생들이고, 물론 나도 중간고사 감독을 해야 카지노 게임 입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나는 그날까지의 행사에만 참여하고 다음날 행해진 출상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출상카지노 게임 일요일이 옆지기의 생일이었다. 생의 60번째 생일에 좋아하던 숙모님의 출상을 해야 했던 옆지기의 마음이 남다르겠다는 것을나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음식솜씨가 없는 내가 있는 우리 집에서는 생일날이면 항상 외식을 하며 맛난 것을 먹었다. 그러나 올해 옆지기의 생일은 여러 가지 일로 혼자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현금병풍을 선물로 준비하여 장례식장 화장실 앞에서전달하였다. 큰아들은 이미 선물을 했었고, 둘째와 막내가 따로 준비 한 선물이었다. 그렇게라도 전달하는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지난 수요일, 시간을 내어 집에서 옆지기가 좋아하는 육고기를 구웠다. 비록 지난 생일이 되었지만 태어났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에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났으므로 하여 내 인생에도 영향을 준 사람이니까.

지난 두 주는 인생의 계절을 끝내신 분과 인생의 카지노 게임에 접어든 옆지기의 생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약간 가라앉는 기분을 가지고 생활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제 인생의 봄을 한창 만끽하는 20대가 되었다. 100세 시대를 살게 될 아이들에게 20대는 시작하는 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봄을 잘 만끽하여 천천히 다가오는 여름을 잘 보내며, 세상의 고달픔을 덜 느꼈으면 하는 것이 먼저 살아 본 내가 바라는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100년 중 이제 20년을 지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인생의 봄날에 대해 추억한다. 나도 서서히 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카지노 게임을 잘 지내고 싶다. 생의 카지노 게임에 접어든 나와 옆지기가 따뜻한 겨울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 욕심만은 아닐 것이라 기대해 본다.


태어난 생이라면 누구나 생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거나 힘들고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길이도 꼭 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시간은 길이도다르고 느끼는 무게도 다르다. 그리고 같이 보내는 사람도 각기 다르다.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이 딱 한 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에게 공평하다. 딱 한 번 주어지는 카지노 게임에서 어느 계절을 살아가던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생활이 되길 바란다.

나에게도 이런 생각들은 젊은 봄날에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의 카지노 게임에 접어들게 되니 생각이 많아지고,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카지노 게임이라는 계절에 들어서면 일 년을 돌아보며 생각이 많아지는 것처럼, 생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이 생을 계절에 비교했나 보다.

생의 계절을 살아가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행운이 있기를 빌어보는 것도 생의 카지노 게임에 접어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문득 옛말이 하나 생각난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 씹어본다.


대문사진) 아이들이 옆지기의 생일을 맞아 준비해 준 선물.

흐뭇하게 쳐다보기만 카지노 게임옆지기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내가 같은 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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