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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관우 Feb 09. 2025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까?》

혼돈과 질서 사이의 고통이주는 삶의 의미에 관하여


혼돈의 시대


인간은 혼란스러운 자연에서 질서를 찾아냈고, 자신들만의 문명을 꾸려 여러 가지 선과 면 안에 상상을 덧붙인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서 ‘오늘부터 우리는 이러 이러하게 합시다’ 하고 협의를 본다. 이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규모가 커졌고, 그곳에 법, 예의범절, 도덕률 등의 이름을 붙였다. 이 문명은 알 수 없는 혼돈 위에 질서라는 작은 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질서와 혼돈과 연속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질서를 파괴하는 혼돈은 갑작스레 찾아오기 때문이다. 자연재해와 같은 변혁적인 재앙은 물론이고, 범죄, 폭력, 쿠데타, 본래의 협의를 무참히 쓸어버리는 혼돈은 그 어디에나 편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 말이다.


인간의 욕심이 혼돈의 근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헤겔은 역사에서 드러나는 수립과 파괴의 영속적인 반복을 곧 ‘인정투쟁’이라 말한다. 즉, 인간은 외적인 가치를 치장하고서 사람들에게 내세워 자기 자신을 과시하여 더욱 고등 생명이라고 증명하고픈 욕심의 굴레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가슴 속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사회가 제시하는 구식 질서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타자를 속이고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도덕률과 협의안 등의 질서를 져버리곤 한다. 더욱 무참히는 법 마저도 어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끔찍한 혼란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평화로운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화목한 가정을 부숴버리기도 한다. 여태껏 노력했던 꿈을 실패시켜 무참히 비웃기도 한다. 평생 안정적인 삶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박살내기도 한다.


이러한 혼돈과 질서의 대립은 인간의 무의식에 기저되어 있다.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정신적 원형은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 예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다크나이트』의 등장인물인 조커와 배트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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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이다.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범죄자들을 벌한다. 그는 자신이 범죄자들의 두려움이 되어 범죄자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끔찍한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 고담의 시민들에게 누구나 자신처럼 영웅이 될 수 있음을 전한 그는 ‘질서’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그가 박쥐 가면을 쓴 이유는 그의 박쥐 공포증, 즉 두려움을 극복하여강해졌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순수한 사악함 그 자체이다. 조커의 목적은 그저 부수고, 없애고, 죽이는 것뿐이다. 그의 목적은 돈도, 명예도, 아니면 끔찍한 정신적인 만족도 아니다. 그는 그저 부술 뿐인 ‘혼돈’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조커는 판을 전부 뒤엎고, 혼돈으로 만들어버리는 카드다


작중 조커는 배트맨이 믿던 ‘선함’의 가치를 비웃는다. 조커는 하비 덴트라는 선량하고 정직한 검사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결국 하비 덴트는 분노에 휩싸인 복수귀로 변모한다. 즉, 조커는 하비 덴트를 타락시킴으로써 배트맨이 믿고 있던 사람들의 선량함은 그저 몇 번 건드리면 끔찍한 분노로 변모해버릴 뿐인 것이라며 배트맨을 조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인간의 선한 이면을 믿어오며 여지껏 범죄와 사투하던 삶은 ‘의미가 없다’며 비웃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배트맨은 조커로 인해 타락한 하비 덴트가 저지른 끔찍한 복수들을 덮어둔다. 그리고 사고로 죽게 된 하비 덴트를 배트맨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꾸며 달라고 고든 청장에게 부탁한다. 당당하게 정의로운 면모를 보여 고담 시의 시민들의 희망이 되었던 하비 덴트의 선량한 면모만을 남기기 위해 하비 덴트의 범행을 자신이 전부 뒤집어 쓰고, 고담 시의 희망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빛이 나는 영웅이 아닌, 어둠 속에서 묵묵히 질서를 지키는 어둠의 기사(Dark Knight)로 거듭난다.


