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을 믿는 일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 ‘열보다 큰 아홉’이라는 이문구 작가의 수필을 함께 읽었다. 보통은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열을 더 사랑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하나 부족한 ‘아홉’을 더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홉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나머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어른들은 이미 꽉 찬 ‘열’이고, 청소년들은 채울 가능성이 많은 ‘아홉’이라 덧붙인다. 그러니 청소년들은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나머지를 채울 가능성을 믿으라며 글을 맺는다.
이제 막 ‘청소년’이 된 중학생 아이들에게 물었다. “중학생 되니 좋지 않아? 초등학생때랑 대접이 다르지 않나?” 돌아온 의외의 대답. “초딩은 귀엽기나 하죠. 중딩은 왠지 ‘말썽쟁이’라고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요.”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마음이 살짝 씁쓸해졌다. 단지 몸집이 조금 더 커졌다는 이유로, 혹은 아직 어른보다 행동이 서툴다는 이유로 이 아이들을 ‘문제’로 보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이 “중딩은 사람들이 사고 치는 애들로 봐요”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괜히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를 안다고 너무 쉽게 단정하는 모습들이 겹쳐졌기 때문일까.선생님은따분한 사람이고, 결혼한 여자는 목소리가 크고,나이든 사람은디지털기술에 약하고, 아저씨는 국밥만 좋아할 것 같다고 정해두곤 하는 시선들처럼. 어느새 그 사람 자체는 사라지고, 우리가 붙여 놓은 이미지만 먼저 떠올릴때가 많지 않은가.
내가 사는 아파트 단톡방에서 나왔던 얘기가 생각난다. 하원한 유치원 카지노 게임, 초등 저학년 카지노 게임에게 위협이 되니, 큰 카지노 게임은 어느시간대에 놀이터에서 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이었다. 중학생 아이들이 밤 9시에 모여 큰 소리로 논다며 “쟤들은 집에 안 가냐”는 말도 있었다.그 늦은 시간이학원끝나는 시간이라는 걸 모르는 어른들이겠지.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에서 놀아야 하나. 허구한 날 PC방이나 노래방에 간다고 하면 그건 또 문제 삼을 텐데. 학원 끝나고 잠깐 놀이터에 앉아 친구와 젤리 까먹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 아이들에게는 어디에 설 자리가 있는 걸까.
물론 말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몸집은 어른만큼 자랐지만 아직 마음은 미완성인 아이들. 여럿이 모여 큰 에너지를 내뿜을 때, 낯설고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은 더 어린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해 떨어진 시간 집에 가지 않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도 다 좋은 어른의 마음이리라.훌쩍 커버린 그 몸 안에는 아직 자라고 있는 마음과 가능성이 있다는 걸, 누구나 쉽게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아직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 시기를 헤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지은 죄 없는 죄인 얼굴로 하소연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네 천덕꾸러기 소리 듣느라 힘들었구나. 너희들을 잘 몰라주는 어른이어서 미안하다. 그래 맘먹었다. 오늘은 부러 큰 소리로 아이들 편을 들어준다.
활동의 마무리. ‘청소년인 우리’를 어떻게 표현해 볼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소년은 스마트폰이다.’처음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맞는 앱으로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라는 의미란다. (시대에 딱 맞는 비유네.) 또 하나는 ‘청소년은 연필과 지우개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울 수 있고, 채워야 할 것은 연필로 잘 쓸 수 있으니까. (카지노 게임이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를 아는 걸까?) 그리고 ‘청소년은 주식이다’. 투자에 따라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주식하니?) 마지막으로 ‘청소년은 솜사탕이다’. 아주 조금의 설탕 가루가 부풀어 올라 솜사탕이 되듯 몸과 마음이 커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말하는 아이의 얼굴이 핑크빛 솜사탕을 든 듯 행복해 보인다.
이런 훌륭한 학생들을 보았나. 너네 누구한테 이렇게 잘 배웠니? 역시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남는 장사다.“여기 영화배우 될 사람도 있겠지? 선생님이 갑자기 5년 뒤에 유명 아이돌이 되는 것보다는 가능성 있잖아?”라는 너스레까지 양념으로 더해본다. 이어지는한 아이의 말.
“쌤 미스트롯 나가세요. 제가 투표할게요!”
마음은 고맙다만, 사실 내 취향은 스트릿우먼파이터 쪽이란다. 속으로만 말했다.
‘아이들이 가진 커다란 가능성’,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미래’에 반해서 중학교에 남았던 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당장 고등학교로 도망가자’라는 결심을 잊었던 그 순간처럼, 오늘 아이들은 또 내 마음을 흔들었다.
고단한 날이 오면, 오늘의 이 말들, 이 표정들, 이 웃음들을 꺼내 보자. 네 안의 가능성, 그리고 아직 채워가는 나의 하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