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정복과 노르만 왕조,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정복, 영국사의 새로운 시작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국왕으로 등극하여 노르만왕조를 개창한 소위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은 유럽사의 중대한 변곡점이다.
역사상 자주 있는 일이지만, 국왕이 왕위 계승자를 낳지 못하면 복잡한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11세기 초 잉글랜드의 고해왕(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바로 그런 사례다.
* 에드워드 참회왕(라틴어: Eduardus Confessor, 영어: Edward the Confessor, 1003년 ~ 1066년 1월 5일)는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의 왕이다. 1013년 당시 덴마크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좌를 차지하자,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노르망디 지방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두터운 신앙심을 당시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1042년 그의 이부(異父)형제 하레크누드가 죽자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노르망디 망명 도중 그는 하느님에게 자신이 다시 왕위를 회복하게 된다면 로마를 순례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는 즉위 이후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로마 순례를 추진하였는데 당시 정국이 안정되지 못했음을 들어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를 반대하게 되자 당시 교황 레오 9세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교황은 로마 순례 비용으로 수도원을 짓고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권하였고, 왕은 이에 따라 성당 부속으로 있던 수도원을 증축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한 명은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 그의 할아버지 크누트(Cnut)는 한때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 왕위를 모두 차지하여 일명 ‘북해제국’을 창건했는데, 손자인 하르드라다가 지난날의 왕위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다른 한 명은 웨식스 백작 해럴드(Harold). 국왕의 처남카지노 게임 추천서 강력한 권력을 가졌고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서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또 다른 한 명은 노르망디 공작 기욤Guillaume(기욤의 영어식 발음이 윌리엄William이다). 에드워드 고해왕은 1051년에 종질(사촌 형제의 아들)인 기욤에게 자신의 사후 국왕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차기 왕권의 행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난다. 1064년 혹은 1065년, 국왕 에드워드가 해럴드를 노르망디 공작 기욤에게 사절로 보낸 것이다. 해럴드는 기욤에게 여러 성물(聖物)을 걸고 기욤의 왕위 계승 권리를 존중한다는 서약을 했다.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서약까지 한 해럴드는 얼마 후 국왕이 사망하자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1066년 1월, 국왕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해럴드가 왕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해 여름, 하르드라다가 먼저 출병하여 잉글랜드 북부 노섬브리아에 침입해서 요크를 점령했다. 해럴드는 그와 대적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카지노 게임 추천 진군했다. 9월 25일, 요크 근처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에서 전투를 벌여 해럴드의 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하르드라다는 전사했다.
그러는 동안 노르망디에서도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기욤으로서는 우선 바다를 건널 함대가 필요했다. 바이킹의 전통이 아직 살아 있던 터라 단 몇 달 만에 에스네크esneque(바이킹 선박의 한 종류) 1,000척을 건조했다. 그리고 프랑스 각지에서 원정에 참여할 기사들을 모았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종교적 정당성이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기욤은 교황청에 호소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제 노르망디 군은 ‘베드로의 깃발’을 들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니, 일종의 십자군 모양새까지 갖춘 셈이다. 해럴드는 성인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고 부당하게 왕권을 찬탈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마침 적당한 때에 하늘에서 해럴드를 응징하리라는 징조도 나타났다. 4월에 갑자기 나타난 혜성은 해럴드에게 악운이 끼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600년이 지난 18세기 초에 가서야 이것이 75~76년 간격카지노 게임 추천 나타나는 핼리혜성카지노 게임 추천 밝혀졌다.
기욤의 군대는 9월 28일 잉글랜드 남부의 페번시(Pevensey)에 상륙했다. 사흘 전 북쪽 지방에서 하르드라다와 전투를 마친 해럴드의 군대는 서둘러 남쪽카지노 게임 추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니 병사들이 지쳐서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월 14일 헤이스팅스(Hastings) 근처에서 일어났다. 하루 종일 지속된 전투는 해 질 녘에 결판이 나서, 기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고 해럴드는 전사했다.
이해 크리스마스에 기욤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 왕카지노 게임 추천 추대되고, 노르만왕조(Norman dynasty)를 개창했다.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동시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되었으며,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 재위 1066~1087)’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 시대의 사정을 소상히 기록한 잉글랜드의 수도사이며 연대기 작가인 오드릭 비탈리스(Orderic Vitalis)는 꽤 신랄한 글을 남겼다. 크리스마스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이 왕위에 오를 때 런던이 불길에 휩싸였는데 이는 윌리엄이 악마가 보낸 인물이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1087년 프랑스 도시 캉(Caen)에서 윌리엄의 장례를 치르는 날 다시 그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으니 불지옥에서 온 자가 불지옥으로 돌아가는 징표라는 식으로 말이다.