물론 언제나 질서를 선, 혼돈을 악으로 둘 수는 없다. 혼돈의 집약체인 ‘자연’은 언제나 생명력의 어머니 아니던가. 자연은 갑작스레 뺏어가기도 하지만, 넘치는 생명력으로 아낌 없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연 안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질서를 모방하여 인간의 가전 제품, 생필품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이 질서를 이해함과 동시에 자연의 개체 중 하나인 인간 자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죽음과 생명의 순환은 혼돈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혼돈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우리를 ‘비웃듯이 무너뜨리는’ 혼돈도 이 세상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을까? 그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사라지는 것들 중에서는 카지노 가입 쿠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듯하다. 키우던 햄스터가 어디가 아픈지, 어린 마음에 절절한 심정으로 햄스터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동물 병원에 가던 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햄스터가 기억이 난다. 햄스터가 버스 멀미를 한다는 걸, 그리고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햄스터가 스트레스가 심하게 받는다는 걸, 뭣도 모르던 열두 살의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축 처진 햄스터의 찬 몸에 뜨스한 눈물을 흘려봐도 여전히 죽음은 시렸다. 부여 잡으려고 해도 무너지는 것들을 떠올리다보면 과거를 하염없이 거슬러 열두 살 이전의 어린 시절도 떠오르게 된다. 기억도 안 나는 그때에, 나는 삶은 갑자기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는 걸 알아버렸다.


많이 몰랐던, 그리고 미숙했던 때에 다가왔던 무수한 만남들은 실수로 인해 떠나간다. 그 이별의 흔적은 슬픔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후회하게끔 한다. 과거의 아픔에 붙들린 작용으로써 우리는 후회한다. 우리는 우리의 잃었던 것을 항상 회기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무언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항상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요새 혼란스러운 시기가 거듭 이어지고 있다. 평소처럼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일상을 이어 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어쩌면 일상 생활 마저도 분열될 위험에 처해있다. 혼란스러운 어둠이 몸집을 키운 채로 카지노 가입 쿠폰 눈 앞에 다가와 두 눈을 붉히고 있다. 파렴치한 폭력과 광기의 굴레가 또다시 찾아온 게 아닐까?


지금의 사회는 하나의 영혼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다. 그 영혼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찾아가는 인생을 전부 앗아가고 있다. 파괴와 혼돈을 일삼는 이 허무주의의 영혼은 자유가 부과하는 책임이라는 의무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생명력을 찾을 수 없는 도처에서 쾌락을 일삼아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망치도록 유혹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서 의미란 없고, 그저 지금을 즐기라는 목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피폐해진 정신에 어떻게 생명력이 찾아오겠는가? 이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아무리 “어떤 곳에서든지 생명력 같은 것은 한낱 거짓말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할지라도, 허탄한 체념의 탄식일 뿐이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즉, 우리는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 있지만,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이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에 다가온 수많은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든다. 그 끔찍한 결말 중 하나가 결국 ‘이 삶에 의미란 없다’라는 후회 섞인 체념의 목소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포기 이후에는 허무한 관조에 드리운 슬픔이 많다. 그 슬픔에 잠긴 채로 과거를 바라본다면 후회하고만 있는 자신을 끝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앞의 많은 시련에 정면으로 부딪히기에는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탈진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일어나라고 하는 게 할만한 짓일까? 사실 그렇진 않은 듯하다.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서 응원을 하든, 따끔한 말로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든,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탈진은 어떤 조언과 격려로도 흔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언제나 혼란을 마주한다, 어쩌면 혼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 혼란은 우리에게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우리의 경험들을 모두 후회할 것들로 만들어 버리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우리가 의미를 위해 쌓아올린 것들을 갑작스레 전부 무너뜨리고 또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린 이 혼돈과 마주하며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살아온 삶은 ‘의미있는’ 것인가? 실패했는데? 또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끝없이 순환되는 파괴와 수립의 반복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살아가야 하는가? 이렇게 하는 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왜 또다시 일어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란 쓸모로 나타날 수도, 아니면 자신만의 소중함일 수도, 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엄한 위대함일 수도 있다. 즉, 삶에 있어서 우리가 겪는 경험들이 많은 만큼 그 경험에 있는 사물, 사람, 상황, 그것을 경험하는 우리 자신, 그 모든 것에 의미가 깃들어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사물 혹은 상황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쓸모가 있으니 말이다. 허나 그 쓸모가 우리에게 어떠한 욕구를 채워주기만 하는 수단이 된다면, 언제나 이런 쓸모로만 채워진 의미가 무성한 삶만을 살 수는 없다. 아무래도 평생 물건들이랑만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소중함의 의미는 어떤가, 이것은 선호도와 연관이 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따라서 모두가 취향이 다르고, 그만큼 소중함이 다르다. 이것은 사물은 물론이고 존재적 대상, 즉 인격적 타자가 소중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주로 이러한 소중함의 대상이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 하지만 완전한 목표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붙들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존엄한 위대함은 어떤가? 이것은 자신의 취향을 뛰어 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삶의 이유’라도도 할 수 있다. 이 대상은 배우자, 신앙의 대상, 꿈, 여러 것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모두 동일하다.


