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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관우 Apr 10. 2025

《시대 카지노 가입 쿠폰와 윤리, 헌법에 대하여》

자유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은 무엇인가


요즘 들어 시대가 더 시끄러워진 것 같다. 여러분 입장으로는 이렇게 시끄러운 시대에서, 말도 많고 글도 자주 쓰는 내가 왜 입을 조용히 하고 있나, 하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물론 그렇게 나에게 관심은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름 내가 조용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정치 이야기는 절제하는 편이다. 일단 현재 정치 흐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으니 나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한 기초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한동안은 떠들썩한 시대의 동향을 지켜보며 지식만 서서히 쌓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를 언급하기 위한 공부를 한’ 건 또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대한민국 정치 동향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이 담긴 관점은 최대한 줄이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정치 이야기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정치’는 시대의 가장 큰 흐름부터 가장 작은 요소, 즉 우리 손으로 투표해서 뽑은 국가 원수와 방금 분만실에서 막 태어난 아기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삶의 터전에서 ‘정치’를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야가 확립되면 어떤 것을 보든 간에 정치 이야기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저출산과 경제 침체가 전부 국가의 주도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끔찍하게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랑 정부 너는 뭐 하고 있었냐’라고만 결론이 끝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런 말들이 불거지면 친척들끼리 모인 명절날 대판 싸우는 건 또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정치적 감정이 과열되면 ‘남 탓’으로 불거질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깊은 사유 이전에 정치 흐름, 즉 누가 어떠했고 누가 어땠는지를 말하기만 하면 그 이상으로 가는 길이 막힌다. 그렇다고 그걸 바로 멈추기엔 남 탓은 너무 재밌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개개인의 인권 보장과 행복 성취, 자유 주권 의식’이 옅어지게 만드는 건 역설적으로 정치에 관한 과도한 담론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만큼, 그것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정치라는 건 참 신기하다. 견해에 따라 부류가 나뉘어도 어쨌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에는 더욱 심각하게 둘로 나뉘었다. 어쩔 수 없다. 다양한 사건이 일어났고, 실제로도 대립하는 중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화합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시급한데 상대를 규정하고 자신의 옳음을 관철하는 것이다. 강화된 알고리즘은 마치 ‘네 생각은 틀린 게 아니야, 어서 이쪽으로 와’라고 말하며 사상의 극단화를 부추긴다. 그 알고리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강력하고 폭력적인 언어로 자신과는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은근하게 자신이 옳고, 상대는 아직 미숙하므로 자신이 계몽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하고 카지노 가입 쿠폰 내리기를 좋아하고, 상대를 이해하기보단 규정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 편견이 너무나도 강해질 때,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시민 공동체의 정체성을 잃고서 늪에서 서서히 추락하는 제로섬 게임을 이행하게 된다. 감히 예측해보자면 이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럼 나는 이 사태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말했듯, 잠잠히 지켜보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개인적인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분리된 작금의 시대에,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만의 선함과 자신만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관철하며,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윤리를 따르고 있다.


이 상황을 보고, 나는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도대체 카지노 가입 쿠폰란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카지노 가입 쿠폰’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외치는 이 단어가, 시대와 맥락은 고사하고 사람마다 다르다. 자유민주주의가 공표하는 자유의 가치, 그리고 그 체계적인 질서 안에서 자신만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가지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옳은 일을 하려고 하는 지금, 우리는 이러한 ‘이념전쟁’의 시대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걸까? 게다가, 정치 이야기는 안 한다는 나는 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언급하면서 슬슬 모순된 모습을 드러내는가? 아니, 정말로 ‘카지노 가입 쿠폰’란 정치적 이념을 논할 때만 나타나야 하는 개념이었던가? 카지노 가입 쿠폰란 무엇일까?


일단 나는 나의 입장을 내리겠다. 여러분이 편하게 읽어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한 중립이다. 두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 중도주의자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만의 견해를 드러낸 이념적인 글을 쓰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질문한 바에 대한 대답을 내리는 사유의 과정을 늘여놓을 것이다. 즉, 이 글은 내가 나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관철하기 위한 계몽과 훈육의 의도를 담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나는 모두와 함께 배우고 깨닫고 싶다. 가장 중심적으로는 우리가 익히 말하고 있는 언어들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를 생각해보는 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다루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나의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필시 정치의 언어를 빌려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야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정치 이야기를 꺼리지만, 결국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정치적 언어를 빌려야 한다는 사실을 묵묵히 인정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나의 이념에 동참시키지 않고 싶다. 당신은 당신만의 생각과 카지노 가입 쿠폰를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며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조용한 몇 분의 시간이다.









헌법 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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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1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 2장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파면을 선고했다. 선고문 전체를 읽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만 바라보자면, 가장 크게는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을 어긴 혐의로 파면되었다. 그는 12월 3일 갑작스러운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계엄령을 시행할 정도로 국가 내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렇다 할지라도 계엄령을 시행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태가 아님을 명시했다. 즉, 윤석열 대통령은 그 무엇보다 ‘헌법을 어겨서’ 파면되었다고 봐도 좋다. 헌법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대통령마저도 이를 넘을 수 없으며, 규범을 넘은 후에는 파면되는 걸까?


