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아른하임, 김예은 옮김
관조와 창조성
단순한 기하학적 양식을 보면 그것들은 분명히 식별 가능한 부분으로 성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4변형은 네 개의 각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부분온라인 카지노 게임 여러가지 그루핑이 가능하다. 4변형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하나의 각을 나머지 세 가지 각과 구별하는 데 네 가지의 방법이 있고, 두 개의 각을 다른 두 각과 분리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더우기 네 개의 각은 서로 똑같이 결합된 것으로 다룰 수도 있다. 이들 그루핑이 눈을 사용해서 이루어질 때에는 단순히 양에 관계될 뿐 아니라, 그것들은 도형의 시각적 구조, 즉 그 축의 위치, 그것의 대칭, 그것으로 구분된 부분간의 대응관계를 동반한다. 게쉬탈트 심리학자들은 요소간의 가능한 조합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환영받는 것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했다. 우리들은 가능한 한 단순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시각장(視覺場, visual field)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긴장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그루핑을 “전형적으로” 본다. 전형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다 피상적으로는, 그것을 "좋은 게쉬탈트의 법칙"에 일치하는 행동이 사람들 사이온라인 카지노 게임 “전형적”인 경우를 의미한다 - 즉 그것은 실험에 의해서 검증된 대다수의 피험자에 의해 통계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와 같은 행동은 지각온라인 카지노 게임 전형적이란 것을 의미한다. 즉, 지각이 기대나 욕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고 중성적일 때 가장 단순 가능한 구조가 지배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지각"이란, 과학적 개념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듯이 추상적 개념이다. 일상생활온라인 카지노 게임 지각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실험심리학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한 작은 관심온라인 카지노 게임 대상을 상세하게 조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적 과정 그 자체를 거의 고립시킨 상태온라인 카지노 게임 먼저 조사해 보지 않으면, 지각이 기대나 욕구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초기 게쉬탈트학파의 연구의 대부분은 짧은 노출시간을 이용하였다. 가끔 피험자는 무엇을 보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최후의 신선한 인상에 의존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이와 같은 방법은 지각과정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게쉬탈트 심리학자가 결단해온 생활방식의 요청, 즉 인간은 개인적 자아라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기 과업의 요청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바칠 때 그는 가장 생산적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자극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학파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에 대해서 납득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일본의 심리학자 사꾸라바야시 히또시(櫻林仁)는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은 몇 가지 간단한 관찰을 발표했다(4). 그는 게쉬탈트 연구가 근거로 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패턴이 오랜 관찰에 노출되면 기본적인 구조상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도형은 자발적으로 그 "좋은 게쉬탈트"를 버리고 다른 구성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그림 36a를 10분이
내로 보여주면 b와 c온라인 카지노 게임 제시된 것과 같은 유명한 역전이 생길 뿐 아니라, 또 원의 붕괴와 전체적 대칭의 파괴가 생겨났다. 때때로, 부차적인 세부가 맥락을 떠났으며, 주의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확산적인 기능을 갖는 요소는 역설적인 하위적 전체 (subwholes)에 결합되었다. <그림 37a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피험자들은 구성 성분 b와 c를 시각적으로 고립화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게쉬탈트 심리학이 예측했던 것처럼 피험자에게는 아주 어려운 묘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지각에 관한 기본적인 게쉬탈트 법칙이 한정되고 아마도 인위적인 조건하온라인 카지노 게임만 적용된다는 것, 그리고 또 그것이 적절한 넓은 범위에 걸쳐서 조사되었을 때 훨씬 다양한 반응이 지각의 특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게쉬탈트 이론은 예를 들어, 뉴튼(Isaac Newton)의 절대공간에 관한 개념이 아인시타인의 광대한 이론으로 바뀌어진 것과 같이 보다 일반적인 공식에 길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큰 이론체계를 너무도 좁게 보는 입장과, 그 범위를 넘어선 다른 곳온라인 카지노 게임 오는 영향에 아직 노출되지 않는 하위체계에 대한 적절한 입장과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입장의 수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외부 인자로부터 들어온 그 체계에 고유한 인자를 말해주고, 보다 큰 전체 내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하위체계의 위치와 기능을 이해하기를 학습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후자의 경우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구별은 언제나 뚜렷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최근의 심리학 교과서에서 저자들은 사꾸라바야시의 실험에 관계된 원리에 언급하고, 잘 알려진. 역전 도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장시간에 걸쳐 관찰하면 단순하고 '좋은' 도형은 그리 좋지 않는 도형으로 변형된다. 이것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우리들은 보다 단순한, 보다 대칭적인 그리고 일반적으로 '좋은' 도형이 언제나 우선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2, p.107). 이 진술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저자들은 게쉬탈트 법칙이 때로는 적용되지만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의 법칙에 예외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근본 영역에서의 법칙의 효과는 한층 포괄적인 영역에서의 효과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것일까?