즉 삶의 의미란 단순히 자신이 삶에서 고취할 수 있는 쓸모와 소중함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의 도구가, 그리고 행복을 주는 취향과 소중한 대상만이 우리 삶의 이유가 되어줄 수는 없단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자연스레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의미가 다른 어떤 의미들보다 훨씬 더 고상하면서도 숭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것은 우리 삶에서 어떤 것이 갑작스레 부스러지고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어떤 고난이 찾아오든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으로 굳건히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어주는 것이 바로삶의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알아볼 것이다. 나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세 사람이 "의미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한 지혜로운 답변에 따라서 말이다.





빅터 프랭클 - 고난 속에서의 의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의 세 번째 분파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설자이다.


로고테라피를 아주x100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의 심리에 기저된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환자가 자신의 삶에서 직접 충족시키게 함으로써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이겨내게 하는 심리 치료법이다. 즉, 이것은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과학적인 방법이라기보단(물론 모든 심리 치료 방식이 그렇듯 보기에는 환쟁이스러워도 놀랄만큼 과학적인 편이다) 환자와 치료자 사이에서의 소통을 통해 환자의 적극적인 삶의 참여를 유발하는 방식이다. 환자가 직접 삶의 목표를 삼아,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이다.


이 로고테라피의 근본은 프랭클 박사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있다. 그가 말하는 ‘고통스러운 삶 안에서도 의미를 찾는’ 삶은 곧 이 경험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연구, 삶을 송두리째 잃었다. 사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시체를 건초 더미 던지듯 다루고, 사람들은 노예처럼 부리며, 인격과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 수용소에 그는 갑작스레 갇혀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그 수많은 죽음 앞에서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지켜냈을까? 그렇지 않다. 그도 생존 투쟁에 휘말려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써 타자를 밟고 일어서야 했다. 그는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힘 없이 던져지는 시체를 옆에 두고 수프를 먹은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죽음이 일반이 되어버린 일상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수프를 먹었다는 증언을 덤덤하게 전한다(길지 않은 책이니 아예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수용소는 모든 자유가 빼앗기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절벽 아래로 내몰리는 곳이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그들의 주식은 퍼석하고 단단한 빵 한 조각이었다. 언제나 카포와 간수에게 자신의 생존 여부를 줘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곳에는 어떤 형제애도, 결속력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일이면 죽게 될 사람들의 명단에서 어떻게든 자신과 자신의 친구의 이름을 없애야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신발과 옷을 하나 둘 빼앗아 가는 횡포가 일상이 되어 가는, 말 그대로 생지옥을 땅에서 끌어 올린 듯한 '죽음의 수용소'이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깨달은 것들은 무엇일까. 그는 죽음이 넘쳐나는 곳에서 피어오른 수많은 영생의 줄기가 맺은 열매를, 절대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는 진솔한 몇 마디를 통해 전한다.


그는 죽음이 일반인 수용소에서 의사로써, 생존자로써, 노예이자 기계로써, 그리고 하나의 존엄한 인간으로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용소에서 누군가는 성자였고,


누군가는 돼지였다.



수용소라는 극심한 압박의 상황, 즉 생존의 욕구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내려 놓아야만 하는 끔찍한 환경에서 결국 사람은 두 갈래로 나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곯은 배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이에게 품에 숨겨뒀던 딱딱한 빵을 건네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떤 이의 비밀을 간수에게 떠넘겨서 자신의 명줄을 늘린다. 누군가는 생존 여부를 초월하는 존엄함을 지키는가 하면, 누군가는 자신의 생존 욕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고 한다 한들, 자신의 존엄성을 내려 놓고 상대에게 박탈과 폭력을 전가시킨 것 또한 가장 밑바닥의 자유 의지가 그것을택한것이라는 사실이다.