헌법은 공기와도 같다. 우리는 헌법이라는 아주 중요한 법률 기초 위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헌법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한다. 그러니 헌법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그렇기에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는 대통령이라는 국가 원수도 넘어볼 수 없는 헌법이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작게 스며들어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중심이 되는 가장 큰 법이다. 법은 인간이 국민으로서 인권을 가지는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꾸리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로부터 마땅히 내릴 처벌과 보상을 주는 최소한의 장치이자 질서이다. 즉, 인간은 이러한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얻고, 누릴 수 있다. 헌법 전문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카지노 가입 쿠폰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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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헌법은 다음과 같은 인간의 기본 권리와 사회 질서를 규정한다.

1. 선조들의 희생과 후손들의 터전을 위한 자유 권리 존속

2. 개개인의 기회 균등과 최고도의 개성 발현

3. 헌법이 명시하는 자유와 권리를 짊어지는 성숙한 시민 정체성

4. 국가 평화와 세계 평화를 넘어 인류 전반적인 평화의 관계 충당




즉, 헌법은 개개인의 인간이 최소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유민주주의 질서도 당연히 그렇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탄생할 때부터 대한민국의 자유 시민의 권리를 취득한다.


하지만 헌법이 규정해주는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좋다는, 마음대로 하라는 자유가 아니라는 말이다.


헌법이 명시하는 자유는 ‘개개인의 인권’이라는 ‘권리’이다. 즉, 인간은 어떤 순간에도 존엄하며, 행복을 추구할 이유가 있으며, 자신의 자율적인 선택과 결단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이것은 헌법이 지켜주는 불가침의 권리이다. 특수한 상황(최근에 그랬듯)이 아니라면 인간의 자유가 빼앗기고 해를 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상대의 자유에 해를 주지 않는 경계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 침해와 권리 주장의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질 때마다 법은 발벗고 나서서 질서를 정리한다.


헌법은 인간의 자유를 정해준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정해주지 않는다. 헌법은 개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만 알려줄 뿐 개개인의 다른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헌법은 완고한 성벽이 아니다. 되려 단단한 바닥이다. 바닥은 쉽게 무너지지 않기에 인간이 뛰어다니고 점프도 할 수 있으며, 구르든 말든 상관없다. 단, 그 위에서 싸우거나, 자신을 다치게 한다면 바닥이 직접 움직여 그들을 막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헌법 기초가 있다고 해서 전부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실존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누었다. 이것이 완성된 인간은 ‘활동적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기초적으로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인간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대하는 국가나 질서에서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되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활동과 사유라는 점도 역설적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고 모두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그 자체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를 보장할 수 없다.

- 보켄포르데



그렇다면 질서 위에 우리가 쌓아야 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에픽테토스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는 권리(Liberty) 위에 쌓는 상태(Freedom)이다. 인격체로서 존중받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인격체로서 사는 삶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 개인적인 책무임을 받아들인다. 헌법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헌법이 명시하는 질서 위에 자신의 행복과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헌법이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해서 가능한 삶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책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의지를 다 해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무는 개개인의 힘이 곧 국력이라는 사명감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주인 의식’, 즉 자신의 손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책임감을 가중한다.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다. 자신이 국력에 보탬이 된다는 무거운 책무를 짊어진 것이다. 이 강인한 자유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환경에 휩쓸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유란 ‘방종이 제거된 건전한 의지를 내어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자유에 대한 확실한 앎과 확신이 있다면, 손발이 묶여도 자유로울 수 있다. 채찍질 당해도 고개를 들 수 있다.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에픽테토스가 노예 출신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는 끔찍이도 어렵다.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이고, 국가 질서만큼 강력한 환경은 없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헌법은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짊어질 수 있는 최고의 기초적 환경인 ‘인권과 가치’를 마련해준다.


