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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영 Apr 03. 2025

#카지노 게임야기

일리야 레핀의 카지노 게임

일리야 레핀(1844~1930)
러시아의 '국민 화가'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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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1581년


한 번 보면 미쳐버리는 그림이 있다고 당시 사람들은 말한다. 그림이 끔찍해서 황제가 전시를 금지한 작품이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작품에 내려진 검열 지침이었다.

카지노 게임 무엇을 의미하길래, 황제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던 걸까


광기에 사로잡혀 아들을 죽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16세기 러시아의 황제 이반 4세이다. 그의 영어 별명은 이반 더 테러블(Ivan the Terrible). 뒤쪽에 있는 ‘더 테러블’은 뇌제(雷帝·번개 같은 황제)로 번역되는데, ‘끔찍할 정도로 강하고 무섭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이반 4세는 이런 호칭에 딱 어울리는 황제였다. 그는 강력한 통치로 러시아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가 시스템을 개혁해 초강대국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능력 있는 황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의 면모도 갖고 있었다. 이반 4세가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은 귀족과 성직자, 고위 관료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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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바스네초프가 그린 '이반 4세의 초상


이반 4세가 처음부터 이렇게 미쳐 있었던 건 아니다. 그의 광기가 폭발한 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뒤부터였다. 이반 4세는 자신을 미워하는 귀족들이 아내를 독살했다고 생각했다.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는 아내의 복수라는 명목 아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정신을 잃고 폭주하던 어느 날. 이반 4세는 임신한 며느리를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마구 때려 유산시키고 만다.


아이를 잃은 황태자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막장 행각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반 4세를 찾아간 황태자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아버지, 정말로 미쳐버린 겁니까!” 하지만 광기에 휩싸인 이반 4세는 되레 벼락같이 화를 냈다. “그래, 네놈마저 반역을 꾸미는 거구나.” 그리고 이반 4세는 지팡이를 들어 황태자의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황태자. 그리고 갑자기, 이반 4세의 정신이 돌아온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달은 이반 4세는 공포와 절망에 휩싸였다.

“오, 내가 무슨 짓을….”

황급히 달려가 아들을 껴안고 머리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 이미 생명은 떠나가고 있었다. 그림에는 그 비극의 순간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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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권력자들이 보기에 이 그림은 위험한 그림이었다.‘전제 권력을 휘둘러 자신이 사랑해야 할 민중(아들)을 해치고 있는 황제’를 비판한 것으로 읽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보는 사람을 충격에 빠트리고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화가들의 집단 항의로 검열이 취소되고 작품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자, 그림을 보고 충격에 빠져 실신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달려들어 그림을 훼손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이 그림은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흥분한 관람객에 의해 두 번이나 찢기고 훼손됐다. 이 그림을 두고

“보면 미쳐버린다”는 소문이 돌았던 이유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오늘날 러시아의 ‘국민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일리야 레핀이다. 레핀은 어떤 사람이었고,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

<일리야 레핀의 자화상


레핀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에서 ‘흙수저’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신분이 낮았다. 농노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마음대로 이사를 다닐 수도 없고, 오랜 기간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데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공공 공사에 동원돼야 하고 무거운 세금까지 내야 하는 ‘군사 정착민’ 계층이었다. 레핀의 운명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는 전쟁에 동원돼 목숨을 잃거나,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만약 운이 좋다면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늙어 죽을거다. 태어난 위치에서 남들처럼 살다가 죽는 것 그게 당연한 시대였다.


하지만 레핀에게는 붓과 물감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그가 미술을 처음으로 접한 건 7살 무렵. 도시에서 일하는 사촌 형이 수채화 물감을 선물해준 게 계기였다. 곧바로 레핀은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밤낮없이 그렸다.

레핀은 지역의 이콘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며 열다섯 살의 나이에 성당 이콘(성화 聖畵, 종교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가 되어 일을 시작한다.


처음 물감을 섞는 허드렛일로 시작한 레핀은 점점 승진해 인물을 그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게 된다. 그렇게 그는 불과 열일곱살의 나이에 지역에서 유명한 이콘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콘을 그려주던 그 시절, 레핀은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볼가 강의 뱃사람들(1870~1873)

실제로 볼가 강변에서 배를 끄는 사람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번째는 가난하고 평범한 민중에 대한 사랑.

당시 레핀이 만난 러시아 서민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들은 마법 같은 솜씨로 이콘을 그려주고 고쳐주는 레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앞다퉈 레핀에게 음식을 갖다줬다. 레핀은 생각한다.

'카지노 게임라는 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두 번째는 자신의 가능성이었다.

미술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아서 국가가 인정한 화가가 되면 자유민 신분을 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안 그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엘리트 예술 학교, 황립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힘든 노력을 한다. 이 학교 학생만 대회에 참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핀은 천재적인 재능과 끝없는 노력으로 아카데미 시험에 합격하는 데 성공한다. 또다시 1년이 지난 21세 때는 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자유민의 신분을 얻는다. 기어이 그림으로 팔자를 바꾸는 데 성공한 거다.