끔찍한 한계 상황에 내몰린 인간의 여러 군상을 살핀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깨달은 바를 묵묵히 적어낸다. 그리고 이 증언은 만약 우리가 이런 때에 있게 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창의적인 상상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담은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삶에 놓여지게 될 수많은 한계 상황, 즉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돼지가 될 것인가?"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니체의 격언을 떠올리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한다. 즉,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어떤 고난이 찾아온다 한들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그 고난이 자신의 모든 자유가 빼앗기고, 자신을 그 누구도 인간 취급 조차 해주지 않으며, 자기 옆의 동포 마저도 어쩌면 생존을 위해서는 상대의 헐렁이는 이빨과 손톱을 뽑아서라도 이겨야 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끔찍한 지옥에서의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겪게 될 가능성은 헌저히 낮다. 그리고 이런 고통만을 평생 바라면서 살아갈 수도 없다. 애초에 빅터 프랭클 박사도 저서에서 "고통을 피하거나 최소화 할 방법이 있으면 일단 고려해보쇼."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어떻게 고난이 없겠는가? 우리를 언제나 혼란스럽게 하는 실패의 집합체는 언제나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이 고통에 패배한 나머지 자신의 삶이 전부 무의미한 양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 또 어려움이 닥쳐 오면, 패배감에 가득 찬 사람으로 공허한 가슴을 붙든 채 의미를 잃고 배회하는 영혼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삶에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 찾아온다 한들 무너지지 않는다. 굳건한 정신력과 더불어 확실한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은 인생에 문제가 찾아오면 그것을 기회로 바꾼다.이것이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말하는의미이다.어렵고 힘든 상황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쓸모 있는 시간이 된다면 그 상황에 의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필수적인 고난 가운데에서도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잊지 않고 삶의 목적을 향해서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항상 의미로 충만한 삶이 드리우지 않겠는가?누군가가 비웃고 조롱해도, 부숴트리고 없애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고난 앞에서의 삶의 의미는 남이 대신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 드리운 고난이라는 상황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 상황을 거친 후에도 다시 굳건히 서있는 이들에게 의미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 앞에 어떤 고난이 찾아 올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있을 이유가 없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라는 개인적인 삶의 목표를 가진 이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오직 그들을 강하게 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이 다가왔을때, 그 상황을 문제로 삼고 무의미하다고 치부하며 고통에 이바지 할 것인가, 아니면 기회로 삼아서 성장의 디딤판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돕고, 자기 자신의 현격을 더욱 성숙히 제련할 것인가?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사랑이 회복된 삶이 아닐까? 수용소에서 자신의 배만 채우려고 사람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의 얼굴보다, 품 안의 빵조각과 헌 신발, 옷가지와 따뜻한 품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준 사람의 얼굴이 훨씬 행복해보이지 않겠는가. 얼마나 사는지 보다는, 왜 사는지가 훨씬 중요함을 알려주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의미'는 고통 앞에서, 아니 오히려 고통 덕택에 더욱 강해지는 의미이니 말이다.




의미는 강인한 자의 꿋꿋한 존엄성에 따라붙는 성장의 결실이다.





마르틴 부버의 의미 - 만남 안에서의 의미


마르틴 부버는 오스트리아 빈 출생의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을 탐구하며,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의 중요성을 알린 종교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에서 관계와 공동체, 그를 통해 밝혀지는 삶의 의미를 나타낸다.



일단 《나와 너》에서 드러나는 마르틴 부버의 사상부터 간단하게 이해하며 그의 의미를 알아가보자.


인간은 모두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물건을 사용하든, 강아지를 산책하든, 식물을 키우든, 친구와 대화하든, 우리가 완전히 홀로 우주에 던져진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서 관계를 치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부버는 인간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두 가지 태도를 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하나는 대상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태도, 하나는 대상을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태도를 말하는 언어, 즉 근원어는 각각 복합어'나-너', 복합어'나-그것'으로 드러난다.


아무래도 우리 세상을 보면, 일단 '나-그것'의 관계가 많기야 한듯하다. 우리 삶은 너무나도 많은 도구로 이뤄져있지 않나.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대우해야 할 존재 마저도 물체화 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요즘같은 산업화, 기술 발전, 이로 인한 급격한 자본화의 심각화로 팽배해진 개인주의 안에서는 알바생을 돈 주고 고용하는 게 아니라 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다수다. 게다가 우리 주위의 사람도 그렇다. 아무리 친구에게 고맙다고, 덕분이라고, 이런 말로 치장해봤자 상대를 그저 물건 취급이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이 경우에는 아무리 잘 쳐줘도 '나-그것'의 관계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나-그것'의 관계가 없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다. 도구를 사용하는 게 특징인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본능 마저 포기하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하지만 부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그것'만을 사는 자는 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느니라!