즉, 우리는 헌법으로부터 자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이다. 권리 위에 상태를 쌓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발을 옮기고 손을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를 짊어진 민주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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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의 사회가 카지노 가입 쿠폰롭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됐는데?”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사람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같은 문장인데 두 개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담긴 것이다. 누군가는 ‘대통령이 탄핵 됐는데 카지노 가입 쿠폰롭겠냐’의 의미로, 누군가는 ‘대통령이 탄핵 됐는데 카지노 가입 쿠폰롭지 않겠냐’의 의미로 말한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카지노 가입 쿠폰를 가진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이것이 카지노 가입 쿠폰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모두 시위하고, 함께 뭉쳐서 구호를 외치고, 카지노 가입 쿠폰를 추구하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카지노 가입 쿠폰가 서로 다를수록 방향은 서로 반대다. 달리는 모습은 같지만 방향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모두가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관에 함몰되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위해 자신과 같은 카지노 가입 쿠폰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모습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는 무슨 카지노 가입 쿠폰를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는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서로가 양극단에 선 채로 멀찍이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정말로 ‘카지노 가입 쿠폰로운’ 모습일까? 우리는 각자 카지노 가입 쿠폰를 바라고 있지만, 상대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틀리고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옳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왜 우리는 각자의 카지노 가입 쿠폰만이 옳다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맞다고 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가치관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의 가치도 사실은 그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나는 두꺼운 책이 재미가 없어도 끝까지 읽는 걸 좋아한다. 나는 국밥은 빨간 국물보단 허연 국물이 좋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 달려가다가 뛰기를 반복한다. 이상한 습관이 여러 개 더 있지만 부끄러우니 더는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저 각자의 일상과 생활 습관이 다르니 자연히 만들어지는 가치관 섭렵에서 그친다. 그러나 가령 내가 ‘식인의 습관’을 가졌다고 치자. 이건 헌법의 인권을 넘어선 살인죄다. 그러니 나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내가 아무리 “목숨을 뺏은 건 아니고, 죽은 사람에게 잠시 실례했을 뿐이에요!”라고 반응해도 시선은 비슷하다. 하지만 헌법이 주는 인권의 법칙 안에서의 판단이 아니라, ‘인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식인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상상만 해도 정말 싫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에게는 단지 법적 질서로 공표된 선과 악의 기준만이 아니라, 마음속 양심을 따르는 내적인 기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기한 건, 이 양심에서 파생된 개개인의 기준, 즉 ‘카지노 가입 쿠폰’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카지노 가입 쿠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나누어준다. 국가마다 법이 다르며, 사람마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다르고, ‘하나로 합치되는 카지노 가입 쿠폰’는 없지만, 신기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카지노 가입 쿠폰를 판단할 수 있는 확연한 인식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식 능력의 결론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가 옳다’이다.





일단, ‘카지노 가입 쿠폰’란 무엇인가? 카지노 가입 쿠폰란 올바른 도리, 즉 덕치와 선행의 불문율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공공연히 알려진 바로는, 사람마다 이 단어 자체를 카지노 가입 쿠폰 내리는 방식과 방법은 물론이고 내용마저도 다르다. 왜일까? 그건 바로 ‘카지노 가입 쿠폰’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 차이이다.


국가 카지노 가입 쿠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국가는 기회의 균등한 분배와 개개인의 인권 보장, 그리고 마땅한 분배 원칙으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한다. 억울한 자에게는 보상하고, 슬픈 자는 위로하며, 분노한 자는 한을 풀어주고, 악랄한 이들은 심판하는 것이 응당 옳다. 이러한 카지노 가입 쿠폰 실현은 당연히 필요하다. 법치 국가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하는 것을 1원칙으로 두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카지노 가입 쿠폰로운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지만, ‘만들어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걸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여럿 있을 것이다. 민주 시민으로서 투표도 하고, 국가 원수를 지지하거나 비판하고, 얼마 전에는 국민의 힘으로 한 국가 원수가 카지노 가입 쿠폰롭지 못한 위헌자임을 드러냈는데 말이다. 헌법적 언어로 풀어보자면, 진정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닌가?


물론 옳다. 시민들은 헌법이 보호하는 고유의 원리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사태 자체에서 드러난 카지노 가입 쿠폰가 아니다. 사태에 기반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태도, 즉 카지노 가입 쿠폰를 관철하기 위한 개개인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탄핵이 옳다고, 누군가는 탄핵이 그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견이 다른 자들이 함께 모여서 대화하지 않고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생각을 나누는 것이 ‘카지노 가입 쿠폰’로운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카지노 가입 쿠폰란 확실한 의견을 관철하는 강력한 모습이기만 했던가?


나는 얼마 전 부산 본가에 내려왔다. 나는 부산에 오면 가끔 큰 교보문고가 있는 서면을 들르곤 한다. 교보문고를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10분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가야 한다. 그 버스정류장에는 우리 집으로 직행하는 버스가 하나 온다. 하루는 그렇게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조금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더니,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탄핵 찬성 집회 때문에 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예 그쪽 길이 막혀서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곳에서 또 집회가 열렸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탄핵 반대 집회였다. 그것이 설령 탄핵 찬성 집회였다고 해도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역시 진보주의자들”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의 터전에서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비행기 사고가 나고, 산불이 나며, 사람을 죽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며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어떤 정치인이 비행기 사고에 관심이 없다고, 산불은 중국인이 지른 거라고, 살인 교사의 의견도 나타난다. 물론 이것 모두를 이상한 음모론 취급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서 나타난 경고들도 더러 있으며, 우리는 귀를 귀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위와 의견 피력이라는 자유로운 시민의 권리를 운운하며, 각자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위해 뭉친 이들이 상대의 자유를 앗아간 일도 일어난다.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옳으니까” 였을까?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 앉은 시위자들을 보며, 수많은 의문과 씁쓸한 감정을 품고 지하철을 타러 걸어갔다. 피로한 표정으로 교통을 정리하는 경찰관들의 얼굴도 자꾸만 아른거렸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문이 나를 책상에 앉게 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글을 쓰며 아직도 질문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왜 우리는 상대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인정해주지 않는 걸까? 왜 우리는 보고자 하는 대로만 볼까?


