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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 발언 Mar 30. 2025

중북접경카지노 게임 현황과 동향

중국경제지리(29)-만주변경지구의 현황과 주요 이슈(1)

만주변경카지노 게임 현황

만주지구의 변경카지노 게임해양 부분과 육지 부분카지노 게임 나누어 개괄하면, 해양 부분은 황해와 발해, 육지 부분은 북한, 러시아, 네이멍구와 접경하고 있고,행정구역 측면에서는 63개의 현급 행정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해양 부분은 부성급시(副省級市)인 따롄(大连)시와 지급시인 잉커우(营口)시,후루다오시(葫芦岛: 구 锦西)시외에 2개의 현급 도시와 5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 변경 지역은 동북 3성 전체 토지 면적 대비 비중 7.3%를 점하고 있으나 인구 비중은 48.8%이고, 인구밀도는 300인/㎢이다. 한편, 변경 지역 육지 부분은 9개의 시와 39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만저우리(满洲里), 헤이허(黑河), 쑤이펀허(绥芬河), 훈춘, 투먼(图们), 단동, 츠펑(赤峰), 바이산(白山) 등의 변경 거점도시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지구는 인구밀도, 도시화 수준, 산업의 발전 및 입지, 전반적 경제 발전 수준 등이 내부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고 낙후된 상태이다. 특히 네이멍구와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은 면적이 넓고 높은 산과 울창한 산림을 보유하고 있고, 대외개방 수준이 매우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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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국경하천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고, 80%이상이 백두산을 포함한 장백산맥의 협곡을 지나고 있다. 이 지역은 거주 인구가 적고 훈춘과 투먼, 단동 같은 소규모 국경 도시만이 있다. 동북부와 네이멍구 지역에는 따싱안령 산지와 건조 고원지이므로 도시 형성을 가로 막았다. 한편, 만주지구에서 러시아쪽에지역은 토지 조건은 우수하나 기온이 너무 낮아 개발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사회·문화·역사·지정학적 원인 등으로 인해 개발이 제약되어 왔다. 역사적으로는 청조의 만주 폐쇄 정책, 일제의 만주 군사기지화 전략, 해방 후 미국 및 소련과의 긴장 관계로 인한 중공의 만주 봉쇄 정책 등의 영향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이 추진되면서, 만주지구와 인접 국가 간의 변경무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대외개방된 도시는 따롄, 만저우리, 헤이허, 쑤이펀허, 훈춘이고 이어서 단동과 투먼도 포함되었다. 동시에 지린성의 지안(集安), 창바이(长白), 헤이롱장성의 모허, 쉰커(逊克), 통장, 멍베이(梦北), 후터우(虎头), 네이멍구자치구의 아얼산 등이 변방무역 소도시로 발전시작했다. 한편, 랴오닝성 연해지대의 잉커우, 단동, 진저우, 후루다오[葫芦岛, 구 진시(锦西)] 등의 항구도시들대외개방 폭이 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해양 변경 지역의 개방·개발에 따라 황해와 발해에 인접한 항구도시들이 발전이 촉진되었다. 이 중 따롄(大连)은 대외개방의 핵심도시로서 개발구 건설, 외자 유치 등을 통한 공상업의 발전 속도가 만주지구 내에서는 물론 중국 전국에서도 빠른 편에 속한다.



두만강 카지노 게임 개방과 개발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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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하류 지역의 개발은 16세기 이후 영토분쟁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19세기 중엽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강요에 의해 1858년 중·러 양국이 체결한 아이훈조약(瑷珲条约)에 의해 흑룡강 이북의 60만㎢ 면적의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 주었고, 우수리강 동쪽의 40만㎢의 영토는 중국과 러시아가 공동 관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1860년에 다시 ‘중·러 베이징조약(北京条约)’을 체결하고 우수리강 동쪽의 40만㎢의 땅도 러시아에 할양했고, 동시에 두만강 하구에 ‘土’ 자 비석을 세웠다. 1886년에는 청조와 러시아가 ‘중·러 훈춘조약’을 체결하고 ‘土’ 자 비석을 러시아 쪽 하구로 15㎞ 이동시킴으로써 중국이 두만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해양어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동해는 러시아와 조선 북부의 해안 경계 구역이 되었다.