즉, 카지노 가입 쿠폰가 인격적 존재를 '그것'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로 영원히 이행되어서는 안 된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이것 저것 다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타인이 인격 그 자체의 존재인 이상 카지노 가입 쿠폰는 그 정보를 타인의 전부라고 여길 수 없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항상 타인을 전부 알 수도, 그리고 알고 있는 것으로 재단할 수도, 마음대로 평가를 내리고 오만하게 통제할 수도 없다. 상대를 물건 취급하는 자가 어떻게 자신 마저도 물건 취급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부버는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전한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너'라고 부르는 것이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다. 어디선가 '나'라는 인격적 존재로 살아와 우리 앞에 있는 '너'라는 존재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는 결코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시키고자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너'라는 존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만한 인간이다.


여기서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상대를 먼저 '너'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나'가 된다. '나-너'의 관계에서, 타자가 완전한 '너'로 있다면 나는 '나'가 될 수밖에 없다. 즉,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나 자신을 '나'라고 불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자를 '너'라고 불러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타자도 나를 '너'라고 불러주고, 타자는 또 다른 '나'가 된다. 이 관계는 상호적으로 서로를 완전한 인격적 존재로 대우해줄 수 있다. 그렇게 서로가 완전히 구분된 존재이나 함께 소통하고 감정을 교환하고 있는독존성을 띄게 된다.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된다.


내가 '나'가 됨에 따라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른다.



누구나 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연애 감정 말고도, 정말로 친밀한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대화의 즐거움 말이다. 이 대화에서는 각자가 각자의 몫을 챙기고자 하는 이윤계산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고자 하는 상호교환이 이루어진다.이 아름다운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너'로 부름으로써, 서로가 완전히 독립된 주체성을 갖게 된다.이것은 구분된 하나의 인간으로써 마주하는 상대를 모두 이용의 도구로 마주하고자 하는 오만함이 아니다. 이 사랑의 관계는 실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관계가 영원할까?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잘 안다. 인간의 그득한 욕심은 '너'를 '너'로 대우하다가도, 갑작스레 '그것'으로 보기 마련이다. 혹은 갑작스레 상황이 좋지 않아 관계가 흔들리기도 한다. 필요찮은 오해가 생겨서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우리의 친밀한 관계가 갑자기 부스러지는 것은 석연찮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 아니던가? 혹은 정말 친밀한 관계인 줄 알았는데 본디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부버는 이 관계의 불연속성, 예측불허성, 그러나 너무나도 숭고한 빛을 품은 존엄성을 통해 우리 인간의 삶이 가치있고, 소중하고, 의미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맺던 '나-너'의 관계는, 그저 상대를 '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상대를 인격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를 아무리 존중하고 싶다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즉, 상대를 '너'로 대우하기란 어떤 방법론으로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노력 없이 성취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가히 은총에 가까운 것이라서, 언제나 그 은총이 다가올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한 기다림은 집착이 되어 패망을 부르기도 한다. 이 준비에는 집요하고 불안한 마음이 아닌, 언제든 갑자기 다가온 '너'라는 존재를 '너'답게 대우할 수 있도록 항상 마음속에 사랑을 가꾸고 살아가는 평안함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 과정에서의미가 드러난다. 즉, '너'로 대우하던 이가 언젠가 '그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서 '너'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너'가 '너'의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에, 언제 그 순간이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며 관계를 붙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너'를 '너'답게 대우해주는 것이다.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 수많은 '너'들이 '너'로 불리기를 기다리며 잠들어있다고 한다. 이 시대만 봐도 그렇다. ‘그것’의 세계가 부추기는 수단화는 타자를 전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물질적 필요충분요소로 변모시켜버리는 바람에, 단독적인 인간의 독립성을 강하게 하는 척하면서 결국 그 인간을 단순한 물질의 모습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산업화와 기술 발전을 통해 기계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이 가난한 정신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가난함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이유가 아닐까. 이들은 개인주의를 행복의 끝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얼굴은 어찌 그리 불행해 보이는지 모른다. 그 슬픔 안에 파묻힌 인격적 존재들은 언제나 자신을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엄하며 아름다운 '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를 기다리며 잠들어있다.