사람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사형제도에 찬성하고, 누군가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적어도 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할 수가 없다. 내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의견을 생각하고 피력하며 대화할 뿐이다. 진실을 알기에는 우리의 인식 능력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는 때때로 편협하기도 하고, 또한 우리는 개개인이 그저 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논한 ‘카지노 가입 쿠폰 없음’은 사형제도가 옳고 그르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사형제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옳은지 그른지만 말하며 대화할 생각이 없는 지금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제 ‘사형제도’의 자리에 무엇을 넣든 좋다. 대통령 탄핵이든, 정당의 위헌과 위법이든, 우파나 좌파든 괜찮다.


모두의 카지노 가입 쿠폰는 존중되어야 한다. 각자의 가치관은 삶을 담고 있으며, 누군가의 판단에 짓밟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상대에게도 적용하기를 꺼려한다. 진보 좌파의 정치색을 갖는 사람을 공산주의와 중국의 졸개들로 보고, 보수 우파의 정치색을 갖는 사람을 두뇌 없는 음모론자로만 보는 경우도 많다. 완전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의 정치색을 보고 상대를 빠르게 카지노 가입 쿠폰 내리는 시기에 와버렸다. 댓글 창은 의견의 설파로만 불타오른다. 영상들은 거짓을 퍼 나르며 자신의 의견에 설득력을 바란다. 계몽하려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배우려는 사람은 없다. 무시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듣는 사람은 없다. 언어의 발화만 넘쳐나는 ‘난청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유튜브만 켜봐도 단숨에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대형 언론사도 편파적으로 사실을 전달한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착잡하지 않은가? 사회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버린 것인가?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자면, 대한민국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 건전하게 토론할 수 있는 민주 담론 공론장이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가 너무 격렬해진 나머지, 우리는 ‘자신이 카지노 가입 쿠폰다’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천하는 법으로부터는 너무 멀어졌다. 그럼 실천적 카지노 가입 쿠폰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옳다는 확증 편향에 빠져서 들을 귀를 잃은 채로 과열된 카지노 가입 쿠폰를 부르짖는 것을 카지노 가입 쿠폰롭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위험한 입장을 들고 오면 카지노 가입 쿠폰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도 있다. 그 순간에 자신의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고 겸손함을 겸비하는 것도 좋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말이 아닌 행위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멈추는 실천이다.”

- 임마누엘 레비나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입이 아닌 손과 발과 마음으로 먼저 실천된다.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상대의 이야기에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의 적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 대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나 vs 너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너=문제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나, 너 vs, 문제가 되어야 한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수많은 목소리가 빗발치는 사회에서 이것을 실현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헌법과 국가 체계,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리고 목숨을 바쳐서 지켜온 카지노 가입 쿠폰의 본질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그리고 이 고유한 정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나서야 우리가 더욱 큰 카지노 가입 쿠폰를 논할 수 있다. 이것은 ‘의로운 덕치’와 ‘마땅한 분배’에서 벗어나는 카지노 가입 쿠폰의 개념이 아니다. 되려 그것을 아주 작은 곳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작은 카지노 가입 쿠폰가 없는데 어떻게 큰 카지노 가입 쿠폰를 세우겠는가?


나는 이것이 자유 시민이 살아가면서 최소한 지켜야 할 카지노 가입 쿠폰라고 생각한다. 시위에 참여하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도 좋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받은 자유에 감사하는 것도 좋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자유를 해하지 않는 것도 좋다. 상대 정당의 정치인이나 옹호자를 욕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정치색 하나 인정해주지 못하면서 카지노 가입 쿠폰를 논하는 것은 어폐이다. 본디 카지노 가입 쿠폰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카지노 가입 쿠폰롭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며 전부 다 틀린 존재로 명명한 뒤에 그들의 인격을 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자유민주주의가 말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틀렸다고 해도 좋다. 그것을 유심히 듣는 결단이 나의 카지노 가입 쿠폰이며 내가 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 알려주는 방향이다. 국가 체계를 지킨답시고 국가 체계를 살지 못하는 역설적인 모순이 내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어려운 이야기이다. 나는 이 카지노 가입 쿠폰란 실현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 자체가 본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자유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며, 카지노 가입 쿠폰란 나아가기 힘든 곳에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회귀하며, 본능적으로 군중 속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값 싼 자유,값 비싼 빵



여태껏 알아봤듯, 자유와 카지노 가입 쿠폰란 주어지고 누리는 것이며 동시에 삶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시위에 나가고, 글을 쓰고,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삶의 전반적인 방향성이 카지노 가입 쿠폰를 바라는 것이 곧 자유로운 인권을 얻은 민주 시민이 살아가는 삶이다. 이건 국가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개개인이라는 시민의 책무이다.


