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려도...
각성은 좋지 않다
과거에 낸 책을 다시 읽으면 쪽팔린다. 하지만 이 말이 책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에는 그 쪽팔린 문장들이 책으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쉽사리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나의 손을 떠나서 다행이다. 만약 책을 내지 않고 어딘가에 써두기만 했다면 훗날 각성한 내가 삭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잊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느끼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과거에 존재했다.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문장이 강제로라도 남아있는 게 이제는 든든하다.
그러고 보면 각성이란 좋지 않은 것이다. 기억력이 안 좋고 게으른 것이 아카이빙의 차원에서는 더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자기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자주 들춰보고 각성하는 사람은 그걸 비공개로 돌리거나 심할 경우 삭제할 확률이 높다. 그 사람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난이다. 차라리 카지노 게임 사이트 올렸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으면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좋다. 없애지 말고 알아서 폐허가 되도록 기다려줄 수 있다면. 폐허는 폐허대로 멋있다.
얼마 전엔 친구와 포스타입의 금손들에 대해 얘기한 적 있다. 포스타입은 팬픽이나 만화 등 각종 2차 창작물들이 올라오는 플랫폼이다. 그곳의 금손들은 갑자기 증발한다. 증발을 예고하면 독자들이 그걸 다 저장해 두기 때문이라 한다. 불현듯 금손들은 갑자기 자기 글이나 그림이 죽도록 싫어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타 작가도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그는 자기 카지노 게임 사이트 너무 싫어하고 창피해해서 활동 기간에도 종종 카지노 게임 사이트 내리거나 없앴다. 하지만 그의 글만큼 나를 꼴리게 하고 즐겁게 하는 건 없었다. 나는 그가 장편이 아니라 단편으로 연재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는 장편을 쓰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의 글을 저장할 새도 없이 금손은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사라지는 작가들 방지 운동' 차원에서 진심을 담은 응원 댓글도 열심히 다는 편이다. 구구절절 이 글이 좋은 이유를 남기지만 그래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애정도 응원도 그 스스로의 '각성'과 ‘깨달음'을 이길 수 없을 때다. 그가 기억력이 안 좋고 게을렀다면 어땠을까. 자기가 그 글을 올렸다는 것도 까먹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변방의 독자인 내가 두고두고 행복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류문명의 기록 보존 차원에서는 각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이 글은 내 글이다?’
물론 작가는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글을 삭제할 권리가 있다. 나는 과거에 작가 사후에 글이 공개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저자의 의지에 반해 글이 공개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맥락이었다. 그런데 시인 강보원은 『에세이의 준비』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글이 영원히 미공개 상태로 남았으면 하는 마르케스의 뜻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글이 영원히 미공개 상태로 남는 게 가능하긴 한가? 텍스트가 영원히 내 통제 하에 놓여있길 바라는 건 이 시대에 불가능한 꿈 아닌가? 작가가 태초의 원고를 불태우거나 완벽하게 삭제하지 않는 한, 텍스트를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선택지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보원은 더 나아간다. ”조금 이상한 말일수도 있지만,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 같다."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 그 정도의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고, 텍스트를 써서 발표한 이상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저작권은 좋게 봐주더라도 편의상의 조치에 가깝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일 수 없'다. 사후까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텍스트가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에 그는 일침을 둔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작가적 세계라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이자 무도인인 우치다 다쓰루는 인터넷에 공개한 그의 텍스트에 관해 '저작권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작품의 관리권이 저작권자와 그 가족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인용도 복제도 자유고, 허락도 받을 필요 없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능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내 글이다’라며 저작권을 주장하고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겠지요.”
그에게 텍스트란 온전히 내 생각만으로 쌓은 것이 없기에 저작권도 모호한 것이다. 여기서 논어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 등장한다. “기술하되 지어내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의 저술이 옛일을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의 텍스트란 타인의 텍스트들의 총합이자 변용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글의 주인이 되길 포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이 쓴 것을 그대로 복사해 이름을 바꿔 발표해도 괜찮다고 선포한다. 아직 시도한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다쓰루의 이러한 시도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 글이 그렇게 까지 중요한 것일 수 없다, 어차피 나 혼자 쓴 글도 아니다'라는 태도. 내가 쓴 글에서 나 자신이 벗어날 때의 해방감. 내가 아닌 글 자체가 사람들과 만나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오케이다.