나의 견해로는, 여기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들은, 지각이란 그 생물학적 맥락 속온라인 카지노 게임 고찰될 필요가 있는 하위적 전체인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게쉬탈트 법칙은 일체의 법칙이 그렇듯이 예외없이 적용된다. 그러나 그런 표명은 가끔 수정된다. 전통적으로 지각은 고립된 감각기관의 메카니즘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런 것대로, 그것은 자극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될수록 그만큼 정확하게 작용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항구적인 시각, 소음, 후각은 그 인식을 저하시킨다. 감각기관의 전기화학적 반응은 자극이 변화하지 않는 채로 있으면 저하된다. 우리들이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시각에 필요한 빛에 민감한 물질이 급속하게 소비되어감을 눈의 잔상현상이 보여준다. 어떤 색채면에 눈이 고정되면 그 현상이 표면은 이내 색이 퇴색해서 보이게 된다. 이들 사실은 그 유
기적 조직체가 끊임없이 환경에 반응하도록 장비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지각은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되는 사건, 즉 어떤 변화의 탐지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생물학적으로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필요하며 또 실제로 위험하다.
그러나 반응의 감퇴는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아니다. 흥분 상태의 결여는 마음 자체의 내부 원인으로 생기는 일이 있다. “포화 상태"에 관한 연구가 밝혀준 바에 의하면, 인간이 단조로운 작업을 강요당한다고 하면 그는 무관심이라든가 망각과 같은 책략을 사용해서 그것을 피하면 될 뿐 아니라, 또 그 작업을 변화시킨다든가, “전체의 해체 (지각적인 결합과 행동의 결합의 양쪽)" (3, p. 254)에 의해서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사꾸라바야시의 고찰은 단순한 지각상의 자극온라인 카지노 게임 다양성을 끄집어내는 마음의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림 36f온라인 카지노 게임 불완전한 프로펠라형이 나비의 형으로 변형되고, 그럼으로써 패턴은 그것의 축과 부분들의 모든 상응도를 변화시켰다. 이와 같이 <그림 36b온라인 카지노 게임도 부채꼴의 세 개의 각 부분은 동시에 또는, 따로따로 두 개의 날개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는 축의 기초의 기능을 띠고 있다. 그와 같은 재구성은 지각적 경험을 신선하게 하며 관심을 되살린다.