수단화와 물질주의로 팽배해져 차디 찬 날씨가 된 사회에 따스한 입김을 한 번 흘려 보내 주는 것. 언젠가 그것이 다시 얼어 붙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그리 하는 것. 온기가 있는 자는 언제나 얼어붙은 자들을 녹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아는가, 그렇게 살아온 우리의 삶이 얼어붙게 된다면 누군가가 추위를 뚫고 우리에게 다가와 온기를 나눠줄 지도 모른다. 이때, 우리는 '의미 있는 삶', 즉 '참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



만남,즉 '나'와 '너'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상호를 인격적 존재로 대우해는 것. 언젠가 그 관계가 사라질 수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다시 '그것'으로 변모한 사람들을 '너'라고 부르기를 다시 하는 것. 이것이 곧 부버가 말하는 의미있는 삶이다.


부버에게 의미란 다른 것이 아니다. 관계를 감싸는 사랑이 비추는 빛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항상 '너'의 이름을 부르는 기쁨을 가득히 하며, 고통이 우리의 부름을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꿋꿋이 그 삶을 살아가는 삶에 의미가 깃든다. 의미는 단순한 형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에 깃들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오르막길이 있어야 짜릿한 내리막길도 있는 것과 같이, 처절한 어려움을 동반한 삶의 결단에 의미가 자연스레 따라 붙는다. 그렇게 의미는 자연스레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된다. 왜냐하면, 비참한 고통을 뚫고서 드디어 마주하게 된 '너'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치울 수 없었던 고통들에게 자연히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참된 만남을 항상 준비하고 있는 이가 찾게 될 은총이다.





솔로몬의 의미 - 허무와 경외의 의미


솔로몬은 《성경》에서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는 시가서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집편자이자, 여러 역사서와 역대지략서의 등장인물이다. 다윗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그는 특히나 『전도서』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궁구하고 묵상하였다.


Mr. 반갈죽 - The King 솔로몬


『전도서』의 전체적인 전개 방식은 솔로몬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더불어 그가 깨달은 수많은 지혜를 통해 얻게 된 통찰을 솔로몬이 '전도하며' 알려주는 형식이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는 전부 누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사람들을 다스렸으며, 선왕 다윗의 막강한 국력을 물려 받았고, 화려한 성전에서 수많은 여인과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영화를 전부 만끽한 후에, 그 모든 것들이 실은 전부 그 자체만으로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것들을 영원히 고취하려고 한다 한들, 우리 기대와는 달리 한낱 사라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전도서』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우리가 바라는 것들, 우리 가슴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 우리 삶의 목표로 세워진 것들, 그것들이 우월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들, 결국 한 순간에 지날 뿐인 허무의 변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허무해 빠졌으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유혹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우리에게 전도하고자 했던 바는 하나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의 한계를 인식하라'라는 깨달음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허무함은 전부 다 무가치하다는 식의 니힐리즘이 아니다. 그가 피력한 허무함은 바로 절대적 존재 앞에서의 허무함이다.즉, 절대적인 영원함 앞에서 우리가 아무리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고 말한다 한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심지어 의미 마저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의 일생은 짧다. 하지만 고민은 길다. 원념은 우리 가슴 속에 차고 넘쳐서 입 밖으로 흘러 넘치고, 홍수처럼 흐르는 불만과 원성은 역사를 뒤흔든다. 이 모든 것은 전부 한 때의 사념일 뿐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요, 우리가 영원한 시간 앞에서 "이것이 여기 있다!"라고 소리친다 한들 절대자가 비웃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오래 된 역사 앞에 점으로나마 새겨지는 우리의 이름은 가문의 축복이 되기까지 한다. 우주의 조그마한 점과 같은 비통한 부스러기는 사유하는 존재로써 그 우주를 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담은 우주 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치있는 존재이다.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소중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의 인생은 짧다. 수억년의 시대, 드넓은 세계,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란 그저 아주 작기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를 향한 확장된 이 시선은 곧지혜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집중된다.


