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학교 가기 전, 아침 8시 10분, 딸과 나 둘이서 아침식사를 한다.
"딸아, 오늘 날씨가 추워. 어제 저녁이랑 같은 거 먹어도 될까?
"응, 좋아요!"
"계란 프라이는 터? 안터?"
"안터!"
'역시 우리 딸은 안 터지는 완숙을 좋아한다니까'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보라색 쟁반을 꺼내 놓는다. 오목한 국그릇에 밥 한 술을 떠 담고 방금 데워 따뜻한 배추 된장국을 붓고는 딸의 핑크색 수저를 꽂아둔다.딸이 제일 좋아하는 시금치나물을 아주 작은 접시에 담고, 투명한 유리컵에 보리차를 따른 후 딸에게 쟁반을 내어준다. 오늘 딸을 위한 아침이다. 장에 좋은 유산균과 키 크는 코코아맛 영양제도 잊지 않는다. 때마침 '안 터'지는 계란 프라이도 다 되었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다. 아침에 먹는 된장국이 참 따뜻하고 든든해지는 계절이다.
"딸아, 오늘도 진 온다니?"
"응, 오지 말라고 했는데, 또 온대."
"그 친구 무료 카지노 게임에 단단히 빠졌네, 참 정성이다. 엄마는 진이 마음에 들어."
엄마는 딸이 지극정성으로 무료 카지노 게임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아침부터 마음이 흐뭇하다. 진은 딸의 남자친구다. 진은 같은 반 친구인데 딸보다는 키가 조금 크고 딸처럼 말랐으며 얼굴도 작은, 호리호리 날씬형의 12살 어린이다. 난 때론 이 어린이를 청년같이 느낀다. 뭐랄까. 12살 어린이의 무료 카지노 게임 표현 방식치고는 좀 놀라운 데가 있다.
진은 아침 8시 5분에 자기 집에서 출발하여 우리 집 앞에 8시 15분에 도착한다. 딸은 진이 집에서 출발할 때쯤 겨우 일어나 고양이 세수로 눈곱을 띠고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한다. 딸은 8시 30분이 넘어서야 학교 가라고 울리는 알람 소리를 끄며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진은 10분이면 학교에 가는 거리를 우리 딸과 10분 같이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자기 동네를 삥 돌아 느지막하게 나오는 우리 딸을 기다려 40분이나 걸려 학교에 간다. 진은 딸에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딸을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우리 딸 늦게 나오는데 좀 천천히 와도 되지 싶은데 이 청년은 마음이 급한가 보다. 난 이런 진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러워 딸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채근한다. 딸이야 본인이 늦게 일어나 늦장 부리다 학교에 지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진은 등교 1시간 전에 집에서 나와 날씨도 추운데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난 엄마 마음이 되어 이 어린이를 걱정한다.
"딸아, 진은 원래 부지런한 친구지?" 그러기를 바랐다.
"아니, 나보다 5분 정도 먼저 학교에 올걸, 어쩌다 등굣길에 마주친 적도 많았고."
"아, 그렇구나!" 괜히 물어봤다. 이 어린 청년에게 더 미안해진다.
"딸아, 밖은 추우니 진한테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들어와서 로비층에서 기다리라고 해."
"응, 그래서 비번 알려줬어."
"어, 잘했다." 나는 "진은 참 대단해! 이건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이야. 엄마는 진이 어린이가 아니라 청년 같아. 우리 딸이 좋은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엄마는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니 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치 그 미소는 자기는 원래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처럼 보인다.
진이 딸에게 지극정성으로 잘한다 해도 그렇다고 딸은 진이 베푸는 사랑에 목 매지도 않는다. 진이 잘하면 잘 하든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딸은 별 미동이 없다. 그건 딸이 워낙 자기의 감정을 다 드러내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우리 딸의 내면에 이미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딸의 마음에는 여유가 있다. 여유 있는 자는 사랑에 구걸하지 않는다. 구걸할 필요가 전연 없다. 구걸하지 않으니 상대도 부담이 없다. 진은 그저 자기의 마음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갈데 같은 여자친구의 마음에 휘둘려야 하는 의무가 없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둘의 사이가 여유가 있고 편안할 수밖에 없지 않나. 사실 난 아침마다 둘이 학교 가는 모습을 몰래 창문 밖으로 지켜보곤 하는데 '코로나 시절 거리 두기도 아닐 텐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둘이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딸에게 "내년에 진이랑 다른 반이 되면 아쉬워서 어떻게, 진이 혹시 다른 여자친구를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라고 물었더니 딸은 그럼 그냥 헤어지면 된다고 대답한다. 이리 쿨할 수가 있나. 이미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런저런 이별의 아픔을 보고 자란 어른은 앞서 괜한 걱정을 한다. 내가 21살일 때, 같은 학과에 좋아하는 남자애랑 잠깐 사귄 적이 있었는데, 군대 간다고 헤어지자는 그 친구를, 지지리 궁상으로 잡고 그랬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는데, 그때 난 사랑이 없었다. 사랑이 고팠다. 내 안에 사랑이 없으니 여유가 없었던 거다. 그런지도 모르고 난 그 친구에게 꽤 매달렸었다. 그 시절 난 그렇게나 쿨하지 못했다.
그랬던 나와는 달리 이제 12살 우리 딸은 여유 있게 사랑할 줄 안다. 자기의 마음에 충실할 줄 아는 그 어린 청년도 참 멋지다.
얼마 전에 나는 "우리 딸, 무료 카지노 게임받고 있네." 하니,
딸은"이미 엄마 아빠한테 충분히 무료 카지노 게임받고 있는데!"한다.
딸은 안다. 자기는 마땅히 사랑받을만한 아이라는 걸.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진다는 걸.
오늘은 이 귀여운 12살 커플이 100일째 되는 날이란다. 날도 추운데 따뜻한 장갑 하나씩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