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너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곳은 학내 컴퓨터 실습실이었다. 지금처럼 노트북이나 탭북이 일상화된 시대는 아니었다. 일 가구 일 컴퓨터를 목표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 덕에 보급형 PC는 어느 정도 보편화됐지만, 인터넷은 아직 랜선에만 의존하던 시대였다. 학생들이 학내 컴퓨터 실습실을 자주 이용한 데는 시스템 자체가 지금처럼 구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었다.
실습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당시엔 대학 교육정책 일환으로 입학생들은 학과가 아닌 학부로 입학했다. 아직 정식 전공 학과로 배정되지 않았던 신입생들이 해당 전공 학과의 교직원을 알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외국인 강사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옆자리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려 했지만 제대로 접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컴퓨터와 실랑이를 벌이던 선생님은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Why doesn’t work?”
상황을 보니 선생님의 불편함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공 분야도 아니었고 그 원인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능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실력도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선생님께
“괜찮으시면 제꺼 쓰시겠어요?”
쓰겠다 말겠다는 의사 표시 없이 선생님은 딱 한 마디만 건네셨다.
“Sorry, I only speak English.”
선생님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셨고, 그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마치 어떤 룰을 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학교 후문에 있는 유일한 중식당이었다. 기숙사 밥이 지겨워 방 친구들과 짜장면으로 한 끼 때우려 했다. 자리 잡고 앉은 테이블 옆자리에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보다 먼저 와 계셨던 터라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러 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상대하는 학생이 워낙 많다 보니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신 듯했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시면서 사장에게 인사하시길
“잘 먹었습니다.”
어설픈 발음도 아니었다. 정확했다.
‘저 새끼, 나 보고는 영어만 쓴다더니....’
경계선 안에서 자신의 룰은 절대적이지만, 밖은 그렇지 않았다. 로마 가면 로마법 따르라더니 학교 안의 로마와 학교 밖의 로마는 달랐나 보다.
전공 학과로 넘어오면서 선생님은 거의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외국인 선생들이 보통 셔츠에 청바지나 면바지를 입는 평범한 복장을 선호했던 반면 선생님은 늘 인디애나 존스처럼 탐험가 비슷한 복장을 선호하셨다. 둥근 챙의 모자와 사파리 재킷을 입고 어깨끈이 긴 중간 크기의 여행 가방을 둘러메고 출근하셨다. 거기에 더해 항상 양말에 샌들을 신고 출근하셨다. 비 오는 날에도 선생님은 항상 양말에 샌들을 신으셨다. 그런데 그 양말이 젖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것은 과 내에서, 전 학년에서 거의 전설 같은 소문이었다. 선생님이 딱 한 번 파격적인 복장을 한 적이 있었다. 과 엠티에 오신 선생님은 흰 면티에 화려한 색깔의 반바지를 입고 오셨다. 당연히 양말에 샌들도 신으셨다. 그런데 입고 있던 반바지가 유난히 짧아 보였다. 남자 속옷, 이른바 사각팬티와 기장이 거의 비슷했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본 3학년 선배 하나가 말했다.
“야, 카너 바지에 주머니가 없어.”
그 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선생님의 수업은 2학년이 되서 들었다. 첫날에 A4 용지에 미국에서 사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름을 리스트로 작성해 나눠 주셨다. 거기서 본인이 쓸 이름을 고르라고 했다. 처음으로 ‘캐스퍼(Casper)’라는 영어 이름도 생겼고 종강 때까지 계속 그 이름으로 불렸다. 같은 학번 동생들은 외모에 비해 이름은 아동틱하다며 늘 킥킥거렸고 집에서는 기왕이면 미국 대통령 이름으로 하지 그게 뭐냐며 놀려대기도 했다.
선생님 강의는 회화 수업이었지만 교재도 없었고 실제로 회화를 강의하신 적도 없었다. 선생님의 관점에서 회화란 주어지는 상황이 너무 다양해 그 많은 상황을 수업에서 전부 다룰 수도 없고, 어쩌다 유사한 상황이 실제로 발생한다 해도 배운 그대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스피킹의 중요한 부분은 일반인의 생각과 다르게 발음의 문제라기보다 강세, 즉 스트레스(stress)의 문제라고 하셨다. 명사는 앞에 동사는 뒤에라는 명전동후(明前動後)처럼 스트레스만 정확하게 줄 수 있어도 충분히 알아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수업은 항상 스트레스를 정확하게 낼 수 있는 연습과 정확한 철자 표기가 수업의 주된 내용이었다. 한 학기 내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수업엔 한 가지 색다른 부분이 더 있었다.
첫날 우리에게 무언가를 따라 부르게 했다.
Stary, sta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Don McLean의 'Vincent'였다. 무슨 이유에서 그 노래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이 한 소절을 부르면 그것을 다시 따라 불렀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갈 즈음에 우리는 전 가사를 다 외웠다.
새로 신입생이 들어온 해에 다시 엠티를 갔다. 이튿날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늘 지니고 다니던 가방에서 A4 용지를 한 움큼 꺼내 학생들에게 나눠주셨다. 거기엔 Vincent 가사가 적혀 있었다. 신입생을 제외한 전 학년 학생들은 모두 익숙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의 수신호에 맞춰 모두 그 노래를 불렀다. 나눠준 종이는 쳐다도 아니 보고 불렀다. 신입생들만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선생님을 거쳐 간 모든 전공 학생들의 노래였고, 우리 과만 기억할 수 있는 노래라는 표시였다.
그 해 겨울 방학에 잠시 학교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학자금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으러 갔다. 거기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선생님은 내 영어 이름을 반갑게 불러주시며 이제 자기는 학교를 떠난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즐거웠다며 선물 하나를 주셨다. ‘코리안 캔디’라며 엿을 하나 주셨다. 더 봤으면 좋았을 텐데 두 학기만 선생님의 수업을 받았던 게 조금 아쉬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같은 숙소를 쓰던 다른 외국인 강사가 지독한 골초라 같이 있을 수 없다며 개인 숙소를 학교 측에 요구했으나 학교에선 이를 거절했다고 했다. 당시엔 개인 숙소를 따로 쓰고 있던 강사를 근거로 그 사유를 따졌지만 해당 강사는 이전 계약 사항이라 새로 규정된 계약 사항은 이인 일 주택으로 변경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결국 선생님은 숙소 문제로 학교와 계약을 포기했다.
학교 측의 사정도 분명 있겠지만 처음으로 학교가 원망스러웠다. 다른 강사들처럼 원어민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쉽게, 심할 때엔 대충 넘어가던 그런 수업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비교문학 박사셨다. 서울의 좋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귀한 강의를 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가 그런 사람을 그렇게 보냈다는 것이, 그런 선생님을 뺏겼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십 년 넘어 이십 년 전 일이었다. 학생들 수업을 하다 보면 요새는 눈으로만 공부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됐다. 그것도 한 번 보면 다시 보지 않았다. 그때처럼 그렇게 반복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던 수업은 더 이상 없다. 혹 그랬다간 돈이나 뜯어먹으려고 일부러 진도는 안 빼느냐는 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선생님의 Vincent가 더 의미 있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