하지만 누가 이 국가에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던 적 있는가? 왜 우리가 그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가? 헌법이 명시했으면 내가 그걸 해야 하는가?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가?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는 게 내 자유고, 나는 나를 버릴 자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도 좋다. 하지만 국가가 질서로 그것을 막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숭배해야 할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질서 체계로 본다면 인류의 몇천 년이 넘는 지혜가 담겨있다. 인간은 본디 태어나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자유를 형벌로 선고받으며 태어났다. 아무도 우리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 자유를 버리면 방종으로 이어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순간부터 인간은 허망하고 공허한 정신 상태로 끔찍이 빨리 죽어간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방금 한 말은 마치 지금의 사회 현상을 말한 것만 같다. 자유민주주의 체계는 그것을 막는 역할 아니던가? 왜 인간은 이렇게 욕구에 방종되어 살아가는가?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아이러니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경제 활동 참여에도 자유를 갖는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인정해주는 경제 체계가 바로 자유자본주의이다. 그런고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는 마치 함께 가는 한 쌍과도 같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둘은 요즘 들어 더욱 상충하는 형태를 보인다. 자유자본주의가 소비를 부추기고 인간의 욕구를 발현시키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자본주의에 대해서 해박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어쨌건 개개인의 기회균등원칙을 보장하며, 국가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인다는 점에서 자유자본주의는 참여자의 자유를 보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소비중심 자본주의’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자유자본주의에서는 경제 활동이 자유로우니 선전도 당연히 자유롭다. 그렇기에 경제 활동에 참여한 다양한 기업 등의 생산자들은 인간의 소비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제시한다. 우리는 언제 어딜 가든 소비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하는 매체와 선전을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는 소비욕을 가진 인간은 소비의 굴레 안에 떨어져서 인격적 정체성을 잃고, 공허한 정신을 가지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도구화된 노동자’가 나타난다. 우리는 욕구를 가진 도구처럼 살아가게 되고, 거대한 기계 안에서 쳇바퀴 굴러가듯 움직이는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현대 사회는 금지가 아니라, 쾌락을 명령하는 체계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소비하는 대신, 소비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 슬라보예 지젝



움찔 하셨죠?



하지만 이 체계가 끔찍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자유 없이도 살 수 있도록 끊임없는 자극을 밀어붙이는 세상은 인간이 스스로 서서 걸어갈 수 있는 자유를 직접 버리도록 부추긴다.


이것은 자유가 주는 무시무시한 고통과도 연관되어있다. 에리히 프롬은 ‘노예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살피며 인간이 자유를 직접 버리는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인간이 자유를 버리는 이유는, 인간이 짊어지는 자유가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발견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세상에 마치 던져지듯 태어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며, 각자만의 행복을 찾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깊은 고독을 느낀다. 어찌 됐든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을 계속 알게 된다. 끊임없는 결단으로 가득한 고독의 삶이 부여하는 고통을 버티지 못한 인간은 권위주의에 종속되곤 한다. 즉, 자신보다 힘 있는 사람이 대신 선택해주고,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욕구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직접 버리고 단편적인 욕구에 종속된다.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반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가 구상한 서사시 『대심문관』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당장 찾아오는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빵보다는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이반은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이 있는 십자가를 인간에게 주었고, 그는 작품에 ‘대심문관’이라는 이단 심판자를 등장시켜 그에게 반기를 든다.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종교 재판이 이행되고 있는 에스파냐의 세비야로 내려오며 시작된다. 땅에 등장한 예수의 여러 기적을 본 사람들은 그를 따른다. 하지만 이단을 잡아서 불태우는 ‘대심문관’이 예수를 찾아내고,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둬둔다. 그날 밤, 대심문관은 예수를 찾아와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비탄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아니라 빵이 필요했다고, 당신은 틀렸다고, 이제 당신은 필요 없으니 사라지라고. 그는 모든 인간을 하나로 모으고, 강력한 권위자, 즉 여러 명의 ‘초인’을 세워서 되어서 신에게 반기를 든 후에 빵이 필요한 자들에게 빵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일 화형에 처하겠다 선고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던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어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대심문관은 그를 몰래 풀어준다.