노르망디 공작이 동시에 잉글랜드 국왕이 됨으로써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역사는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기욤과 그 후계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충성해야 하는 신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동렬의 왕이다. 잉글랜드는 오랫동안 유럽대륙의 역사에 결부되었다. 잉글랜드가 대륙에 있는 영토를 정리하고 문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것은 백년전쟁(1337~1453) 이후의 일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노르망디의 바이외 박물관에 소장된 태피스트리는 노르만 정복 사건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시각 자료다. 길이 약 70미터, 높이 50센티미터의 거대한 크기에 그림을 수로 놓은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태피스트리(벽 가리개)가 아니라 자수 작품이다.
오랫동안 윌리엄(기욤)의 부인 플랑드르의 마틸드가 만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아마도 노르만 정복 직후 윌리엄의 배다른 형제였던 바이외의 주교 오도(Odo)의 주문으로 바이외 수녀들이 1066년부터 1077년 사이에 잉글랜드 남부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077년 완공된 바이외 성당에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 성당에서는 평소에는 태피스트리를 말아서 상자 속에 보관하다가 축일에 가지고 나와 벽에 걸어 전시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사용된 그림과 문자 배치, 이야기의 전달 방식, 동물 삽화를 넣었다는 점 등은 당대 북유럽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2007년에는 프랑스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프랑스 바이외의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잔혹한 정복에서 관대한 융합카지노 게임 추천 나아간 노르만왕조
강력한 무력으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하더라도 정복왕 윌리엄의 입지는 아직 불안정했다. 잉글랜드인들은 이웃 나라에서 쳐들어온 무도한 인간들에게 지배받게 된 데 분개해 수년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윌리엄을 따라 잉글랜드로 들어온 프랑스계 기사는 1만 명이 채 안 되었으며, 이 소수 인원으로 200만 명 가까운 잉글랜드인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윌리엄은 약 20년 동안은 무자비한 방식카지노 게임 추천 지배 체제를 구축해 갔다. 우선 구귀족들을 몰락시켰다. 윌리엄은 우선 해럴드 왕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땅을 몰수했다. 이처럼 원래의 지주층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과정이 지속된 결과, 약 150년 후에는 토지 소유주 가운데 윌프리드, 애설스턴 같은 기존 주민의 이름은 거의 사라지고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 같은 프랑스식 이름이 80퍼센트 가까이 늘어났다.
모든 요직은 노르만인이 독점했다. 정복 후 반란이 극심한 수년 동안은 궁정이나 교회 요직에 잉글랜드 선주민들을 임명하거나 그들의 직위를 유지시키는 등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가 지났다고 판단하자 윌리엄은 곧바로 이들을 해임하고 노르만인들로 교체했다. 예컨대 정복 이전부터 캔터베리 주교였던 스티건드(Stigand)의 경우 1070년 직위를 박탈해 투옥하고, 그 대신 캉에서 랑프랑(Lanfranc)을 불러와 임명했다.
또한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하고자 대민 감시용 성을 쌓았다. 일반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릉이나 평지에 인공 축토를 쌓고 그 위에 성을 축조했다. 유럽의 성은 모두 돌로 짓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세 초기의 성은 대개 목제였다. 윌리엄은 이렇게 축조한 성들에 왕실 수비대를 주둔시킨 반면, 다른 영주들에게는 성의 소유를 금지했다.
새 왕조는 각종 봉건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소득을 올렸다. 신하들이 소유지 변경과 상속 때 납부하는 부과금, 영주가 딸의 결혼이나 아들의 십자군 참가 시 내야 하는 헌납금 같은 것이 그 예다. 윌리엄 치세에 모든 국민에게 빠짐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전국의 토지 및 재산 현황을 대단히 꼼꼼하게 조사한 자료가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이다.
윌리엄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귀족들을 위원카지노 게임 추천 임명하여 전국을 순찰하며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를 얼마나 철저히 수행했는지 조사 보고서 이름('최후의 심판일 장부')은 마치 최후의 심판 때의 판결처럼 어떤 속임수나 변경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내용을 보면 지극히 엄밀하게 조사했음을 알 수 있다.
