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현실의 토양에서 피어난 카지노 게임운 꽃
<시는 내가 이창동 감독 작품 중 두 번째로 접한 작품이다. (가장 처음에 접한 작품은 <박하사탕이다.) <시를 본 이후 이동진 평론가의 이창동 감독에 대한 평가를 본 적 있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한국 영화가 도달한 깊이는 곧 이창동 감독이 도달한 깊이와 같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평가를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고평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밀양, <버닝, <초록물고기까지 다 본 지금은 저 말에 격하게 공감하고 있다.
<시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촬영(연출) 방식이었다. 이 영화는 장면마다 다큐멘터리인지, 영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감을 강하게 전달한다. 마치 실제로 벌어진 일을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가 더해져 현실성을 더욱 끌어올린다. 덕분에 관객들은 단순히 영화를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 마치 현실의 연장선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시를 두 번째 보고 나니, 왜 이창동 감독이 이 카지노 게임의 주제를 <시로 택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 중에서 김용탁 시인은 "시가 죽어가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쓰려고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김용탁 시인이 말한 시의 처지가 주인공 '미자'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자는 외견은 참 곱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실제 미자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알츠하이머를 겪고 있으며, 손자가 학교에서 집단성폭행 사건을 일으켜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미자가 하는 일로는 합의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고, 추가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은 상황이다. 외견은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실상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많지 않고, 그 비중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처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시'와 '미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시를 써낸 것이 미자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카지노 게임를 볼 때는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했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녀 주위의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결국 미자는 본인이 겪었던 세상의 추악한 면을 토대로 시를 써낸다. 전술했듯이 미자가 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해석이 맞다면, 미자가 마지막에 세상의 아름다운 면뿐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 카지노 게임를 처음 다 본 날이 윤정희 배우의 기일이었다. (23. 01. 19)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지노 게임 속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났던 그녀를 기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
+ 원래 티스토리에 썼던 글인데,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아서 브런치로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