대심문관의 문제는 여전한 논쟁거리이다. 물론 작중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아직은 미숙한 청년이며, 이성이 제일이라고 신봉하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가 제시한 『대심문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기할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모든 인간을 나약하기만 한 존재로 그렸다는 점, 권위에 종속시켜서 쉽게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 점, 신앙이 주는 사랑은 자유의 고통을 뛰어넘는다는 점 등이 있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 즉 자유와 빵의 문제는 논리적 비약을 덮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충격적이며, 인간 본성의 폐부를 깊게 찌른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빵을 원하는 강한 본성이 있다.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이 좋다. 문제보다는 무탈한 게 좋다. 다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갈등이 있어도 해결하기보다는 아예 갈등 없는 개인이 낫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유를 짊어진 삶보다 어딘가에 이끌리듯 살아가는 삶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유를 ‘버린다.’ 이 시대의 대심문관은 소비중심 자본주의와 그 선두주자들이다. 인간은 그 권위 앞에 빵을 먹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들에게 자유를 헌납한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삶은 헌법과 국가가 방어하고 있어서 살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다. 우리를 죽이고 있기에 살아가서는 안 된다. 국가적 권위에 종속된 개인은 하나같이 전부 끝이 안 좋았다. 하지만 얕게 녹아 들어있는 권위, 즉 소비중심 자본주의의 대심문관은 우리 곁에 친밀한 미소로 다가온다. 이 끝은 소비에 취한 채로 어지럽게 어딘가로 자꾸만 넘어지는 우리만 남는다. 그렇게 쾌락과 위락에 절여진 채로 서서히 죽어간다. 이 죽음은 단지 소비 중독의 길이 아니다. ‘개인의 주체성’이라는 개별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단체에 종속되고, 정치 색깔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비슷한 사람끼리만 의견을 나누고, 생각이 없어지며, 결국은 정치가 광기와 신봉이 될 여지가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심문관이 아니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이고, 스스로 하루를 계획하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주체성이다. 그 중심에는 뜨거운 사랑의 가슴과 머리에는 비판적 분별이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따라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다시 짊어진 채로, 자신이 생각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각자가 외치는 카지노 가입 쿠폰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시대에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알고, 행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무엇보다 일단 완전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뱉고, 쥐고, 살아가며 외쳤던 카지노 가입 쿠폰가 단순히 국가 원수나 지도 계층을 향한 반발을 드러내어 분노를 해소하는 식의 짧은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확실해져야 한다.


더 명확히 말해보겠다. 탄핵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거나 슬퍼할 때는 이제 지났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 국가 원수를 두 번째로 끌어내렸다는 사실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도 모자라지 않다. 그리고 탄핵이 되었든 말았든 카지노 가입 쿠폰를 외쳐야 한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승리한다’라는 말이 단지 사건과 상황에만 쓰이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승리한다, 우리의 삶에서. 언어로만 남은 카지노 가입 쿠폰를 몸에 가져와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도덕과 윤리



우리는 말해오던 카지노 가입 쿠폰의 관념을 더욱 확장해서, 그 카지노 가입 쿠폰를 기준 삼아 나누어지는 ‘선과 악’까지 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해오는 체계적인 질서인 도덕과 인간의 마음 깊이에 있는 윤리도 들여다보자.


일단 도덕과 윤리를 구분해야겠다. 큰 의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도덕이란 질서에 가깝고, 윤리란 마음에 가깝다. 즉, 도덕은 법에 가깝고, 윤리는 양심에 가깝다. 둘 다 ‘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당시 시대의 도덕은 내세의 삶을 위해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천국을 가기 위해서 격렬히 투쟁하며 선행을 하는 것이다. 이반은 그리스도교, 즉 신이 죽는다면 모든 도덕이 무너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간이 내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이른다. 그들은 도덕이 부수어진 세상에서 경계를 뛰어넘는다. 요컨대,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들은 습관적인 도덕 체계로 형성된 종교적인 윤리를 전부 부수고 새로운 도덕을 쌓는다. 신이 죽었으니 무엇이든 허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문제점이 발생한다. ‘사상의 실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더욱 크게는, 신을 죽였다고 인간이 선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듣고 심하게 감화된 스메르쟈코프라는 남성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사악함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는 자신이 말한 초인이 ‘선량한 강인’이 아니라 ‘괴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자신이 살인을 교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중했다. 그가 늘 말했던 초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니체가 자신의 설파했던 초인인 위버멘쉬Übermensch와도 연관되어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말한 도덕의 위계질서는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자신이 선하다고 착각할 만한 수단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구체화 되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노예 도덕, 즉 약자의 위선을 긍정시키는 도덕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겸손과 참음의 미덕을 중요시하지만, 그 선행의 이유는 그저 자기 정당화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도덕을 모두 부수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자들이 바로 위버멘쉬이다. 그들은 개인적이고도 새로운 윤리 체계를 만들어나가며, 문제를 맞이해도 기회로 바꾸며, 고통을 사랑하고, 너무나도 힘든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다시 살고자 하는 자기 긍카지노 가입 쿠폰 강인함을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나타난다. 그는 모든 도덕을 부수었다. 하지만 이제 어디서 도덕을 찾을 것인가? 그저 양심을 따라야 하나? 그렇다고 자기 자신만의 양심을 따르기만 하는 것만큼 무질서하고 무방비한 삶이 없다. 그러나 그가 눈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그리스도교적인’ 아니 다시 말해서 ‘예수적인’ 도덕 체계들뿐이다. 사랑, 인애, 화평, 자비, 양선 등등. 이런 타자 윤리적인 선량함은 그가 말하는 고고하고 고독한 초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모든 도덕이 부수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쌓을지, 또한 자기도 살아갈 수 없는 이 사상을 누가 따라올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반과 니체의 초인론에서 등장한 가장 큰 문제가 여기 있다. 그들이 신이라는 절대 도덕의 원형을 죽이고 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였다’라는 점이다.

