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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은 May 05. 2025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을 자란다


‘엄마- 내일이 어버이날이야?’


아직 4월이 채 가지도 않은 어느 날, 포포가 어버이날에 대해 물어요. 아무래도 유치원에서 어버이날 행사를 준비 중인가 봅니다. 노래와 춤 같은 깜찍한 퍼포먼스를 배우고 있는 듯한데, 보여달라고 하니 선생님이 아직 비밀이라고 했다며 보안이 아주 철저합니다. 그런 것치곤 어버이날이 내일인지를 매일 물어봐요. 하지만 아직 5년 차 햇어버이인 저는 낯간지러운 어버이날보다는 어린이날이 더 익숙합니다.



‘그런데 포포야. 어버이날보다 어린이날이 더 먼저 온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뭐야?’

‘어린이날! 포포 작년에도 어린이날 했었잖아. 선물도 받고.. 축하도 받고?’

‘왜 선물을 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포포 생일이야?’

‘음.. 생일은 아닌데. 그냥 포포 어린이가 잘 자라고 있는 걸 축하해 주는 거야.’



가끔 아들이 이렇게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할 때면 엄마는 형편없는 3류 강사가 되어버려요.



어린이날은 어떤 날일까요? 5월 5일, 방정환 선생님, 빨간 날. 부끄럽게도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이 정도입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어린이날은 선물 주는 날이 된 것도 같습니다. 엄마가 되기 전엔 조카들 선물 주는 날, 엄마가 되고부터는 아들 선물 주는 날. 정의가 빈약하다 보니 아이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나 봅니다. 이럴 땐 인터넷 선생님에게 물어봅니다.



어린이날: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지정한 날.



일단 선물 주는 날은 아니네요.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어린이날은 어린이만을 위한 날이라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어요.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날이 있듯, 우리 달력에는 청년의 날도 노년의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공휴일은 어린이 날 뿐이지요. 게다가 근로자의 날에는 근로자만 쉽니다. 학교의 경우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교사는 출근을 하고, 당연히 근로자가 아닌 학생은 등교를 하지요. 그렇다면 어린이날도 어린이와 그 어린이가 있는 가족만 쉬면 될 텐데, 왜 어린이날은 모두가 쉬는 빨간 날일까요?



요즘 포포와 자주 들르는 서점이 있습니다. 자주 라기에는 거의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있는데요. 바다를 지나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독립서점입니다. 하원하는 어느 봄날 홀린 듯 들어갔던 그곳은 입간판보다 벽에 또박또박 쓰여있는 ‘서점입니다’라는 글귀가 더 눈에 띄는 곳입니다. 그리고 크지 않은 공간의 한켠을 100권도 넘는 그림책이 가득 메우고 있어요. 우리 가족은 여행지에서도 서점을 꼭 찾는데요. 서점 고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편이고, 또 여행 마그넷을 모으듯 한두 권씩 책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하지만 작은 서점에 다양한 그림책을 두기란 쉽지 않지요. 아이가 읽을 책은 늘 보물찾기 하듯 뒤져야 했어요. 그런데 대형서점도 아닌 곳에 이렇게나 많은 그림책들을 만나다니,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우리 모자는 보물서점의 단골손님이 되었습니다. 책을 파는 서점보다는 ‘읽게 하는’ 서점이 되고 싶다는 사장님은 포포가 들어오면 늘 힘차게 안아주시고, 포포의 서툰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어요. 저에게는 책 사지 말고 읽고만 가라고 당부하며 아이의 손에 작은 하리보 젤리 두 봉지를 쥐어줍니다. 어떤 날엔 과일주스도 함께요. 주스의 빨대는 아이가 먹기 편하게 병 길이에 맞춰 잘라줘요. 포포는 서점삼촌이 준 간식들을 먹으며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공짜입니다. 읽은 책은 모두 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한 권을 겨우 골라 계산대로 가면, 다음엔 사지 말라는 잔소리를 해요. 하지만 워낙 아이책 모으기를 좋아하기에 저도 참지 않습니다. (웃음)