단 한 명의 독자만 있어도
결국 우린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고, 연결되길 바라기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 쓴다. 그런데 그 방식이 꼭 '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이 느낀 것을 시로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고 받는 이를 위해 시들을 조금씩 바꿨다. 에밀리가 시를 읽고 편지를 주고받는 독자는 친구들이었고, 그렇게 말할 입과 나눌 손이 없어진 사후에야 에밀리의 글은 대중에게 알려진다. 진은영은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에서 말한다. "에밀리는 시가 다른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방식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출판의 형식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는 출판 이후에 비로소 시인이 된다는 우리의 관념은 전도된 것이 아닐까 묻는다. 출판 인쇄란 시인이 없는 자리에서 시인의 말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년엔 매일 일기를 쓰는 온라인 모임에 들어갔다. 한 달간 매일 일기를 쓴 나는, 매일 쓴 일기에서 한 문장씩 모아 재배열해 ‘11월의 시’를 썼다. 처음 본 사람에겐 모호하고 불친절한 문장의 배치로만 보인다. 이 글은 나의 일상의 맥락을 켜켜이 지켜본 사람에게만 간신히 어렴풋하게 읽힐 카지노 게임 사이트다. 말하자면 이 글의 수신은 오롯이 나와 그 한 달의 시간을 함께했던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고, 이것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 시는 제한된 시간과 웹이라는 공간 속 열명 남짓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고 내겐 그것만으로도 오케이인 카지노 게임 사이트다. 시차 없이 읽어준 독자가 있었기에, 그 시는 인터넷 매트릭스 어딘가에 홀로 존재해도 외롭지 않다.
보이지 않는 서사의 아름다움
어떤 것은 일부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머무른다. 몇 년 전 나는 ‘남의 블로그에서 몰래 발견하는 인생’에 대해 카지노 게임 사이트 쓴 적이 있다. 나는 어쩌다 발견한 블로그 읽기를 매우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 글들은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지만, 누구에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유럽 단체 여행을 이끄는, 환갑이 넘은 남성의 글이 그랬다. 그는 무려 28명이 이끄는 포르투갈 여행을 아내와 기획했는데, 출발 이틀 전에 최종 숙소 확정 통보를 받을 정도로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통의 시간”을 거쳤다.
그의 포르투갈 여행기는 여행기라기보단 행사를 이끈 의전 담당자의 고군분투기와 가깝다. 그가 실시간으로 올린 글을 읽으면, 단체 여행의 시작과 끝을 짊어가는 리더의 부담이 절절히 느껴진다. 빈틈없이 진행을 하려고 했지만, 레스토랑에서 유명한 특정 음식을 주문하지 않은 그는 일행들이 더 좋아할 수 있었다며 “가슴을 치며” 아쉬워하는 섬세한 사람이다. 또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호카곶에 갔을 때에는 과거라면 당장 시 한수가 나왔겠지만 리더라는 것이 고달파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야생화 촬영이나 틈틈이 남기겠다는 인물이다.
사진으로 본 그 남성은 등산복과 선캡, 선글라스를 장착한 중년 한국인 관광객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일기는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그는 철저한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다수의 여행에 무척이나 마음을 쓰는 사람이고, 상처받은 마음을 야생화 찍기로 달래는 사람이다. 남의 블로그에서 발견하는 인생을 통해 나는 편협한 상상력에서 벗어난다.
나는 ‘어쩌다’ 발견하기 전까지 세상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의 서사를 생각하면 종종 숨이 가빠진다. 그리고 그 방대함 속에서 내 서사의 무의미함을 다시금 깨닫는다.‘내 삶이 그렇게 까지 중요한 것일 수 없다.’나는 작아지고, 그래서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다.
-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이것도 내가 그 글을 삭제하지 않아서 발견한 인용문이다. 어떤 방식이든, 글로 삶을 나누기 위해서는 글이 '남아' 있어야 한다.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최초의 독자는 바로 나 자신.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도 ‘독자와의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