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어른, 이옥선 산문
저는 수필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별 관심도 없는 남의 일기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에요. 물론 수필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나 새로운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세간의 에세이집들에서 그런 보석을 찾기란 참 가성비 떨어지는 일입니다. 이옥선 님의 <즐거운 어른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글쓴이가 노인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특이점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책 뒷면에 보란 듯이 쓰여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절대 유명해지지 마라, 내 꿈은 고독사, 여자라면 의리…' 등등이 이 분이 쓴 글들의 요지인데 이런 이야기는 트위터만 종일 쳐다봐도 오천 번은 발견할 수 있는 내용들인 걸요. 오히려 따분했습니다. 왜 끝까지 읽어줘야 할까? 참고 읽을 가치가 있을까? 수도 없이 고민하게 하는 수필집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 정말 좋아하지 않거든요.
물론 70대 여성이 쓴 글이라기엔 상당히 급진적이고 신선한 내용이 담겨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 돌려 보면 흔하게 발견되는 담론들을 노년의 여성이 적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단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작가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70대라고 다른 세상 사람이라도 되나요? 나와 동시대인이카지노 게임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런 그에게 '이야, 70대 할머니가 이런 신선한 생각도 하시고, 대단하시다!'라고 말하는 태도야말로 무례하죠.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옥선 님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퇴고와 편집자의 도움이 더해진 결과물이겠지만 노년에도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 깔끔한 글을 쓰는 일은 존경할 만한 능력이잖아요.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거, 이거, 저거카지노 게임 모호한 말로 대체하기 일쑤인 걸요. 삶에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계속해서 자신이 가진 언어 능력을 단련하고 유지하는 일은 제 많은 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배운 점으로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가 아닌 생소한 단어를 꼽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지식이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작가와 세대와 출신지가 전혀 다른 탓에 처음 접하는 단어도 종종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래에 책의 문장을 발췌하여 새로 배우게 된 단어와 그 뜻을 공유하려 합니다.
1. 그러다가도 금방 툭툭대기도 했지만 남편도 젊었을 때보다는 절이 삭아서그럭저럭 봐줄 만했다(p.34).
: 이 책을 읽으면서 표현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대목이었습니다. 제가 무지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 표현이었어요.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고 인터넷의 '고향말 여행을 떠나요’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뜻을 참고하니 '음식이나 식품이 일정한 기간이 지나 익거나 또는 맛이 더해진다'는 의미라고 하네요. 저도 이렇게 꾸준히 읽고 쓰며 나이 들어 '젊을 때보다는 절이 삭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2.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도 “점이가 낼로한 번 찾아오면 내가 옷을 한 벌 해줄 낀데”하며 아쉬워하셨다(p.62).
: 사실 '낼로'라는 표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남에 내려와 살게 된 후에 배운 단어 중 참 인상 깊게 남은 말이기에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낼로'는 말은 거제도의 '예도'라는 극단의 작품을 통해 처음 배웠어요. 극단 예도의 대표작 중에 <거제도라는 극이 있는데 한국전쟁 이후의 거제도 모습을 그린 작품(원작은 소설입니다)이죠. 때문에 이 작품 속 인물들이 꽤나 오래 전의 거제 방언을 사용합니다. 아마 '낼로'라는 표현도 더는 사용하지 않는 방언인 듯해요. 경남에서 사귄 제 또래 친구들도 전혀 모르더라고요. '낼로'는 '나를'라는 말입니다. 아마 경상도 방언으로 '나'를 '내'라고 하니 '내를'이라는 말이 몇 가지 변형의 과정을 거쳐 생긴 표현이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저는 이 낼로라는 말이 미디어에서 비치는 흔한 경상도 방언도 아닌 데다가 실제 경남 친구들도 모를 정도로 생소한 말이라서 좋았어요. 왠지 현지인도 모르는 말은 내가 배웠다는 느낌? 이 단어가 옥순 님의 글에서도 나타나니 저만 아는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외에 연극 <거제도를 통해 배운 경남 방언으로는 '가왁중에'라는 말과 '세이(생아)'라는 귀여운 표현이 있답니다!)
3. 그 방편으로 아들을 어디다 팔아야 한다고 해서 팔았단다. 이런 사람을 '판모'라고 카지노 게임데 일종의 무당처럼 푸닥거리를 해주는 사람이었다(p.104).
: 남아선호사상이 심하던 시절을 살던 작가의 어머니가 아들이 일찍 죽을 사주인 것을 알고 판모를 찾아간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 '판모'라는 단어가 혹시나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을까 싶어 찾아보니 그렇지 않더군요. 당시 사람들은 이 판모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거나 그의 심부름을 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들어요. 책에 나온 말 그대로라면 작가의 남동생 사주가 좋지 않아 판모에게 팔았다는 건데 그 '팔다'가 제가 아는 '팔다'가 아닌 걸까요? 팔았다면 다른 집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남동생 분은 여전히 가족이시고, 안타깝게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것으로 소개되거든요. 뭘까요?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4. 목재는 낭창낭창한 재질로 된 좋은 나무라야만 널뛰기 나무로 적당했고, 이게 또 길이가 대단한 거라 아마도 돈이 상당히 들어갔겠다 싶다(p.173).
: 이 맥락에서 '낭창낭창'은 '가늘고 긴 막대기나 줄 따위가 자꾸 조금 탄력 있게 흔들리는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앞뒤 맥락을 따지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의미죠. 그런데도 이 단어를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대구 방언 '낭창하다'와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구 출신인 남편과 결혼하고 익힌 대구 말이 참 많은데 '낭창하다'도 그중 하나예요.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로서 '낭창하다'는 '성격 따위가 밝고 명랑하여 구김살이 없다'는 뜻인데 남편은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해요. 뭔가 힘이 없고 늘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할 때 '낭창~하다'고 말하더라고요. 인터넷의 오픈 사전에도 '대충대충 한다', '행동이 느긋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나오는 것을 보니 단지 우리 남편만의 용법은 아닌 듯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지역에 따라 의미가 이렇게 다르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이외에도 처음 배운 단어가 몇 개 더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솔직히 강력하게 추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뜯어말릴 책까지는 아니에요. 혹시 고상하고 교양 있게, 잔잔하지만 나름의 원칙이 있고 책 많이 있는 어른의 일기를 읽고 싶다면 한 번은 들춰봐도 좋은 책입니다. 새로운 단어 몇 가지와 예전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덤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