어린이날을 생각하다 이 작은 서점이 떠오른 이유는, 제가 바라는 어린이날이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든다’는 말이 있지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윗집에 아이들이 살고 있는 사실을 층간소음으로 확인하는 시대에, ‘마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마을이라고 보면 될까요.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엄마의 친구인 이모들. 유치원 친구들의 엄마들. 이 정도를 마을이라고 보면 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더 크면 좋겠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마트에서, 식당에서, 도서관에서, 버스에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그저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어른들이 마을이 되면 좋겠습니다. 포포의 단골 서점 사장님처럼 말이에요. 무작정 반가워하고, 어쩔 수 없이 서툰 그 시간들을 기다려주는 것. 결국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든다’는 말은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어른들의 따뜻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 같습니다. 온 마을이라고 하면 너무 무겁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의 평범한 애정이라고 하면 조금 가볍게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니 어린이날은 차라리 평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린이날 선물. 어린이날이니 가는 놀이공원. 이런 것들은 너무 특별해요.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이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 주는 거예요. 마트 셀프 계산대에서 어린이들이 바코드를 찍어보게 하는 건 어떨까요. 아마 많이 기다려야겠지요. 어린이날 단 하루만큼은 모든 식당들이 예스키즈존을 하고, 도서관에서는 어린이 한정 무료공연을 하루 종일 해주는 거예요. 임시로 설치된 스낵바에서 원하는 과자를 들고 와 좋아하는 그림책의 인형극을 마음껏 보는 장면을 상상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도서관은 무조건 조용히 해야 하는 공간 이전에 즐거운 공간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거죠. 규칙은 그다음에 배워도 늦지 않아요. 어린이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요. 초등학생이 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버스 혼자 타보기’ 이벤트를 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어린이날 이벤트로 버스 혼자 타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제가 내릴 곳은 ‘ㅇㅇ초등학교 앞’입니다. 혹시 제가 정류장을 놓칠 것 같으면 꼭 알려주세요. 어른들의 도움을 발판 삼아 혼자 버스 탈 줄 아는 멋진 어린이가 될게요. 감사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목에 걸고, 용감하게 버스를 타보는 겁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어른들은 이번 어린이날도 무사히 맞이한 모든 어린이들을 축하해 주는 거예요. 축하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우연히 눈 마주친 어린이들을 그저 따뜻한 미소로 바라봐주는 것.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한 어린이날이 법정공휴일이자, 대체휴일제의 적용을 받는 이유입니다. 어린이날을 어버이날과 합쳐 ‘가정의 날’로 하자는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에도 걸리지 않는 대체불가 빨간 날이 된 것은, 어린이는 모든 어른의 몫이기 때문이겠지요.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어른들이 자기 몫을 하는 날. 남의 집 아이까지 보살피기에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러니 5월 5일 하루만큼은 모든 일을 내려놓고 어린이를 위해 마음을 써보는 거예요. 단 하루만큼은 어린이를 온전히 사랑해 보는 거예요. 그러면 5월 6일의 어린이는 오늘보다 슬기로워질 거예요. 5월 7일의 어린이는 더 씩씩해져 있을 거고요. 그리고 우리는 어린이의 커다란 마을이 되어있을 겁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 오늘만큼은 제가 바라는 어린이날을 자유롭게 상상해 봅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어린 시절에도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어요. 제가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주고 기다려주고 웃어주는 친절한 어른들이요. 그들의 사소한 배려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기꺼이 어린이들의 친절한 어른이 되어주어야겠습니다. 어린이가 잘 자라는 세상은 그 누가 살아도 행복할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저는 지금 포포와 어린이날을 맞아 캠핑을 와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많은 어린이들이 있어요. 실내 놀이터 앞에 마구 어질러져 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나오면서 제 신발을 잘 찾을 수 있길 바라면서, 신발을 신다 넘어지지 않길 바라면서요. 이 정도의 마음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과일주스 빨대를 잘라서 주는 정도의 아주 사소한 배려. 이 정도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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