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즐기자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천재와 노력하는 사람의 차이를 성실함이라고 한다면, 노력하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전에, 지금은 방송인이지만 과거 대한민국 최고의 센터로 불리던 농구선수서장훈 씨가, '즐기는 태도로 임해서는 절대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훈련을 하고 시합을 할 때는 죽을 각오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그럼 과연 노력하는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즐기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까? 느슨한 마음가짐으로 그저 즐겁게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수 고(故)신해철 씨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 해서 좋은 기분은 한 2 주 가데요, 연말에 가요대상 뭐 이런 거 받고 좋은 기분은 한 3 주 가데요, 그런데 콘서트 준비하면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그 과정의 기억과 느낌은 평생가요....그래서 우린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신해철 씨가 콘서트 준비를, 즐기면서 설렁설렁했을까? 아니다. 분명 최고의 콘서트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통스럽게 자신을 쥐어짰을 것이다.그렇다, 즐기는 사람이란 열심히 노력하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힘들게 뛰는 와중에도 내가 왜 이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작은 즐거움을 찾아 자기 자신을 충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페이스 조절이 없는 무한 노력만으론 오랜 시간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기회들을 기다리며, 고통과 좌절에 매몰되지 않고,불안한 현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이 과정들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학위 논문을 마무리 지을 때가 다가오면서, 다들 그렇듯이 나도 박사 후 과정 연구원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그때의 일은 결코 즐겁지 않은경험이다. 많은 경우 거절편지가 날아왔고, 처진 기분이 회복될 만하면 또 다른 거절 편지로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리를 못 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심각했던, 불안한 삶이었다. 이때 나는, 왜 일이 이렇게 안 풀리고 세상은 왜 나에게 이렇게 가혹할까라는 원망 섞인 한탄을 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 원서를 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적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던 나는, 원서를 제출할 때마다 같이 내야 하는 연구계획서를 쓰는 시간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가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이 관측자료를 쓰면 저런 재미있는 연구도 할 수 있겠는데?"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실현되지 않을 일들을 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어쨌든 계속 원서는 썼으니까) 나는 나름의 작은 즐거움을 찾기시작한 것이다.현실에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는 시뮬레이션은 그저 망상일 뿐이지만, 열심히 원서를 쓰는 가운데 힘들 때마다 시뮬레이션했던 나의 미래 연구 계획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모르핀과도 같은 역할을 넘어서 실제 내 현재 연구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왔는데도 결과가 실망스러운 경우도 있다. 수많은 원서를 보내고, 거절을 당하는 과정이 다 끝나고, 최종적으로 두 군데에서 박사 후 연구원 자리 오퍼를 받았지만 둘 다 (그 당시 나의 계획에 따르면)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연구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한 알마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면 나중에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네덜란드로 국제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혹시 나중에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모르겠다).
공평하게 찾아온 기회를 잡아 모두가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배우 오디션을 생각해 보라, 100 대 1의 경쟁률이라면, 한 명 빼고 나머지 아흔아홉 명은 원하지 않는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어떤 이들은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얘기한다. 필자가 이 글의 처음에서 말한 '모두에게 공평할 수 없는'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결과의 불공평'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나름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하게 되는,'불공평한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