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쿠폰화와 범주화
지난 게시물 <카지노 쿠폰 사고를 제한한다 [1]에서는 어떤 카지노 쿠폰권에서 사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 자체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밀히 말하면 심지어 같은 카지노 쿠폰권 안에 사는 사람도 제각기 세계관이 다른 건 마찬가지지만, 카지노 쿠폰 자체가 다른 것는 좀더 큰 범주니까 먼저 얘기해 봤다.
'카지노 쿠폰는 사고를 제한한다'는 말은 '카지노 쿠폰권'에 대한 것 말고도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 다른 해석의 첫 번째 주자는 바로 '카지노 쿠폰화'.
카지노 쿠폰가 긍정적으로 사고를 제한하는 케이스다. 일단 카지노 쿠폰화의 사전적 의미를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서로 같은 개념을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절차다.
카지노 쿠폰화란?
말이나 글의 형태로 됨. 또는 그렇게 되게 함.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정리되지 않은 사고를 카지노 쿠폰로 풀어내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말뜻을 실감했을거라 생각한다. 특히 자신의 감정상태를 카지노 쿠폰로 정리하는 것에 한해 얘기해 보겠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수록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이 된다. 예를 들어 심장이 마구 뛰고 피가 빠르게 도는 가운데, 눈앞에 있는 사람을 한 대 치고 싶다면? 나는 분노한 거다. 또 다른 예로, 무슨 일을 하던 힘이 없고 귀찮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울음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고, 주말에 잠을 20시간 잔다면, 나는 우울한 거다.
그래서 일기를 쓰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도 하는데, 자신의 상황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겪고 있는 여러 현상을 글로 쓰고, 그렇게 쓴 글을 읽으면 '도대체 내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 있을 때 이 카지노 쿠폰화는 도움이 된다.
경계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고의 형태에서 경계가 (상대적으로) 또렷한 카지노 쿠폰로 가공하면서 내 감정을 알아차린다. 그런 의미에서 "나 막 가슴이 답답하고 자고 싶고 힘이 없어" 보다 "나 우울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분명한 증상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카지노 쿠폰는 사고를 제한한다'의 해석, 그 두 번째 주자는 '범주화'다.
범주화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모여 하나의 종류나 부류로 묶이게 됨.
안타깝게도 여기서부터는 카지노 쿠폰로 인해 사고가 제한되는 부정적인 케이스를 다룬다. 특정 현상이나 물질에 이름이 붙음으로써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혐오 용어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충을 붙이는 혐오 표현이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원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수입됐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현재 벌레 충 자로 이해되는 '충'을 가지고 합성어를 만드는 현상에 대해 말해 보겠다. 이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사례다.
혐오 표현으로 집단을범주화하는 것은 '타자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타자화란?
다른 사람의 인격이 나에 의해 대상화(對象化)되고 물화(物化)되는 일.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나와 같은 집단임을 부정하고 - 나와 같은 나라 국민이라던지 성별이라던지 연령층이라던지 취미라던지 - 분리하기 위해서 '내가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현상을 ‘타자화’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인들을 집단으로 묶고 내가 속한 집단과 분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트라우마를 표출하기 위해, 혹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믿음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등등이 있을 것이다.
범주화나 타자화는 카지노 쿠폰가 가지는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현상을, 집단을, 물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한 번 만들어지고 널리 쓰이면- 특히 같은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쓰이면-그 단어에 의해 사고가 제한된다. 이제는 그 단어와 연관된 것만 봐도 혐오감이 생기는 것. (여러분이 생각하는 혐오 표현을 떠올리며 이 문단을 읽어보길 바란다) 심지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쓰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데 쓰이기도 한다. 농담할 때든 진지한 상황이든.
카지노 쿠폰라는 도구 자체는 선악이 없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언제나 도구의 사용자다. 혐오 표현의 존재를 알기만 해도 혐오의 감정이 떠오른다. 사회에서 누가 혐오받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거다.
이제 생각해 보자.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이로운가? 이롭더라도 누구에게 이로운가? ‘사회’에 이로운가? 그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혐오 대상자에게도 혐오표현은 이로운가?
사회에서 그 혐오 표현이 사용됨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그들이 계속 이득을 보는 것은 사회에 이로운가?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단순한 한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조심스러워진다.
조심스러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인이 그 단어를(어떤 단어가 되었든) 사용할 때마다 그 단어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러니까 우리 한 명 한 명이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단어가 널리 쓰이는 데 일조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본인이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기원을 알아보고, 본인이지향하는 가치에 맞는 단어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적확한 용도로 사용한다면,혐오를 퍼뜨리려는 세력에게 은근히 조종당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강화해주는 일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