또한 1938년 일본과 소련 사이에 ‘장고봉(張鼓峰) 사건’([참고 해설] 참고)이 발발해 양국이 군사 대치를 하게 되었고, 일본이 두만강 하구를 봉쇄하면서 이때부터 중국의 해양 출입이 막혀 아직까지 정식으로 바다로 출항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만주지구는 지정학·지경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역사, 민족, 정치, 군사, 경제 등 각종 원인과 주변국들 간의 세력 쟁탈전으로 인해 방치되었고, 개발이 정체된 ‘처녀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두만강 지역 주변국의 정치·경제·사회 상황이 변하면서 정치적·군사적 쟁탈 체제가 경제경쟁 체제로 전환되었고, 상호 배타성과 폐쇄성이 약해지고 협력과 상호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두만강 하류 유역의 국제적 협력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 1990년대에 국제연합 개발위원회(UNDP)가 미국, 일본, 한국, 몽골 등과 함께 두만강 개발사업을 추진했으나 주도적 투자자가 없었고, 다자 관계의 이해 충돌로 인해 지지부진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중국 정부와 지린성 정부가 함께 ‘동북진흥’ 정책과 ‘창춘-지린-투먼’ 개방 개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한의 나진항 조차(租借) 사용 등 중·북 간 합작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1991년 훈춘을 ‘갑종(甲種) 변경 개발지구’로 정하고, 1992년에는 ‘국가급 변경 개발구’로 지정했다. 9차 5개년 계획과 ‘2010년 장기목표전략’에서는 두만강의 개방·개발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러시아, 북한, 한국, 일본, 몽골 등의 인접 국가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이에 부응해 러시아는 ‘대(大)블라디보스토크 계획’을 발표해 하산지구를 두만강 개발구에 포함시킬 것임을 표명했고, 북한 또한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지정을 발표했다. 이어서 중국의 국경에 있는 두만강과 훈춘 간의 철도 및 도로, 훈춘의 석탄 광산과 발전소의 1기 공정, 징신개발구의 기반시설 건설공정이 완성되었고, 훈춘에서 러시아의 마할리노(馬哈林諾) 간 철도가 2003년 11월부터 개통·운행 중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 지역의 개발에 기술과 자본을 통해 적극 참여하기를 희망했고, 몽골 또한 두만강 지역의 개발을 통해 유럽-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대륙연결철도(大陸橋, land bridge)가 건설되어 몽골 동부의 경제 발전을 촉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두만강 지역 개발이 UNDP가 주도하는 다자간 국제협력 양상에서 경제력을 축적한 중국 정부가 주도하고 중국과 북한이 협력하면서 추진하는 양상으로 바뀐 후, 계획과 사업의 추진력이 강화되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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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지역의 국제협력과 유럽-아시아 간의 대륙철도 건설은 옌볜조선족자치주와 지린성, 그리고 만주지구 전체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중국은 북한 당국과 나진항과 청진항 등을 장기간 조차해서 사용하는 데에 합의함으로써 동해로 진출할 수 있는 출해항로와 항구를 확보하는 숙원 과제를 해결했다. 동해 부근에 3개의 개발항구 및 이를 연결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도 두만강 개발 사업을 중시하고 있다. 한국이 박근혜 정부 시절에 추진한 ‘유라시아 대륙철도’ 구상도 이 같은 맥락과 연결된다.