"서리Surrey주 림프스필드의 영주 직영 농지는 쟁기 5개, 소 5마 리, 농노 15명, 날품팔이 농부 6명, 공유 쟁기 14개, 연 2실링 수 입의 물방앗간 1개소, 양어장 1개소, 교회당 1개소, 목장 4에이커 돼지 150마리의 숲(당시 숲 크기는 돼지 몇 자리를 칠 수 있느냐로 졌다), 연 2실링 수입의 채석장 2개소, 매의 집 2개, 노예 10명이 있다. 영지 수입은 에드워드 국왕 당시에는 연 20파운드, 그 후에는 15파운 드, 현재는 24파운드이다."
이 자료를 통해 1086년 당시 영국 인구는 150만~200만 명이며, 그중 노예가 10퍼센트일 것카지노 게임 추천 추산한다. 이런 정도로 자세한 조사사업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다시 가능해진다.
이처럼 강력한 왕권이 자리 잡은 결과 영국 국민은 자유를 빼앗기고 완전한 억압 상태에 빠졌을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카지노 게임 추천 보면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강력한 왕권이 안정적카지노 게임 추천 유지되자 이것이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일단락되자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민중들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왕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했다.
[영어의 변화]
프랑스어의 한 갈래인 앵글로노르만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인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자 언어상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고대영어, 즉 앵글로색슨어는 이 시기에 상류계급언어인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세영어로 변화해 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어 단어가 영어로 들어왔다.
특히 지배층 과 관련된 단어 중에 프랑스어 계통의 단어들이 많다. 궁정 cour-court, 왕관couronne-crown, 자문위원회 conseil-council 등이 그런 사례다. 육군armée-army, 탑 étandard-standard 같은 군사 용어, 수도원장prieur-prior, 예배당chapelle-chapel, 미사messe-mass 같은 종교 용어도 마찬가지다. 사법justice, 감옥prison 같은 재판 관련 용어들은 아 예 철자까지 같은 형태로 영어에 들어왔다.
계급 간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는 동물과 관련된 용어 들이다. 예컨대 소는 농민들이 기를 때는 cow이지만 고기를 요리해서 식탁 위로 가져갈 때는 beef가 된다. 목축이나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은 여전히 앵글로색슨어 cow를 사용하지만 요리로 접하는 지배계층은 프랑스어 boeuf를 사용했고, 이것이 beef로 바뀐 것이다. 돼지pig; 돼지고기porc-pork, 양sheep; 양고기 mouton→mutton, 송아지calf; 송아지고기veau→veal도 마찬가지다.
노르만 용병, 시칠리아왕국을 세우다
11세기 초, 노르망디 코탕탱반도에 위치한 작은 영지 오트빌(Hauteville). 이곳 영주 탕크레드(Tancrède)는 두 번 결혼해서 15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그중 12명이 아들이었다. 많은 아들의 장래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탕크레드가 죽었을 때 세를롱(Serlon)이라는 아들이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들이 찾은 답은 이탈리아 남부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 남부 지방은 분열이 극심하여 영주들 간 전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게다가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 잡은 무슬림 세력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막심했다. 이곳 지배자들이 강력한 용병을 필요로 한 이유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노르망디 출신 기사들이 용병으로 많이 고용되었다.
하필 노르망디 사람들이 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다. 예컨대 '살레르노 전승'은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999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던 노르망디 기사들이 귀국길에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아랍 세력이 공격해 와서 성을 포위하고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살레르노 공작이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노르망디인들은 이들을 겁쟁이라고 비웃더니 아랍 인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살레르노 공작이 이들에게 남아달라고 요청하자, 자신들은 돌아가야 하지만 고향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훌륭한 기사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탕크레드의 아들 12명 중 8명이 이탈리아로 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형제들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비잔티움제국이 시칠리아를 공격한 1037년 혹은 1038년 전투다. 아랍인의 지배하에 들어간 시칠리아를 회복하기 위해 노르만인을 동원한 것이다. 이때 기욤 탕크레드는 시칠리아 회복에는 실패했으나 '무쇠 팔(Bras-de-f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슬림 전사 한 명을 한 번에 창으로 꿰 뚫는 괴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043년에 가면 이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킨 푸이아(Puelia, 풀리아라고도 한다) 편카지노 게임 추천 넘어가 비잔티움인들과 싸웠다. 용병이란 돈을 대는 편에 서서 싸우는 존재 이므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주인카지노 게임 추천 바뀌는 것이 다반사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 노르만 용병들은 돈에 대한 과도한 욕심카지노 게임 추천 악명 높았다.
