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화제와 평단에서 극찬을 받은 영화 몇 편을 최근 극장에서 보았다. 재개봉작도 있고 신작도 있었다. 모두 훌륭한 영화들이었음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지만, 나의 반응은 미세하게 달랐다. 나 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같이 영화를 본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어떤 영화에는 찬사와 카지노 게임을 아낌없이 드러내었고, 어떤 영화에는 찬사와 함께 우울감, 그리고 살짝의 분노를드러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설명하기 위해 나의 반응을 더듬다가 분석해내었다. 그 차이점을. 그건 이 영화와 나의 거리에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 거리조차 가늠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하늘에 떠있는 별 같은 영화들. 분명 눈에 보이고, 저기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절대 닿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 영화를 봤을때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경외와 찬사밖에 없다. 이런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런 영화를 만들어 준 감독에 대한 경외. 달이 저 정도의 크기로 밤마다 지구를 비춰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비슷하다. 어쩌면 저렇게 동그랗게 하늘 위에 떠 있는 지 그 완벽함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불가사의에경외감을 갖는 것이다. 만약 그 거리가 그다지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보인다면 어떨까?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 같은, 거리감이라면? 분명 하늘을 날 만큼 굉장한 높이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거리다. 즉, 나의 세계와 그리 동떨어져있지 않은, 같은 차원의 세계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엔 영화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울해하고 화가 난다. 찬사를 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자는 종교적 찬양에 가깝다면 후자는 훌륭한 성과를 이룬 동종 업계 사람에 대한 찬사에 가깝다. 즉, 후자는 열등감이 개입하는 것이다.
열등감은 곧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 라는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에겐 열등감이 생길 여지가 없다. 예수나 부처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정신상담을 받으러 가야한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쉬울텐데, 특정 종목의 운동을 열성적인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 경외의 대상이 되는 존재와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구분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잘하는 것은 똑같으나, 누군가에게는 카지노 게임만 느끼고, 누군가는 경외와 함께 열등감을 느낀다. 그 차이는 내가 닿을 수 있는 거리냐 가 만든다. 그 거리는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쓸데 없는 열등감을 느끼기 쉽상이다. 누가봐도 깜이 안 되는데, 상대가 안 되는데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이 많아서 문제지. 운동은 그나마 자기객관화가 쉬운 카테고리에 속한다. 예술분야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렸을 때는 평론가처럼 영화를 봤다. 이건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다, 엔딩을 왜 그렇게 찍었냐 등 아무리 좋은 영화를 봐도 내가 개선할 수 있는 점을 피력하곤 했다. 나름 영화를 많이 봤고, 내 주변에 나보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생각없이 우쭐하여 한 소리는 아니었다.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 객관화가 안 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나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된 후그런 식으로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그 분야에 대해 아는 지가 거리를 재는 척도가 된다. 그 분야에 대해 알수록, 더 세밀하게 잴 수 있는줄자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축구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축구를 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사람은 모두를 욕한다. 선수도 욕하고 감독도 욕하고. 선수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완벽하게 돌아가길 원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를 실제로 하게 되면, 게임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도 감독과 선수를 욕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하지만 준프로 급으로 축구를 하게 되면, 욕보다는 경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와, 어떻게 저렇게 하지. 저 사람은 저걸 해내내. 만약 정말로 프로급으로 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열등감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줄자가 세밀해질수록, 나도 플레이할 수 있는데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해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커질테다.
영화 평론은 카지노 게임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한다. 영화와 자신의 거리를 잴 줄자 따윈 없다. 따라서 평론가의 평이 카지노 게임 고르는 것에도움을 준 적이 없다. 누군가 카지노 게임 추천하며 평론가들이 좋은 평을 했다고 해서 봤더니 전혀 아닌 영화인 경우도 많았고, 나는 정말 재밌게 본 카지노 게임 주변에 추천해줬더니 평론가 평이 좋지 않다며 보기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능 프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대중문화평론가의 평에 따라 예능 프로를 고르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문화평론가가 왜 필요한지 의문을 갖는다. 재밌으니까 보는거지, 이걸 왜 평론하냐 고 한다. 나혼자 산다를 본 후에 그 에피소드의 평론가 평을 찾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는 평론가 평을 찾아보고, 카지노 게임 고를 때에도 평론가 평을 참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줄자가 없는 사람에게 왜 치수를 물어보나. 눈대중으로 봤더니 여기의 크기는 이렇다 라는 사람에게 건축을 맡길 사람은 없다. 참 신기한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