그 가장 초보적인 기능에 있어서조차도 마음은 싫증나게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 반응은 단순한 도피는 아니다. “좋은 게쉬탈트”의 싫증나는 외관온라인 카지노 게임 도피함과 동시에, 마음은 적극적으로 자극을 주는 제2차적 특질을 탐색한다. 자발적으로 보는 것보다도 더 오랫 동안 대상을 억지로 강요당해서 보게 되어도, 마음은 그 호기심과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힘을 발동시킨다. 지배적인 구조의 폭력온라인 카지노 게임 해방되어 이미지는 숨겨진 가능성, 보통 보여지는 형온라인 카지노 게임 벗어나서 나타나는 측면을 생산한다. 독창적이고,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개념화가 나타난다. 그 과정의 초기단계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이들 변화에 필요한 자극은 인식 수준 이하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견해는 수동적인 관찰자에게는 놀라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자발적인 변화가 끝장이 나게 되고 단조로움의 위협이 지속되게 될 때, 반응은-사꾸라바야시의 보고에 의하면ㅡ의식의 역치상(闕値上)에 올라가며 사람은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발견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꾸라바야시가 자기의 발견 내용을 검토할 때 창조적 과정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세잔느나 로댕 등의 예술가의 제작 태도에 관한 메모에서, 본 것을 그리는 데 열중하지 않고 오히려 대상을 바라보는 데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오랜 시간을 바라다 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쉬탈트의 붕괴에서 이익을 얻고 있었을까? 결국은, 세계에 대한 평범한 견해에서 "독창적인” 패턴을 끄집어내는 일, 관습적인 결함을 느슨하게 풀어헤치는 일, 일반 사람에게는 대상이 갖고 있는 익숙한 시각과 타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시키는 일이 그들 예술가의 일이 아니었겠는가? 이것은 매우 유혹적인 아이디어이다.
오랫 동안 바라본다는 현상은, 겸손하게든 당당하게든, 어느 쪽이든 그것은 창조성에 관련된다. 그것은 창조의 준비단계를 용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혜라고 볼 수가 있다. 아니면 더 야심적으로 창조적인 사상가, 예술가, 또는 과학자가 세계를 향해서 대결할 때 생기는 것의 본질적 요소를, 단순한 조건하에서 보여주는 모든 창조과정의 소규모의 모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장시간에 걸친 탐색에 의해서 야기되는 변환은, 창조성으로 알려진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경우 창조자의 실제의 "작업"은 그 탐색하는 동안에 그에게 허락된 계시를 적기만 하면 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려질 대상 또는 해석될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조는, 모든 제작 단계에서 작품 자체와 함께 일체의 창조의 본질적 요건이다. 그러나 초심자, 아마추어, 3류예술가는 가끔 그것을 무시한다. 모든 원시적인 창조자조차도 습관적으로 그 날의 일을 끝마쳤을 때, “그것이 좋았다는 것을 보았던”것이다. 그와 같은 살피기가 전체적 패턴과 그 부분을 재구성할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그와 같은 것에 대한 여러가지 관계, 그루핑 또는 시사점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발견물은 창조적인 사색자로 하여금 세계의 "정상적인” 견해에서 분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시각예술에서는 예를 들면, 정상적인 견해는 본질적으로 다음 네 가지 종류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a) 지각에 미치는 구조적으로 가장 단순한 견해를 강요하는 좋은 게쉬탈트의 법칙, (b) 과거의 경험에서 관찰자가 잘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형, 색채, 비례, 크기의 기억, (c) 대상이 갖는 실제적 기능에 의해서 시사된 개념, (d) 문화, 특히 시각예술 속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견해와 표현 방법.
정상적인 견해는 예술가에게도 작업의 기초 및 규준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적 성실성에서 그 대상이 자기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표현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우위에 설 수는 없다. 미술 교육자는 지각과 표현의 관습적 규준을 타파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열심이다. 일체의 교본을 교실이나 미술실에서 추방하거나, 잠시 동안만 그것을 보이지 않는 교사도 있고, 눈가림이나 캄캄한 방을 사용해서 전혀 눈을 쓰지 않게 하고, 기억과 근육적인 자극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도 있다. 그와 같은 방법이 관습의 껍질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조용한 관조에는 미치지는 못한다. 이 관조는 예를 들면, 고전적인 동양미술에서 실천되고 창조된 제작 절차이다. 그러나 관조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문명의 어떤 종류의 약점을 지탱하기 위해서 오늘날 가끔 잘못 해석되고 있다. (a)현대의 "소비자 심성"은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인간은 수용자로서 행동하며, 세계가 그에게 강요하는 것으로부터 지시를 받아들인다.