단, 북한이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한 청진과 나진, 선봉항 지구는 주변 지역의 입지 조건도 열악하고 , 북한 정권의 개혁개방 정책 의지가 제한적·소극적이어서 중국 경제특구의 제반 조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불리한 조건이다. 북한 당국도 이 같은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고, 남한의 관광객과 기업투자 유치를 겨냥해 금강산 관광특구와 개성공단을 개방·운영했었다. 최근에는 신의주 황금평지구 등을 중국기업 유치를 겨냥한 경제특구로 지정하고자 토지사용권 대여 방식 등을 부분적으로 도입·추진하는 방안을 탐색중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 개혁개방의 근본적인 한계는, 중국이 19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서 공포한 것과 같은 당과 정부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대내개혁, 대외개방’ 정책으로 전환한다는 공식적인 결정과 발표 없이, 오로지 당면한 경제난을 모면하기 위해 특구 내에서만 국지적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 해설] 장고봉 사건

1938년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일본과 소련 양국 간에 장고봉과 샤차오봉(沙草峰) 두 개 고지를 둘러싸고 발생한 군사충돌 사건을 가리킨다. 장고봉은 밍다오산(名刀山)이라고도 불리고, 러시아어 지명은 호수 건너편의 고지라는 뜻이다.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징신진(敬信镇) 팡촨촌 북측에서 5㎞ 거리에 있는 중·러 국경선상에 위치해 있고, 높이는 해발 155.1m이다. 이 산은 동과 북으로 러시아의 하산호(哈桑湖, озеро Хасан)와 포시에트 초원, 서북쪽으로 샤차오봉과 연접해 있고, 동남쪽 약 2.5㎞ 거리에서 중국, 러시아, 조선 3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다.


당시의 국제 형세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개 파시스트 국가가 상호 지지하고 있었고, 반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이 사회주의 소련을 침략토록 부추기면서 일본에 유화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본의 통치 집단은 전략 목표를 정하기 위해 소련에 대해 소규모의 탐색전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서쪽에서는 독일과 동쪽에서는 일본과 양쪽에서 동시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피하려고 일본 정부에 상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수차례 제의했으나 일본 측은 번번이 거절했다.


1938년 7월 일본 정부는 소련정부에 공문을 보내 중·소 국경선이 하산호 동안(東岸)으로 표시되어 있고, 매년 청명절과 중추절에 당지 조선족이 모두 장고봉에 올라가서 성묘하는 것으로 보아, 하산호 일대를 ‘만주국’(일본)의 영토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7월 15일, 일본 군인 3인이 조선 복장 차림으로 카메라와 망원경을 지니고, 두 명의 안내자와 함께 공공연하게 소련 경내인 장고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망원경으로 관찰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의 국경 군사시설을 도면에 표시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이때 소련 사병이 그들로부터 100m 거리에 잠복해 있다가 습격해 일본군 조장을 죽였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장고봉 일대에서 즉시 철군할 것을 요구했고, 소련군은 이 기간에 장고봉과 샤차오봉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쟁 물자를 운송·비축했다.


7월 30일 밤에 일본군은 어둠을 이용해 두만강을 건너 팡촨에 최종 집결했고, 자정에 조선의 홍의리에서 장고봉을 향해 포격을 시작하고 전투를 시작했으나 소련군의 대응 공격을 받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장고봉 전투

8월 4일에 일본이 화의를 제의했고, 쌍방은 수차례 담판을 거쳐서 8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장고봉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양국 군대는 8월 11일 12시부터 일체의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장고봉 북측 언덕의 진지를 쌍방의 경계선으로 하고 각자 80m씩 후퇴하기로 했다. 이후 일본군은 팡촨 일대를 금구(禁区)로 획정하고, 양관핑(洋馆坪), 훼이종위엔(桧忠源), 샤차오핑, 팡촨 4개 촌의 140여 호의 주민을 이주시켜, 이곳을 무인구(无人区)로 만들었다. 또한 동시에 팡촨 부근의 두만강 상에 말뚝을 박고 두만강 항도를 봉쇄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동북지구에서 동해로 나갈 수 있는 두만강의 출해통로가 봉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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