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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효권 May 07. 2025

37표

‘폭삭 속았수다’의 인기가 아직도 여전하다. ‘애순’이와 ‘관식’이의 녹록지 않았던, 그네들의 지나온 길마다 그 길을 같이 바라본 화면 밖 사람들의 마음에 묵직한 꽃 한 송이씩 놓였다. 웃고 울리고 할 건 다했다. ‘사이다’ 같은 장면도 있었고, ‘그땐 그랬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일들도 상기됐다. 37, 그 숫자가 잊고 지냈던, 어쩌면 그냥 묻혀있었던 그 기억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애순’은 지어미를 울린 시를 쓰고도 부장원을 받았고, ‘37표’라는 분명한 득표 수를 받고도 ‘28표’를 받은 ‘만기’에게 급장(級長)을 뺏겼다. ‘만기’보다 9표를 더 받고도 부급장이 됐다. 발을 구르고, 울고불고해도 어쩔 수 없었다. 물질하는 애순 어미와 투스타 만기 아버지와 그가 뿌린 크림빵과 양초 사이에는 9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급장’이 ‘반장’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뒤에 조금은 누그러졌어도 그 무엇은 수십 해가 지나도 남아 있었다. 그땐 그랬는데 그때도 그랬다.


지금은 초등학교이고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4학년 신학기가 시작되고 새로 카지노 게임을 만난 첫 두어 주는 좋았다. 새로 반장을 뽑기 전까지만 그랬다. 후보 하나는 귀티 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뽀얀 살에 퉁퉁하고 또래보다 키도 조금 컸다. 다른 후보 하나는 그와 반대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호리호리했다. 뿔테 안경을 고 평범한 가정의 아이처럼 보였다. 얼핏 보면 공부 좀 하는 아이 같은데, 실제로 그랬다. 카지노 게임의 눈에는 전자가 반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니 그렇게 되길 원했다. 하지만 아이들 눈에 반장은 후자 쪽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애순’이 카지노 게임처럼 대놓고 표를 뒤집지 않았다. 뭔가 과제를 완성하지 못한 굳은 표정만 남아 있었다. 당선된 반장은 카지노 게임에게 축하받지 못했다. 앞으로 똑바로 하라는 경고만 받았다. 반장이 되고도 박수를 받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혹은 고만고만한 집 아이들을 대하는 카지노 게임의 태도는 달랐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지각하면 지각했다고 양쪽 볼에 유성 매직으로 지각이라고 큼직하게 썼고 눈 감으라는 말을 미처 못 들어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자 달려와 한쪽 뺨을 잡고 다른 쪽 뺨을 후려치기도 했다. 영화 ‘친구’에서 카지노 게임이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했다. 30센티 플라스틱 자가 회초리를 대신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있는 집, 카지노 게임과 친한 집 아이들만 모든 걸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래도 모든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부족한 자식을 이끌어 주시는 미안한 마음이 더 앞서던 시대였다. 무엇을 했건, 일단 내 자식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마음이 더 많았던 시대였다.


쌀이 부족했던 그 시기엔 아이들의 도시락도 일정한 규제가 있었다. 주 5일 중 4일은 도시락이 아닌 빵과 우유만 챙겨 오게 했고 단 하루만 도시락이 허용됐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있는 집 아이들에게 카지노 게임은 친절하게 말했다.


“너희는 니들 먹고 싶은 거 싸 와.”


신학기가 시작되고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학급회의’라는 것이 열렸다. 이전 학년까지 ‘학급회의’라는 것은없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지금으로 치면 ‘학급회의’란 사회에서 서로의 의견을 같이 논의해 가는 방법을 배우는 일종의 ‘체험학습’ 같은 것이었다. 카지노 게임의 지도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반장이라 한들 회의 기본 순서를 알 리 없었다.


카지노 게임은 지도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반장에게 회의를 진행하라고 했다. 학급회의라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반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똑똑한 반장이었지만 그도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카지노 게임만 그렇지 않았다. 반장에 대한 질책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첫마디는 반장도 돼서 그것도 모르냐는 것이었다. 회의는 시작도 아니하고 반장만 계속 야단쳤다. 그나마 반장이라 매를 들거나 손찌검을 하진 않았지만, 나중엔 반장의 차림새를 두고 야단쳤다. 실내화 꼴이 그게 뭐냐며 회의진행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반장을 혼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던 반장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카지노 게임이 선을 넘었던 것이었다.


반장은 울면서 소리쳤다. 집 안에 자기 위로 형들이 있고 형들이 신던 실내화를 물려 신어 이것밖에 없다고 소리쳤다. 반장은 고만고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신학기가 되면 실내화를 새로 장만하는 경우가 많다. 형편이 나은 집이 아니더라도 실내화 한 켤레 정도 장만할 수 있는 여유는 누구나 있었다. 반장만 그렇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카지노 게임도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놈이 어른에게 그렇게 대들었다는 것에 놀랐던 것이었다. 카지노 게임은 반장을 칠판 끝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 뒀다. 카지노 게임은 부반장을 데리고 회의 첫 순서와 나중 마지막 순서까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정확히 첫 시작을 알리는 멘트부터 마지막 멘트까지 부반장은 카지노 게임이 지도 책자 위에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 읽었다. 우리도 그 멘트에 맞춰 움직였다. 반장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했다.

회의가 끝나고 카지노 게임은 반장을 차분하게 달랬다. 앞으로 어른에게 정확히는 카지노 게임에게 그렇게 대들면 안 된다고 달랬다. 카지노 게임은 아이들의 시선에 반장을 없이 사는 사람으로 치부했던 부분은 싹 빼놓고 카지노 게임에게 대들었단 부분만 각인시키고 있었다.


엄마가 오랜 투병 끝에 회복했다. 6개월 넘게 병상에 있었다. 퇴원하고 한 달이 지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전학도 하게 됐다. 한 학기도 못 마치고 전학했다. 그것은 병자만 낳았던 그 집이 싫었고 더 이상 그 카지노 게임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는 아버지의 결심 때문이었다. 이사 전날 밤 엄마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교장 선생의 집 전화를 알아냈다. 당시엔 개인 정보가 지금처럼 강화되지 않았던 때라 가능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이 그간 가했던 학대 중 가장 심했던 일을 언급하며 교육부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의 사과만 받아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 뒤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러 다양한 카지노 게임도 만났지만 그때만큼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받은 그 강도(强度)가 워낙 세서 그런지 웬만한 것은 그저 그러려니 넘길 수 있을 만큼 단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스승의 은혜라면 은혜일지 모를 아이러니한 느낌이 든다.


‘애순’의 기억에 ‘37표’는 남아 있어도 카지노 게임에 대한 기억은 얼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많은 스승과 거기엔 평생의 은사로 남은 분도 계신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그 말을 들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녀의 이름이었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절로 떠오른다. 반사신경처럼 떠 오른다.


기억,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지난 일을 잊지 아니함. 또는 그 내용’이다. 이 사전적 정의에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내용을 잊지 아니하는 사람의 몫이다.


새벽 시간까지 ‘폭삭 속았수다’를 다 봤다. ‘애순’의 시간은 돌아보니 한 권의 시집으로 남게 됐다. 그 시간 속에 ‘37표’는 현실과 달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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