말했듯, 신은 절대 도덕의 원형이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았기에 존엄하고 귀하다. 하지만 이 이후에 생겨난 체계인 도덕이 전부 부수어지고 나서는 헤매기 시작한다. 그 이후에 복귀하는 도덕 체계도 거의 다 그리스도교에 기반하고 있다(물론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다시 회귀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도덕은 부수어져도, 윤리는 살아남아서 새로운 가치를 형성해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교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단지 노예를 위한 도덕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도덕을 만들었지만, 그 안의 윤리는 인간의 선량한 양심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그 마음의 시초는 선인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이로부터 나타난 윤리는 구체적인 질서를 만들지는 않아도 보편적인 ‘인륜’을 나타낸다. 도덕처럼 질서 정연하거나 드러내 나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인은 죄다”, “어린아이는 때려서 안 된다”,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이유는, 단지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우리 주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의 선의지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해야 할 선량함이 자신의 안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 상태에서 구체화 되기는 어렵다. 관계를 맺고, 질서를 지키고, 함께 살아가며, 사회에 섞인다. 이렇게, 도덕과 윤리는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선함을 긍정한다. 윤리는 도덕의 근간이 되어 주며, 도덕은 윤리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도덕이라는 다양한 질서 안에 갇혀서 우리의 정체성을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를 버리는 꼴이며, 도덕을 권위로 삼는 것이다. 니체의 비판은 이런 부분에서 유용하고도 날카롭다.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할 수단이 되는 도덕은 없느니만 못하다. 우리는 그 이상의 자유로운 주체, 즉 질서에 ‘끌려다니는’ 자가 아니라 질서를 ‘지키는’ 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논의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위에 쌓아야 할 카지노 가입 쿠폰는 무엇인가? 질서와 체계는 우리에게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바닥을 주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쌓아 올려야 할까? 아니, 다르게 질문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함께’ 쌓아 올려야 하는가?








타자의 얼굴



니체의 초인론은 상당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사상은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서, 보지 못한 것이 꽤 많다. 그중에서는 타자의 수단화가 있다. 위버멘쉬에게 있어서 타자는 자신의 나약함을 바라보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시험해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그가 모든 인간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에게 나약함을 보일 수 있는 강인한 용기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의 미덕을 너무나 홀대했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준 이반의 비극적 결말과 니체의 위버멘쉬가 가지는 한계는 ‘타자를 제한’하는 실수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홀로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만 옳을 수 없다. 자신의 선과 악의 구분만 옳을 수 없다. 자신의 양심에만 충실할 수 없다. 우리는 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몇몇 인간을 초인으로 우대하지 않고, 다 함께 땅에 발을 딛은 인간으로 대한다. 그리고 이 체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항상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초인적 특징’ 마저도.


“양심은 나 혼자만의 소리일 수 없다. 양심이란 타자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다.”

-파울 틸리히



우리는 어떻게 도덕을 실현하는가? 준법정신으로 가능한가? 여러분도 알거니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차가 지나다니지 않음에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 이유는 준법정신에 가깝다. 하지만 법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숙자에게 빵을 사주고, 후원 재단에 돈을 기부하고,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단지 준법정신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다.


모든 도덕 체계의 원점이 되는 윤리적인 양심은 ‘타자를 돕는 마음’이다. 타자의 고통을 보고 그를 도와주는 마음이 모든 도덕의 시초이다. 동시에, 자신이 약할 때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도덕의 이유이다. 초인의 한계는 여기서 드러난다. 도움을 동정으로 치환하고, 상대를 자신의 시험대로 만들면, 윤리와는 멀어진다. 그렇기에 초인적으로 강해지기는커녕 약한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보여주지 못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초인은 자신의 윤리 체계를 세우지 못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타자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성인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혹은 전체주의의 사악한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어쩌면 진정한 초인은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상대와 함께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함께 윤리를 탄생시키는 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신을 죽인 시대에서 다시 신이 부활하는 길일 것이다.


