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카지노 쿠폰석방. 구국의 결단인가? 최악의 한수인가?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휴전조건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때까지 한국정부는 유엔군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진전이 있을 때에는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다.
포로 교환을 위한 논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 측의 휴전반대운동도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없이 휴전회담 대표들은 1953년 4월 10일 휴전을 요구하는 국제정세에 밀려 제네바협약 제109조에 따라 병약 및 부상포로들의 교환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열망에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의 의지를 내세웠다. 4월 27일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다.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고, 이에 한국측 대표는 회담 참석을 거부했다. 국민들은 휴전 반대에 적극적이었고 이승만의 휴전반대, 북진통일 정책은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하여 온 반공포로의 석방이 단행되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반공포로들은 거제리 수용소, 가야리 수용소, 광주 수용소 등 총 8개 수용소 총 인원 35,698명 가운데 27,388명이 탈출하였다. 반면 56명의 포로들이 탈출과정 중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국민들이 이승만을 절대 지지하며 충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열강들은 그러지 않았다.
일단,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자 자다가 일어나 분통을 터트렸으며, 영국 처칠은 면도를 하다가 베기까지 하였다. 중국은 미국과 짜고치는거라 여겼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한국에 일격을 가해 마지막 남았던 남한의 영토를 빼앗아 현 휴전선 경계를 구성하며, 남한 단독의 힘으로는 통일 못함을 무력적으로 보여주었다.
처칠은 아이젠하워에게 이승만 제거를 요청하였고, 아이젠하워 역시도 적이 하나 생겼다고 여겨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한국이 한국전쟁 휴전협상의 당사자국임에도 불구하고 배제된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반공포로석방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반공포로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억지로 끼워맞춘 경향이 강하다. 둘은 연관성이 크게 없다.
도리어, 반공포로석방으로 영,미로부터 배신자 낙인을 받아 전후 경제적 지원의 약속이 깨어지고 지원이 되지 않아 경제가 바닥을 치고 이승만 지지도가 떨어졌을때 영,미는 이승만의 도움을 거절하였고 이로인해 궁극적으로 이승만 하야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다.
그럼, 저 풀려난 포로들은 어찌 되었는가? 이승만이 국군에 강제 편입시켰고 (여러 혜택을 준다고 하여) 저들중 일부는 북한의 간첩 역할을 자임하기도 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북한군이라는 낙인하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한직을 떠돌게 된다. 그들의 자녀들 역시도 똑같이 낙인을 받아 2000년도에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구국의 결단이었을까? 최악의 한수였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양편에서 현재까지도 논란중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시킨 날이 1953년 6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