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화를 필요로 할 때 독창성이라든가 진보를 위해서-그는 그와 같은 변화가 외부 환경, 즉 지각된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의해서 나타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또는 무의식적으로 발생되는 영감의 저장고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허용된다면 우리들은 관조를 순수하게 수동적인 활동으로 보아야만 한다. (b) 우리들은 성공이란 경쟁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성취된다고 배워 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창조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독창성은 저 깊숙이에 있는 근원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그 경쟁상대와 표면적으로 구별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곡해되고 있다. 따라서 관조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편차를 포착하기 위한 테크닉이 된다. (c) 지금까지 이어져온 완고한 “소박한 사실주의”는 세계를 처리하는 일이란 객관적 데이타를 기록하는 것, 또는 조작하는 일이라고 믿게 해왔었다. 학습이란 사실의 축적을 의미하며, 이들 사실을 관념 연합에 의해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사고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연합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미술이론에서는, 미적 이미지란 그 지시 대상의 충실한 묘사라고 보는 전통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취향, 미 또는 본질성의 일정한 규준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부터 끄집어낸 부분의 선택이고, 또는 지시 대상의 모든, 또는 일부의 대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신해서 다음과 같은 반대 견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a) 참된 관조는 단순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행위이다. 사꾸라바야시의 실험에서조차도 자극 양식의 변형은 수동적인 관찰자에 충격을 주고, 존재의 외적인 세계의 변화를 부여한다. 실제로 그것들은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대상에 오랫 동안 주의를 기울여온 마음 쪽에 생기는 보호 작용의 결과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자극을 변용시키려고 하는 능동적인 시도는 강제적인 상황이 계속되는 관찰자 자신에게 의식된다. 나는 우리들이 “탐색적인 행동”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점에 대해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사람이 진실로 관조할 때에는 의문을 갖고 세계에 접근한다. 그리고 그 세계란 기본적 기하도형과 같은 것이 아니고, 그 신비로운 복잡성에 의해서 마음을 매혹하려는 그와 같은 세계인 것이다. 예술가는 “이 삶의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가시적인 해답을 탐구하면서 그의 모델을 본다. 더욱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는 현실의 배치와 과정에 대한 지각 가능한 직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관조는 일반적인 “목격자”의 태도와 닮지 않았다. 그것은 탐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대해서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매우 많은 예술가와 예술을 공부하는 학도는, 그들이 예술가가 되려는 희망이, 처음부터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심오한 욕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보는 대상, 만드는 형을 앞에 두고 전혀 손을 쓸 줄 모른다. 한편 관조는 그것이 면접이 아니고 대화를 이끄는 대상에 의해서 인정을 받는 관중이란 점에 대해서 목적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과 다르다. 대상에 몸을 내맡김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으로 하여금 발언하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b) 창조적인 인간은 남과 다르기 위해서 정상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에서 떠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상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데 대한 자기의 판단기준에 따라서 대상을 꿰뚫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 통찰의 과정에서 그는 가끔 무의식 속에서 정상적인 견해를 포기한다. 피카소가 자기의 일을 "일련의 파괴"라고 말할 때, 그는 확실히 추구가 요구하는 긍정적 파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지기 위해 달라지려는 욕구는 위기이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을 피하려는 충동은 사꾸라바야시의 실험에서처럼, 상황에 내재하는 사건의 병리학적인 상태에서 오거나, 또는 프로이드가 예술가에게 부여한 신경증 환자의 “도피 메카니즘"에 내재하는 병리학적 상태의 어느 쪽에서든 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암시 풍부한 광경을 눈으로 보고, 정말로 창조적인 인간은 거기서부터 도피하려고 하지 않으며, 거기에 향해서 그 속에 파고들어가려고 한다. 관조는 예술가로 하여금, 예술가에게도 대상에게도 해당되는 그런 종류의 진리를 목적으로 해서 대상의 잠재력의 분석을 하게 한다. “시간과 반성은 서서히 그 관중을 변화시키며, 드디어 나는 이해하기에 이른다”고 세잔느는 사꾸라바야시가 인용한 글 속에서 말하고 있다.