이 시대는 절대적인 도덕이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오답이 아니지만, 그 누구도 정답이 아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가장 자신이 정답이고자 하는 이 동향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특이한 개인주의의 역습은 공동체의 윤리를 무너트렸고, 기초 도덕 체계에 대한 반감과 의문을 품었으며, 무질서한 가치의 혼란으로 우리를 빠트려두었다. 우리에게는 질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질서로 회귀한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이고,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질서가 필요하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대화’이다. 대화는 맞부딪히는 갈등의 시초이기도 하지만 화해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도덕에 자신의 가치관을 모두 맞춰버리는 식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도덕이 무의미하다며, 절대적 가치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비판적인 분별력을 갖춘 머리와 도덕이 보여주는 ‘선함의 가치’를 긍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 안에서 각자만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가치를 분별하는 것이 곧 개개인의 ‘카지노 가입 쿠폰관’이다. 우리는 자기만의 카지노 가입 쿠폰관에 갇혀서도 안 되며, 타자의 카지노 가입 쿠폰관에 자신을 끼워 맞춰서도 안 된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타자와 맞부딪히고 살아가는 삶을 살며 자신만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하나씩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윤리’를 향해서 갈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따르기만 하는 방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가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륜을 제거하지 않으며, 되려 그 인륜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잘 봐야 한다. 그것은 항상 타자를 향한다. 우리의 윤리적인 의식과 마음은 항상 타자를 향한 이타심으로 발현된다. 우리가 새로 쌓아야 하는 도덕의 질서와 개인적인 카지노 가입 쿠폰는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구체화 된다. 자기 홀로 있는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저 그곳에 있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둘 이상이 되는 순간부터 폭력과 욕설, 약탈과 질투, 험담과 힐난이 시작된다. 하지만 화해와 칭찬, 나눔과 존경, 구제와 포용이 시작되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그렇기에 질서는 전자들을 최소한으로 하고, 후자들을 최대한으로 한다. 이 도덕과 맞부딪히며 윤리를 쌓아 올리는 인간은 자신만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관철하는 방법보다는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마음에서 새로운 경작을 시작한다.

헌법은 타자와 관계를 맺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당신은 존귀하고 존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앞의 상대도 그렇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륜을 구체화한 카지노 가입 쿠폰의 첫 시작을 말하는 헌법은 질서의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실천을 격려하며 실패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 헌법 위에 카지노 가입 쿠폰를 쌓는 인간은 개개인이 모두 다른 카지노 가입 쿠폰를 쌓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카지노 가입 쿠폰는 ‘평생 쌓아 올리는 것’이다. 오늘의 카지노 가입 쿠폰는 내일의 카지노 가입 쿠폰와 다르다. 왜 다른가?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개개인의 카지노 가입 쿠폰는 공동체로 이루어진다. 이는 마르틴 부버가 말한 대화 공동체와도 유사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확증한다. 그전에는 자신이 먼저 낮아져야 한다. 내 카지노 가입 쿠폰가 틀릴 수도 있다고, 내 존재가 약할 수도 있다고, 내가 넘어지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왜일까? 헌법이 말하길,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존엄하고 가치 있는 국민이며, 국가가 이를 온 힘 다해 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 가치를 스스로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오답을 내비칠 두려움과 자신이 맞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타인과 자신을 계속해서 비교하고, 자신을 평가하는 마음에서 오지 않던가. “그러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민주 시민이 될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카지노 가입 쿠폰를 쌓아나가야 하는 거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각자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함께 맞부딪히면서 알아 나가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말했던 최소한의 카지노 가입 쿠폰는 다름을 수용하는 대화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최대한의 카지노 가입 쿠폰 실현은 마땅히 이행되어야 하는 분배이다. 선한 사람이 보상받고, 악한 사람이 처벌받는 분배. 하지만 최소한의 대화 없이 최대한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이뤄질 수 없다. 최소한을 지켰다고 최대한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대화의 윤리’와 ‘자유의 결단’이 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개인은 이미 스스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하는 민주 시민이다. 국가 주권의 시초이며, 권력의 책임을 짊어진 개인이자, 공동체 안에 거주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 개인이 모여서 서로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맞부딪힐 때, 우리는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옳다고 하지 않는다. 더욱 좋은 카지노 가입 쿠폰를 실현하자고 말할 뿐이다. 이렇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카지노 가입 쿠폰를 지키며, 카지노 가입 쿠폰를 이뤄나가는 공동체.


우리는 끝없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실천한다. 대화할 때는 경청한다. 침묵을 지키고, 겸손히 자기 생각을 추가한다. 눈을 마주치며 웃으며, 상대를 함께 대화하는 존재로 부른다. 그 순간이 넓어지면 카지노 가입 쿠폰의 실천이 시작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도 카지노 가입 쿠폰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생각을 하는 것도 카지노 가입 쿠폰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모든 삶에 깃들 때, 윤리는 관계에 퍼져나가며, 초인은 사라지지만 행복이 드러난다. 홀로 있는 고독에서 사랑의 실천이 더욱 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나의 말은 끝났다. 길고 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주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당신에게는 무슨 카지노 가입 쿠폰가 새로 설립되었는가? 그것을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무엇이 부수어지고, 무엇이 새로 생겼는가? 당신이 나의 글을 읽으며 나와 나눈 대화에서, 당신은 무엇을 얻었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자유와 카지노 가입 쿠폰란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당신의 자유로 나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괜찮다. 나는 나의 자유로 이 말을 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시 묻고 싶다. 자유란 무엇인가? 카지노 가입 쿠폰란 무엇인가? 모두의 힘이 모여서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는 각자의 힘에 대해 지금 스스로 책임을 묻고 있는가? 그 책임을 부과한 자유를 짊어질 자신이 있는가? 그걸 짊어지고 상대에게 다가가고자 하겠는가? 당신은 어찌하겠는가? 선택도, 답변도, 이 모든 삶도, 모두 당신의 자유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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