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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 발언 Apr 14. 2025

카지노 게임 추천 동해출해권과 간도 귀속문제

중국경제지리(30)-만주변경지구의 현황과 주요 이슈(2)

카지노 게임 추천 동해 출해권의 역사적 연혁

1858~1860년 사이에 중국은 제정 러시아의 무력 위협 아래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흑룡강 하구부터 두만강 하구까지 연해주 지구(약 100만㎢)를 러시아 영토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때부터 중국의 두만강 출해항로가 봉쇄되었다. 훈춘시 팡촨(防川)에서 두만강의 동해 입해구(入海口)까지 거리는 15㎞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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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886년에 중국과 러시아가 3개월간 담판을 거쳐서 맺은 ‘중·러 훈춘동부경계약정(中俄珲春东界约)’에서, “중국 국기를 단 선박이 두만강을 지나 동해로 진입하는 것을 러시아가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확인을 받았다. 약정 체결 후에 중국 두만강 연안 훈춘 등의 부두에서 러시아의 포시에트항과 블라디보스토크항, 그리고 동해 연안의 조선의 원산과 부산, 일본의 니이가타(新潟)와 나가사키(长崎), 그리고 멀리 상하이까지 해상 통로를 통한 무역 및 교류 활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었다. 그러나 1938년 일본과 소련 간에 전략적 요충지인 장고봉(해발 157m)을 놓고 벌인 장고봉전투(하산전투)에서 일본이 패한 후 두만강 하구를 봉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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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1964년에 중국 외교부가 북한에 중국 선박의 두만강을 통한 출해 항행에 동의해 줄 것을 요청했고, 북한 측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그 후 1990년 5월에는 지린성이 소련과 북한의 동의를 얻은 후, 두만강 입해(入海) 구간에 대한 학술 탐사를 진행했고, 이듬해 6월에 2차 탐사를 실시했다. 중·소 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단 배가 두만강 하류를 자유항행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 ‘중소 동단 변경경계 협의(中苏东段边界协议)’를 맺었다(1991년 5월).


그러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대해 분노한 북한의 태도가 달라지면서 중국 선박의 두만강 항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그 후 중국은 동해로의 출해권(出海权)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고, ‘두만강 출해권’ 회복은 지린성은 물론 중국 중앙정부의 숙원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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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무원은 2009년 11월에 ‘동북진흥’전략의 주요 내용으로, 지린성을 대상으로 한 ‘창지투 개발계획’이라 불리는 ‘두만강 구역 합작개발계획’을 승인·발표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지린성의 기존의 발전축인 창춘-지린 축을 동남쪽으로 연장해, 두만강변의 투먼과 훈춘까지 연장하고, 옌지, 롱징(龙井), 투먼 3개 도시 기능을 연계·통합·일체화해 두만강 하류 지역에 ‘옌롱투(延龙图) 대도시’를 육성·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와 지린성 정부는 ‘옌롱투 대도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주요 조건 중의 하나가 동해로 나갈 수 있는 출해 항로와 항구 확보에 달려 있다고 보고, 북한의 나선시와 청진시와 철도 연결과 항만 임대(租借) 사용계약을 통해서 숙원 과제인 두만강 출해항로를 확보하고자 하고 있다.



카지노 게임 추천 명칭과 ‘간도’ 귀속 문제

‘간도(间岛)’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내의 옌지, 왕칭, 허롱, 훈춘 4개 현에 대한 총칭이다. 이 간도지구는 본래 파루(把婁)의 땅으로 고구려에 속했고,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가 5경(五京)을 두었을 때에는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에 속하기도 했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 지역에 ‘여진족(女眞族)’, ‘말갈족(靺鞨族)’ 등으로 불리던 만주족이 거주하면서 두만강 남쪽의 고려와 조선의 영토를 자주 침범했으므로 고려 시대에는 윤관(尹瓘)이, 조선시대에는 김종서(金宗瑞)가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설치했다. 6진을 설치한 조선조 세종 이후, 여진족은 번호(藩胡)라 칭하며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청나라 건국과 함께 여진족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 청조는 만주족의 발상지 보호를 위해 간도지구를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외래 주민의 진입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동 등지의 한족과 조선의 유민들이 계속 잠입해 들어와서 당지 지방관부와 만주족 거주민들과의 대립이 잦았다.

팡촨에서 북한쪽을 등지고(2010. 6.25.)

간도 귀속 문제의 핵심은 1710년(숙종 36년)에 청조와 조선 대표가 공동으로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일대 국경실사(國境實査)를 한후에 압록강과 쏭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인 백두산 정상 동남방 약 4㎞, 해발고도 2200m 지점에 세운 정계비(定界碑)에 새긴,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있으니, 그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라는 문구상의 ‘土門江’의 실체를 둘러싼 의견 충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측의 주장은, 양국이 합의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글자 그대로 백두산 천지 부근의 쏭화강의 원류에 해당하는 지류이므로 마땅히 이 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고, 그 동쪽은 조선 영토, 서쪽은 중국 영토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중국 측 주장은, ‘土门江(tumenjiang)’은 (쏭화강의 지류인 ‘土门江’이 아니고) 조선이 ‘두만강(豆满江)’이라 부르는 강이라는 것이다. 즉, ‘土门江’은 청조 시기에 ‘두만강’의 만주어 명칭인 ‘투먼써친’을 한어(漢語)로 음역 및 의역해서 정했다는 것이다. 만주어의 ‘tumen’은 ‘많다’ 또는 ‘만(萬)’이란 뜻이고 ‘써친’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므로, ‘투먼’을 ‘土门(tumen)’으로 음역하고 ‘써친’은 ‘江(jiang)’으로 의역해서 합성한 명칭이란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정계비상에 새겨진 강의 명칭도 뚜렷했고 실제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중 조선인들의 점유 비중도 커서 조선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 앞가림도 못하고 망해가던 ‘대한제국’이 청국을 상대로 국경 문제에 대한 양보를 받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청국이 간도 문제를 실제로 영토 할양의 위협으로 느낀 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외교권을 거머쥔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 간도 문제를 제기했을 때였다. 일본은 간도에 조선통감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군대·헌병·경찰을 파견했으며, 쏭화강 지류인 토문강을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으로 간주하고, 청국이 침점한 조선의 영토와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행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러·일 전쟁 후 일본이 러시아에서 얻은 철도, 탄광 등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청국과 협상해 “청국은 일본의 만주에서의 이권을 보장한다”라는 내용의 ‘만주협약’을 체결하고, 1909년 9월 4일에 “일본은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한다”라는 내용의 ‘간도협약’을 체결한 후에 간도는 청나라에 귀속되었다.


이후 중국은 이 강의 명칭을 ‘土门’과 중국어 독음이 비슷한 ‘图们(tumen)’으로 바꿨고, 분단된 한국과 북한은 ‘두만강’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62년에는 북한과 중국이 협의해, 북한은 ‘두만강’이라 칭하고, 중국은 ‘图们江(tumenjiang)’이라 칭한다고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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