(c) 인간의 마음이 현실을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은 현실의 복제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의해서 암시된 특정의 질을 만들어주는 패턴을 창조한다. 예를 들면, 과학적 진술은 일정한 특성을 구체화하는 하나의 모델이다. 마찬가지로, 회화적 진술의 가장 간단한 예에서, 우리가 인간의 얼굴을 원으로 표현할 때, 우리들은 그 얼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연필의 선이라는 매개물로 입수할 수 있는 둥근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얼굴의 둥글음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의 관조는 그 성분과 그것들의 가능한 조합의 검토가 아니고, 오히려 그 관찰자가 매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카테고리를 시험해보는 일인 것이다. 창조성의 이와 같은 측면은 이른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준비된”, 이미 형성되어 있는 단순한 기하 도형의 지각에서는 그리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이 갖는 싫증나는 복잡한 외관이, 관찰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될 때 가장 뚜렷해진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게쉬탈트의 성격과 기능을 아주 불확실한 빛 속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나는 어떤 조건하에서 좋은 게쉬탈트가 분해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실험을 인용했다. 그후 나는 "정상적인 견해"를 확립하며 예술학도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요소 중의 가장 단순한 전체 구조의 지각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내가 게쉬탈트적 접근을 “자극 지향”이라고 불렀을 때, 나는 창조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기술된 수동성이란 점을 은근히 비난한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사꾸라바야시의 관찰이 간단히 게쉬탈트 원리의 붕괴를 보여준 것은 아니란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보통 볼 수 있는 패턴의 전체적 체계가 오랫 동안 바라봄으로써 분해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해서 나타나는 형을 검토해보면 그것들은 각 요소의 제멋대로의 조합이 아니고, 전체의 형태가 방해를 받는 순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가능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구조적으로 단순하며 거의 대칭적인 도형들이다. 다시 말하면, 게쉬탈트 법칙은 상황에 의해서 강제된 한계 내온라인 카지노 게임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온전치 못한 정신이 잘 조직화된 전체로서 작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병의 압력하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용할 수 있는 최선의 구조를 받아들일 때에, 심각한 병리적인 상황하온라인 카지노 게임 일어나는 사건을 상기하게 된다.
가장 단순한 구조에 따라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시각 형태가 우리들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부분의 사물의 물리적 구조에 매우 가깝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상을 충실하게 또 정당하게 다루는 힘은 초보적인 감각적 적응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일 뿐 아니라, 또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에게도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 대한 초보적인 감각적 반응조차도 수용메카니즘의 조건의 속박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들이 유기적 척도를 올라갈수록 수용하는 용기의 형을 서서히 무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 인습적인 규준과 선택, 신뢰와 기대, 욕망과 공포-모두 창조적인 마음이 품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나 또 그 속에 결함도 있다.
"특히 예술가와 그의 세계와의 만남은, 그 성과가 다음 세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언제나 고도의 긴장이 따른다. 첫째, “사실, 즉 정상적인 견해를 정당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또 창조자의 특정한 세계관에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째, 매우 복잡한 조건 설정에 대신해서 입수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가능한 구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불만족스러운 채로 작품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그들 속에서 우리들은 객관적 세계의 특징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든가, "또 그 세계에 적용된 개념이 약하다든가 왜곡되어 있다든가, 또는 하찮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쪽의 요구를 합치시키기 위한 구조는 진술을 이해 가능하게 하고 강력하게 하는 데 필요한 통일성, 명확성 그리고 힘을 결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게쉬탈트 구조는 지각이 실험실의 눈가림에서 해방될 때라도 결코 무너지는 일이란 없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관조에서 생기는 이미지와 창조적인 작업 속에서 구체화된 이미지가,
의미와 힘을 가지려 할 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정열이 식어버린 관찰자가 보는 기하학적인 양식이 갖는 단세포적인 단순성을 유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세계의 복잡성과 마음의 복잡성과를 결합시킨다는 과제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형태에 의하여 조직화된 사치라는 고도의 단순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이 고도의 단순성은 감각의 산물이라고 해서 간단히 다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예술비평가들이 즐겨 인용한 장자(莊子)의 “화가는 옷을 벗고 가부좌를 한다”라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는 자유와, 훈련된 집중력의 융합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