레핀은 승승장구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해 열린 대회에서 그는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최고상을 받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로 떠올랐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1871). 최고상을 받은 작품


<소피아 황녀(1879)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레핀은 본격적으로 러시아 역사를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레핀이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그림 얘기로 떠들썩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소피야 황녀’

17세기 러시아 제국의 섭정으로 최초의 여성 황제가 될 뻔했지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고, 결국은 수도원에 갇혀 생을 마감한 황녀 소피야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레핀은 소피야가 갇혀 있던 수도원 근처로 집을 옮겨 가며 관련 역사를 1년 넘게 연구했다고 한다.

작품 속 소피야는 눈을 부릅뜬 채 조용하지만 격렬한 분노를 내뿜고 있다. 이는 창밖에 매달린 남자의 시체와 관련이 있다. 그 남자는 소피야를 황제로 내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자.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뒤 그를 수도원의 창 바로 앞에 매달아 소피야를 모욕했다. 한때는 러시아 제국을 다스렸던 여걸이었지만, 지금 소피야는 방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분노할 뿐인 무력한 존재인 것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1888)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도 소피야 황녀 못지 않게 드라마틱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6년에 걸쳐서 그린 레핀의 대표작 중 하나.

추레한 차림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 지금은 지치고 초췌한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도 청춘의 피가 끓을 때가 있었다. 젊은 시절 남자는 혁명가였다. 목표는 황제를 끌어내리고 민중의 세상을 만드는 것. 그 위대한 꿈을 위해 남자는 모든 걸 바쳤다. 동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에 그는 혁명 조직의 핵심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남자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다. 그는 아내의 마음보다 황제를 비롯한 적들의 마음을 더 궁금해했고, 두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 연말 선전 포스터의 문구를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감옥에 갇힌 걸까, 싸우다 죽은 걸까.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지쳐갔다. 결국 남자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뗀다. “그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내가 미안하구나. 이제 아들놈은 죽었다고 생각해야겠다. 우리끼리라도 잘살아 보도록 하자.” 남자가 평소 집에 생활비를 갖다주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없는 생활은 금세 안정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평범한 오후,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돌아왔다.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 시베리아로 귀양을 가 있었는지, 외국에 망명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남자는 돌아왔다. 기뻐해야 마땅한 일인데 감격의 상봉은 없었다. 어른들의 얼굴과 자세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잊은 딸은 낯선 남자의 침입으로 겁에 질려있다. 오직 아빠 얼굴을 기억하는 아들만 반가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래서 제목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다.


이 카지노 게임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그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생한 묘사와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원대한 포부에 몸을 던졌던 혁명가는, 실은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초라한 존재에 불과했다.


"정치나 권력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것들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가 진정 소중히 해야 할 것은 눈앞에 있는 사람, 오직 그것뿐이다.”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톨스토이(1891)-레핀은 톨스토이와 친밀하게 지내며 '인간 톨스토이'의 모습을 여럿 그렸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지금까지도 톨스토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나이가 들며 레핀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레핀의 건강을 걱정하는 친구들이 붓을 숨기자, 붓 대신 담배꽁초에 물감을 적셔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한다. 지난날 그림을 너무나 열심히 그린 탓에 레핀의 오른손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오른손으로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른손 손가락으로 팔레트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해지자 레핀은 끈으로 팔레트를 목에 걸고 작업을 했다.


가난한 레핀에게 러시아는 “예술 영웅으로 모실 테니 돌아와서 레닌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접근했다. 하지만 레핀은 단호히 거절했다. 러시아로 돌아가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게 뻔해서였다.

그에게는 언제나 인간, 그리고 예술이 먼저였다.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레핀은 1930년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죽기 전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 레핀은 이렇게 적었다.

“안녕히 계세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저는 태어나 너무나 많은 행복을 누렸습니다. 제게 삶은 순탄하고 즐거운 것이었고, 과분한 명성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흙 속에 눕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항상 관대했던 이 아름다운 세상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레핀이 세상을 떠나고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익숙지 않다. 레핀의 작품 속 광기에 사로잡힌 황제, 수도원에 갇힌 황녀, 혁명에 인생을 바친 아버지, 힘겹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우리가 본 적 없는 완전히 낯선 존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러시아 역사가 어땠는지, 그림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도 레핀의 그림은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레핀이 그린 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하나하나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레핀은 언제나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봤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을 담아 그들을 그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옛이야기에 지금도 마음을 쏟게 된다.

자유!(1903). -그의 후기 작품은 인상주의와 비슷한 느낌을 낸다. 오랜 작업으로 손이 망가진 탓에 그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덜 사실적으로, 인상주의에 가깝게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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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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