『전도서』를 포함한 시가서 5권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 전부 지혜를 담은 문학이다. 이 지혜 문학을 하나의 문장으로 녹인다면 어떤 형태로 드러날까?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지혜라고 함은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드넓은 세계를 향해서 마땅히 경외감을 펼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무지를 충분히 알고,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지식을 향해서 굳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용기를 뜻한다. 지혜는 단순히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 혹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심 등의 지능적, 인격적인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이 태도는 한 존재를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존재, 혹은 상정해야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초월적, 신적 존재이다. 그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지혜, 즉 어떤 것을 전부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숙연히 고개를 숙일줄 아는 이 용기있는 두려움은 결코 신을 섬긴다고 해서 당연스레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신을 섬겨야만 한다는 강제성과 접목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바라는 자들에게 기필코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 아니시던가.


《성경》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이것이다. 어떤 종교이든 절대적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 신의 인격성을 존중한다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존재가 자신의 앎이라는 틀에 갇혀있을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초월자의 기준은 인간의 선악을 구별하고자 하는 기준과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이 존재는 아예 존재 자체가 인간과는 아득히 차이가 난다는 것, 이것을 몸소 신의 은총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존재적 차이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의 책이 바로 『전도서』이다. 인간은 영원하신 신과 비견한다면 아주 짧은 생애, 작은 삶의 지경, 부족한 판단과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존적인 만남,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자면 '신 앞의 단독자'가 된 경험은 곧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준다.


예를 들어보자. 집안에서 오냐오냐 자라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줄 알던 아이는 학교와 사회에 나가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평생 자기가 잘생긴줄 아는 사람은 차은우 얼굴 한 번만 보게 된다면 객관화가 확실히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존재가 신적 초월자(우주, 혹은 방대한 자연, 의지를 가진 절대자 등)라면 깨달음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자신의 삶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은 물론이고 피하고 싶어하던 것들에게도 일종의전환이 생겨난다. 바로,행복과 슬픔 모두 영원한 시간 안에서의 필수적인 순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정념과 욕심이 가득한 혼돈을 우리 마음 안에 지니고 있다. 이 혼돈에 귀를 기울이면 그의 입에선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는 말도 나오곤 하는 듯하다. 하지만 초월적인 경험은 혼돈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경이로운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겸손함과 평안함이 생겨난다. 자신의 능력치 바깥의 일을 제 손에 잡지 않는다. 굳이 과시하기 위해 쾌락을 잡지 않으며, 자신의 평가를 타자에게 두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가치는 사실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즉, 이러한 초월적인 만남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부숴두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잡을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절대적인 천장과 바닥이 생긴다고나 할까.


이와 함께 솔로몬은 여러 가지 가치를 긍정한다.


첫째로는 그럼에도 지혜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던 것도, 자신 안에 있는 경외감을 근간으로 한 지혜 덕 아니었겠는가.


둘째로는 공동 생활이다. 솔로몬은 "둘은 쉽게 패하나,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며 협동하여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셋째로는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제도, 내일도 아니다. 그것을 아무리 생각한다 할지라도 작은 우리 손에 붙들려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손에 쥐어져있는 아주 작은 이 시간의 틈, 이 지평에서 우리는 크나 큰 자유의 기쁨을 만끽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솔로몬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의미란 무엇인가?의미란 아주 개인적이고 존엄한 질서이다.욕심과 혼란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아주 많은 가치가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겸손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사실은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신의 욕심과 갈망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 혼돈의 광기들 사이에서 찬찬히 하나하나 질서를 잡는다. 자신의 마음 속에 질서를 되잡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서히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 진실된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어찌 기쁘지 않은 일이겠는가? 기쁜 삶에 찾아온 새로운 노동의 가치는 땀흘린 최선에 의미를 창조한다.


이렇듯,자신의 작음을 알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또한 의미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훨훨 날려주되,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는 것에는 열심히 땀방울을 흘려 최대한의 힘을 쏟는 것, 이것이 곧삶의 의미이다. 언젠가 그것은 부숴지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언제가 지금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유추하고 측정하여 예지할 수는 있어도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시간은 수많은 현재의 연속이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현재에 충실히 최선을 다 한 자가 쌓아올린 수많은 과거가 무의미 할리가 없다. 스스로 의미를 찾지 않는 자에게 신이 의미를 줄리가 없다. 하지만 의미를 찾고자 담대하게 무릎을 꿇는다면, 그 자리에서 의미가 싹을 틔우고 제 모습을 드러내 우리 품에 안겨주지 않겠는가.



