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기표
이어령 교수님은 오래전 글에서 유명한 햄릿 대사 "To be, or not to be"를 곧이곧대로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하기보다는 죽음에 대해 솔직한 우리 문화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의역하는 것이 더 와닿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예로 드신 것처럼 좋아도 죽고, 사랑해도 죽고, 맛있어도 죽겠어라고 표현하는 민족은 우리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이 삶에 얼마나 가깝기에 그 기표가 일상 대화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지 한 편으로는 지독하게 고단한 삶을 보냈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안쓰럽습니다.
작년에 후배 기자 초청으로 [염쟁이 유 씨] 시드니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메가 히트한 작품이니 소재나 구성이 탄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들린 듯한 연기에 관객을 무대에 함께 참여시키는 연극이 주는 매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새삼 느꼈습니다. 이런 작품을 마주할 때면 무엇하나 새로움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나도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럼 작가보다는 카지노 쿠폰라는 기표가 더 맞을까?
글쎄요. 시장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세법에 능통하며 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고 계산이 칼 같은 사람은 아니다 보니 저에게는 카지노 쿠폰라는 이미지도 문신되지 못하고 겉돕니다. 10년을 유도랑 주짓수에 매진했다고 하지만 코치라고 하기에는 권위도 없으며 전문성도 떨어지니 이것도 아니고, 호주 시민이라고 하기엔 영어도 짧고 호주 문화도 너무 모르니 이것도 버립니다. 과연 내게 꼭 맞는 기표가 있기나 할까? 혹시 아빠?
제가 만들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기표뿐이 아닙니다. 저는 아이도 만들 수 없는 남자이기에 지금 우리 딸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것임으로 아빠라는 기표도 제가 쓰기에는 어색합니다. 아내가 고생해서 호주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원장님하고 노력한 결과이니까요.
자연 임신을 했던 인공 수정을 했던 어차피 아빠들은 모릅니다. 자신들이 잉태한 것이 아니기에 알턱이 있나요. 다만 당신 아이는 시험관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전문의 선생님 권위 있는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길에 내 힘으로는 부족해 다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새깁니다. 전문의가 언어로 내린 진단으로 나는 그 권위에 지배받습니다.
다른 아빠들이랑은 뭔가 다른 아빠로 분류됩니다.
하루 종일 안아 달라고 칭얼거리는 딸아이 덕에 나이 많은 엄마 아빠는 허리가 시리고 손목이 저려 오지만 기분 좋다고 절 보며 웃는 딸아이를 생각하면 그 고통이 한결 가십니다. 그리고 최근 비참한 사고나 전쟁으로 영유아 사망 소식을 기사로 접할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이 오고 더욱 딸아이가 눈에 아른 거립니다.
이 글을 보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제 딸도 생生을 경험했으니 사死도 겪어야 합니다. 물론 부모인 제가 먼저 그 길을 의연하게 가며 그 아이가 너무 무섭거나 힘들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드니 죽음에 대한 평소 생각도 달라집니다. 피하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할 무서운 대상이 아니고 어떻게던 먼저 내가 만나 내 딸아이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조금이라도 쓸만한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 말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나 보던 기마인물형 토기에 대한 기사가 새삼스럽게 올라왔습니다. 역사 과목을 싫어하던 저였기에 이런 사진 역시 전혀 감흥이 없는데 기사 제목을 마주하고는 바로 클릭을 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카지노 쿠폰를 위해 부모가 선물한 인형이라는 기사 한 줄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시험에만 중점을 두었기에 그 역사 안에 살던 실제 사람들 이야기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사료들이 만들어진 시기를 외우고 그 토기들이 가진 무늬가 어떤 형식으로 차이가 있는지 따위를 주로 암기해야 했지요. 만약 이런 엉터리 역사관이 아니고 사람이 사는 관점에서 공부했다면 저는 역사 과목을 이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겨우 암기 능력이나 확인하는 훈련 도구로서 역사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헤아리는 역사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 저는 길을 가다 마주하는 작은 그릇 조각 하나에도 이야기를 불어넣고 환상을 만드는 작가라는 기표가 어울리는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토기는 5세기 초 신라 혹은 가야 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니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이야기이지만 긴 역사 호흡으로 보자면 같은 시대에 거의 같은 순간에 죽은 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그 부모나 먼저 떠난 자식은 붙어 있는 찰나를 살았습니다.
수 천년 전 그날을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던 카지노 쿠폰가 먼저 작별을 고하고 부모 곁에 잠이 듭니다. 못난 부모라면 세상을 탓하거나 신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기 카지노 쿠폰가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생을 더 이어갈 수 있는 극락을 만들어 줍니다.그것은 환상이지만 부모는 그곳을 찾아갈 수 있는 기특한 하인을 하나 흙으로 빚고는 자기 카지노 쿠폰를 그 작은 흙인형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아무리 혼이 없는 흙덩어리라지만 애절한 부모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인형은 심장이 뛰고 눈이 밝아져 답을 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요. 그날부터 카지노 쿠폰는 그 하인을 따라 하염없이 먼 길을 떠나는 모습을 부모 가슴에 아로새기며, 떨어지는 엄마 눈물은 다시 그 무덤을 덮어 풀을 자라게 합니다. 환상이 실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수 백 대를 거쳐 이제 제 가슴까지 이어지며 카지노 쿠폰를 이끄는 작은 흙인형은 깨끗하고 조용한 박물관에서 자신들을 응시하는 모든 이들 마음속에서 앞으로도 수 천년은 족히 걸어갈 것입니다. 톡치면 깨질 듯 약해 보이는 도자기 인형이지만아기 주인까지 모시고긴 풍파를 모두 이겨내며 기특하게도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영화 [행복한 장의사]로 가봅니다. 시체만 보면 기절하고 장례일을 혐오하던 재현이는 (임창정 분)정신 연령이 비슷해 친구처럼 지내던동네 꼬마 연이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란 기표를 다시 해석하게 됩니다. 죽음이란 모두에게 다가오지만 모두 다른 모습이며 언젠가 우리는 반듯이 마주해야 하는 진리로 이 역시도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앞에서 지켜보던 관객인 저에게도 큰 감동이랑 함께 두려움만 묻어있던 죽음이라는 기표가 새롭게 해석됩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내일처럼 꿈속에서 만난다고 그랬다. 어떤 날은 꽃이 지천으로 핀 야산으로 떠난다고 했고, 또 어떤 날은 꽃인지 상여인지 그것이 사람인지 모를 긴 만당(滿堂)을 따라 높은 산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카지노 쿠폰 장의사, 2000
각본을 쓴 추창민 선생이야말로 새로운 기표를 탄생시키는 진정한 작가입니다.
고객들 세금 계산해 주는 카지노 쿠폰 일이나, 이렇게 글을 쓰고 겨우 나누는 삼류 작가 삶도 그렇고, 매번 다치고 실망하지만 늘 노력하는 유도 코치로서 일상 따위, 끝으로 어리숙한 초보 아빠 모습 모든 것이 날 설명하는 기표이며 내가 원던 원치 않던 여러 분들이 나를 떠올리면 나타나는 이미지로 쓰이겠구나 싶습니다.
이제 태어난 우리 카지노 쿠폰는 아마 영어가 편할 것이고 이런 글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된다면 어쩌면 저는 그 녀석 곁에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AI가 어떻게 도움을 주어 한글을 모르는 그 카지노 쿠폰에게 이 글을 전달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일찍 세상 떠난 다섯 살 아들에 길동무 붙여준 부모" - 임영열 기자,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0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