'무쇠 팔' 기욤이 1046년 사망하자 그의 동생 드로고(Drogo, 혹은 Dreux)가 사업을 이어받았고, 1051년 드로고가 암살되자 다시 그 동생들인 험프리와 옹프루아가 승계했다. 칼부림 잘하는 외지인들이 점차 세를 넓혀가자 현지인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교황청은 이탈리아의 정치 균형이 깨지고, 무엇보다 교황령 바로 남쪽에 강력한 정치 군사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1053년 교황 레오 9세는 친분이 있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이 제공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용병들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그런데 노르망디 전사들이 푸이아의 치비타테(Civitate)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황을 포로로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레드의 아들 중 특히 로베르 기스카르(Guiscard, '교활한 자')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제 이탈리아 지배자들로서는 노르망디인을 축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차라리 이 강력한 전사 집단과 손잡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059년에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교황의 허락 아래 푸이아∙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고향에 남아 있던 동생들도 마저 불러왔는데, 그종 가장 탁월한 공적을 세운 인물은 막내 로제(Roge)다. 그는 아랍인들에게서 시칠리아를 되찾는 위업을 이루었다.
원래 비잔티움제국 영토였던 시칠리아는 9~10세기 동안 아랍인들의 침공에 시달리다가 965년에 섬 전체를 내주었다. 11세기에 들어서 비잔티움제국은 시칠리아 복구 전투를 벌였다. 이때 비잔티움제국 호위대로 활동하는 스웨덴계 바이킹 용사들(앞서 언급한 바랑기안 경호대)과 노르망디 용병들이 함께 싸웠다. 스칸디나비아의 한 조상에서 가지를 친 두 바이킹 후예들이 먼 이역 땅에서 만나 함께 전투를 벌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1038년에 이 공격을 주도했던 비잔티움 장군 마니아케스(George Maniakes)는 시칠리아 회복을 완수하지 못한 채 비잔티움제국 내전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이제 그 과업은 노르망디인들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1091년 아랍의 마지막 거점인 노토(Noto)를 정복하여 시칠리아를 차지했고, 로제는 시칠리아 대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로제 2세가 '이탈리아판 노르만 정복'의 대업을 완성했다. 그는 아버지와 사촌으로부터 시칠리아와 몰타제도, 푸이아 등의 영토를 물려받아 한 단위의 정치체로 만들었고, 혼란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1130년 교황 호노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인노켄티우스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가 서로 자신이 정당한 교황 후계자라며 다투었다. 로제는 이 중 아나클레투스 2세를 밀었고, 그는 답례로 시칠리아를 왕국카지노 게임 추천 승격시켜 주었다. 1130년 크리스마스에 로제 2세는 팔레르모(Palermo)에서 국왕카지노 게임 추천 대관식을 치렀다.
[팔레르모의 카펠라 발라티나]
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한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비잔티움, 유대, 아랍 문화가 들어와 섞였다. 여기에다가 11세기의 '노르만 정복'으로 북유럽 문화 요소까지 더해졌다. 로제 2세가 아랍-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랍인, 그리스인, 유대인 공동체가 계속 남아 번영했고, 이 후 다양한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로제 국왕이 걸친 망토에는 '이슬람력 528년(서력 1133~1134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정도다(이 망토는 후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식 때 사용되었으며, 현재 빈의 제국국보박물관Schatzkammer에 보존되어 있다).
한마디로 시칠리아는 문화의 용광로였다. 수도 팔레르모에는 다양한 문화 융합을 보여주는 유산들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르만 궁전 안의 카펠라 팔라티나(Capella Palatina)라는 소성당이다. 로제 2세는 즉위 후 옛 아랍 요새 위에 궁전을 짓도록 하고, 그 안에 왕실 소성당을 두었다. 이 성당은 노르만, 비잔티움, 파티마왕 조(이집트) 건축 양식이 혼재해 있다. 예컨대 황금색 나무 천장은 이슬람의 종유석(muqarnas) 디자인 양식이다. 반면 성당 내부의 지성소(sanctuary)에는 노르만 문화를 반영하는 디오니시우스 성인과 마르탱 성인이 그려져 있다.
한편,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은 구성과 주제 면에서 비잔티움 문화의 산물이다. 이 앞에 서면 마치 비잔티움제국의 어느 성당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모자이크 예수상은 서방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판토크라토 예수상(Christ Pantocrator)'이다. 그 의미는 '전능한 예수', 모든 일을 할 힘이 있으며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예수이다. 이러한 예수의 표 상은 동방정교 혹은 동방가톨릭 교회에서 더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로제 2세가 왕궁 내부에 왕좌가 있는 접견실(throne room)과 소성당을 동등한 비중으로 설치한 것은 교황청과 유럽 각국 지배자들에 자신은 이제 이 섬에 남을 터이니 누구도 시칠리아왕국에 간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