의미는 겸손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이에게 다가올 새로운 질서이다.





사랑, 이 세상에 무의미는 없다


우리가 익히 무언가를, 특히 어떤 과거의 기억을 쉽게 "의미 없다"라고 치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수 없기에, 막연하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예측해보고자 한다. 예상컨대 그 경험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만들어낸 자기 자신을 아직 용납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아픈 경험을 만들어낸 자기 자신을 용서해주지 못하는 탓에 아직도 그 과거의 무의미에 지친 채로 탈진해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한다. 잃었던 이별의 유별난 아픔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기억을 절대로 잊지는 말자. 하지만 다른 명제도 명심하자,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는 훨씬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무궁무진하고도 창조적인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절대로 우리가 잃었던 것을 잊지 말자. 그렇지만, 두려워서 다시 시도를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서, 과거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제물로 바치는 듯한 현재의 관행을 그만 두는 건 어떤가?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어떻게 이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어째서 이것이 가능할까? 나는 늘 이런 어려운 질문을 답하기 위한 하나의 꼼수 내지는 나름의 방책을 하나 생각해뒀다.


그 답변은 바로사랑이다.


사랑이란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의 과거, 단점, 상처, 허무함, 비탄함, 슬픔, 전부 수용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세상에 사랑할 만한 사람 하나 있을까? 단순히 보건대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는 사람 없듯이, 사랑스럽기만 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끔찍한 이면이 도사리고 있다. 나도 그렇다. 자기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본 인간은 쉽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증오스러운 이면을 골라 보라고 묻는다면 차라리 결정의 때를 늦춰 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그런 모습이 많은지, 찾는 것도 일이다.


하지만 어떤가, 이 세상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의견은 타인의 ‘사랑해 줄만’한 모습만 바라보던 차에 떠오른 하나의 방책에 지나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가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삶을 살아가고자 하며 일어나 의미를 찾는 존엄한 인간이기에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나를 잘 알기에, 나의 삶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할까? 글쎄, 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이 모호함은 당연하다, 내 삶도 잘 모르는 나는 당신의 삶도 어떤지 잘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글쎄' 안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확신 마저도 나누어야겠다.


과거의 삶에 드리워진 후회스럽고 치욕스러운, 그야말로 '쓸모없는', '없어졌으면 좋겠는', '무의미한' 과거에서 의미를 찾는, 어쩌면 만드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왜냐하면, 그 과거가 형성한 지금의 자신을 사랑해주게 된다면, 그 과거들이 절대로 무의미해질리가 없기 때문이다.슬픔이라면 슬픔대로 의미가 있다, 당신은 슬퍼할 수 있을 만큼 감정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상처라면 상처대로 배울 점이 있다,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된다. 가해라면 가해대로 긍정할 점이 있다, 응보된 처벌을 받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이후에 의미는 각자가 직접 만드는 것이다.

누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항상 혼돈의 괴물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쌓아 올린 수많은 가치를 갑자기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그것이 우리마저 부쉈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여전히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이다. 그것이 언젠가 우리의 의미를 다시 부수기 위해서 다가온다 할지라도, 의미란 본디 부숴짐이 있을 때에 더욱 가치 있어지는 것 아니던가.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시작된다. 신이 질서를 잡기 시작한 이유는 인간에게 좋은 터전을 만들어주고, 그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믿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혼돈에서 질서를 잡는다"라는 뜻은 단순히 노동의 책무에 얽매인 존재의 일상적이고 지루한 관행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두고 싶다.


그렇기에 질서 수립의 개인적인 의무는 각자에게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 허탄하게 어렴풋하고 모호한 의미만 찾고 살아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또한 그 의미가 우리 삶에 뒤따라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모두에게 다른 모습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빅터 프랭클의 고난의 의미가 곧 자신의 의미에 부합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의미가 곧 자신의 의미에 부합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솔로몬의 지혜의 의미가 곧 자신의 의미에 부합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사랑의 의미가 곧 자신의 의미에 부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할 때, 삶에 무의미한 것은 그 어디에도 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무의미는 의미에게 자리를 내어다 준다. 그 의미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누군가는 결실이라고, 누군가는 계획이라고, 누군가는 기쁨이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의미는 삶을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올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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