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봄님에게
엊그제 보내주신 책은 잘 받았어요.
읽고 있던 소설책의 마지막을 어젯밤 자기 전까지 꾸역꾸역 읽어 내고 오늘 선물 받은 그 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밤사이 성큼 찾아온 봄기운이 당황스러워서 외출할 시간이 다 되어도 마땅한 옷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 대느라 책을 놓고 나올까 봐 걱정했지만요. 철 지난 외투의 민망함보다 갑작스러운 봄의 반가움이 더 큰 주말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남산자락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북라운지에 앉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린이를 위한 예술학교가 열렸어요. 전통악기를 이용한 한국무용의 기본을 체험할 수 있고 하네요. 누구보다 몸 쓰는 일에 무딘 딸아이에게 한국무용을 배우게 하려는 것보다 옛것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하려는 목적이 컸어요. 몇 해 전 전통 시장에서 어떤 한국무용수가 관광객을 위해 비좁은 시장 바닥에서 버선발로 살풀이 공연을 한 걸 봤어요. 딸아이는 집에 가자고 채근하는 동생에게 조금만 더 보고 가자며 어르더라고요. 세상의 귀한 것,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을 기억하고 무리해서 단기 예술학교를 신청했답니다. 정보에 둔감하고 자식 교육에 극성스럽지 않은 제가 주저 없이 말입니다.
봄날의 남산은 실로 오랜만입니다.
남산의 서쪽에 자리한 어느 대학 3층 강의실 창문밖으로 매주 강의시간마다 바뀌어가는 산색을 바라보는 건 참으로 마음이 벅차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느 여교수의 한시 강의를 듣고 있었을 테지요. 연한 연둣빛과 여린 분홍빛이 점점이 번져가는 그즈음의 남산은 눈을 감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삶의 한 시절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틀어 박혀 있다 나와서 어둑어둑 해진 하늘 저편에 마주하는 남산타워의 저녁 불빛은 청춘이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저에게 등대의 빛과 같았어요. 혹 그 시절 당신도 서울 어딘가에서 보았을까요, 봄밤의 남산타워를요. 어둠이 내려앉은 지도 모르는 어느 연습실에서 손끝과 발끝을 최대한 곱게 모으고선 이마 위엔 땀구슬이 맺혀있을 당신을 가만히 그려봅니다.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나와 같이 열심히 그 푸르른 날을 점점이 짙푸르게 채워가던 당신을요.
생의 봄에서 한 여름을 지나 지금쯤 카지노 게임는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그때 도서관에서, 연습실에서 카지노 게임가 고요히 보냈던 시간의 옅은 한숨 뒤 지금의 카지노 게임는 그때의 바람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 시절 꿈이라는 신열에 들떠있던 카지노 게임 가슴엔, 열기가 사그라든 그 자리엔 열꽃만 남아 버렸습니다. 몹시도 가려워 긁고 싶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어 애꿎은 옷 앞섶만 쥐여 짜보던 카지노 게임, 열꽃이 떨어져 나간 카지노 게임의 가슴엔 지금은 희미한 흉터만 남아 있습니다. 카지노 게임가 열렬히 꿈꾸었단 증거겠지요.
어쩌면 카지노 게임는 화려한 봄 꽃도, 쨍한 여름 꽃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꽃은 시샘하며 피지 않는다는데, 각자의 계절에 맞게 피어난다던데 한 여름 피고 지는 배롱나무 꽃도, 자귀나무 꽃도 되지 못하는 카지노 게임의 찬란한 계절은 언제쯤 도래할까요. 봄과 여름을 거쳐 가을의 문턱에 서성이는 카지노 게임, 메말라버린 그 계절에라도 우린 꽃피울 수 있을까요. 아직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는 카지노 게임지만, 움트는 남산의 봄을 보며 저는 소란스럽지 않은 수런거림으로 채워질 카지노 게임의 가을을 잠자코 그려보았습니다. 그 시절 강의실에서 내 마음에 파고든 시구 하나를 문득 떠올리면서요.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
두목, 산행山行 가운데
카지노 게임 가는 길이 이제 정상을 오르고 난 뒤의 내리막길이더라도 함께 해 주는 그 고운 숨은 모두가 초행길인 서로에게 이정표처럼 무척이나 반갑고도 고마운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남겨진 계절의 홀가분함 속에서 느리게 걸으며 잔잔히 미소 지으며 마주 보는 카지노 게임, 그 찬란한 시절이 머지않음을 느껴봅니다.
건행해요, 카지노 게임.
:: 양방언, 아리엔느의 실絲 (Asian Sanctus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