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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의 슬픔
한겨울답게 퇴근하고 돌아온 집안에는 냉기가 돌았어.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이 지긋이 먹은 보일러 버튼을 눌렀지. 자동차 시동 소리 같은 기계음이 들렸어. 낡은 보일러 소리는 곧 따뜻해질 거란 신호잖아. 종일 떨었던 나는 덜컹거리는 기계에 의지하며 일찌감치 이불속으로 들어갔어. 시끄럽긴 했지만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자장가였어.
문제는 아침이었어. 출근 전 보일러를 끄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조절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야. 내가 주는 압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어. 보일러는 고장 난 버튼에 의지해 계속 돌아갔어. 딱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더라. 출근 시간이 지나고 있었어. 다급해진 마음에 해결책 없는 상황이 더해지니에라 모르겠다 싶었어. 오늘은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보일러를 틀어 놓고 출근을 했지. 문을 닫는 내 뒤통수를 향해 보일러는 더 큰 소리를 내는 듯했어. 어젯밤과 똑같은 소리인데 짜증이 나는 걸 보면 분명자장가는 아니었어.
나는 집에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싫어. 아니, 무섭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야. 그래서 웬만한 건 고장 나도 그냥 안 쓰고 말거나 스스로 고쳐보려고 애를 쓰는 편인데 추운 날씨 앞에 보일러 고장은 그럴 만한 너그러운 문제가 아니었어. 퇴근 시간에 맞춰 보일러 A/S를 신청해 놓고 하루를 보냈어. 시간이 지나는 만큼 낭비되고 있는 에너지가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기사님이 약속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미리 연락이 오셨어. 남자분이셨고 무뚝뚝한 음성이었어. 괜히 싫어 무뚝뚝한 음성을 빌미로 시비라도 걸고 싶었어.
퇴근 후 원치 않는 손님을 맞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어. 일단 안전을 대비해서 주머니 속에 호신용 후추 스프레이를 넣었지. 그리고 기사님이 들어오시면 대문을 활짝 열어 놔야겠다고 다짐하며 보일러 조절판 주변을 정리했어. 내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발동하면 바로 매운맛을 보여줄 거란 마음가짐이었지. 시간이 되어 기사님이 들어오셨어. 나는 괜히 날 선 목소리로 보일러 조정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금 상태를 설명했어. 기사님은 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가방에서 새 조정판을 꺼냈고 벽에서 고장 난 것을 떼어내셨어.
내 손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조절판이 기사님의 손길 한 번에 후드득 떨어져 나가는 걸 봤어. 그리고 텅 빈 공간에 새 조정판을 덧씌우고 고정시켰어. 종일 신경 쓰였던 보일러가 제 작동을 하는 걸 보니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어. 작동법까지 배우고 나니 호주머니에 후추 스프레이가 있다는 사실이 미안해지기까지 하더라. 작업이 다 끝난 후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기사님이 머뭇거리시더니 물티슈 좀 달라고 하셨어. 그리고 입고 계신 조끼 위에 제법 많이 떨어진 액체를 하나씩 닦기 시작하셨지.
작업하면서 물기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언제 옷에 액체가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어. 의아했지만 나는 열심히 닦는 모습을 보며 기사님이 깨끗해지실 때까지 기다렸어. 그리고 언제 옷이 더러워졌는지를 여쭈었어.
"약속 시간이 어중간해서 시장에서 호떡 먹다가 꿀이 떨어졌어요."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의 민망함이 비쳤어. 나는 반대로 호떡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온몸에 긴장을 다 풀었지. 그리고 기사님의 조끼 구석에 숨어 있던 꿀 얼룩을 가리키며 거기도 닦으시라고 웃으며 말했어. 약속 시간이 어중간해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 듯해 미안한 마음에 냉장고에 있던 음료수 하나도 꺼내 드렸어. 기사님은 옷을 깨끗하게 닦았다는 쾌감과 호떡 꿀을 나에게 들켰다는 민망함을 안고 도망치듯 나가셨어. 나는 뒤통수에 대고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문을 잠갔어.그리고 동시에 편안하게 한숨을 쉬었어.
책상에 앉아 새 보일러 조절판을 봤어. 이제 추운 겨울이 와도 끄떡없겠다 싶어 든든했어. 그리고 멋쩍게 주머니에 든 후추 스프레이를 제자리에 두면서 냉장고에서 꺼낸 음료수가 그대로 선반 위에 있는 것을 보았어. 아저씨가 급하게 나가시느라 차마 챙기지 못하신 듯했어. 나만큼 기사님도 불편하셨을 거란 생각이 그제야 들더라. 혼자 사는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매일 남의 집을 방문하면서 나와 비슷한 눈빛을 장착한 사람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그분도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시간들이 쌓여 기사님의 표정과 말투가 무뚝뚝해진 거라 추측했어.
우리는 믿을 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이였어. 그리고 호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경계를 풀었어. 다음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푸근한 마음으로 낯선 이를 집에 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거야. 후추 스프레이는 또 주머니에 들어 있을 테고 문은 활짝 열려 있겠지. 앞으로도 믿을 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이 속에서 계속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그 밑에 미안함을 깔고 있다면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좀 더 편안한 세상이 올 때까지만 후추의 매운맛에 기대야겠어. 아무튼 기사님 덕분에 오늘 밤도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됐어.이불속에 있으니 보일러의 자장가 소리가 다시 들린다. 오늘도 고마운 마음 안고 잘 수 있는 날이니 됐어. 따뜻하게 자자.
대문사진 : 픽사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