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대중의 카지노 게임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파쇼 정치는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사회 곳곳에 누적된 카지노 게임, 분노, 고립감이 제도권의 경계선에서 찰랑찰랑 넘실거리는 순간 출현한다.우리는 그 카지노 게임을 개인의 성격과 무지 혹은 무능의 결과로 간주하고, 공평한 경쟁의 결과 혹은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론적 이론을 들이대며 합리화한다. 그러나, 사회 체계가 제공하지 못한 안정과 설명, 참여의 감각이 무너진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 혹은 소외된 이들은 조금씩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장에서는 대중의 카지노 게임이 어떻게 형성되고, 왜 그것이 정치적 파괴력으로 전환되는지를 구조적으로 살펴본다.
카지노 게임은 언제나 단일 원인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반에서 복합적으로 솟구친다.현대 사회에서 특히 주목할 다섯 축은 다음과 같다: 경제, 정체성, 기술, 정보, 정치불신이다.
한때 노력하면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서사가 사회의 중심에 있었고, 멀지 않은 주변에 성공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그러나 산업 사회와 시장 경제의 뿌리가 깊어질수록, 중산층은 해체되고, 고용은 카지노 게임정해졌으며, 자산 격차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 월급으로 아파트 한 채 사려면, 50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야…”
‘사다리’는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다리가 ‘나를 위한 사다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기 시작했다. 저 먼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사다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상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첫 번째 카지노 게임은 단순한 가난이 아닌, 미래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린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정체성은 원래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좌표였다.
가족, 직업, 성 역할, 지역 공동체 같은 틀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학습했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사회 구조의 변화는 이 정체성의 기반 자체를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다.다양성과 유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존의 위계나 역할 분담은 해체되었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불완전한 형태로 재조직되는 중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이전 체계에 맞게 자기 자신을 학습해왔다는 사실이다.이미 폐기된 모델에 기반한 삶의 방식을 기준으로 자기를 규정한 이들은, 사회가 그 모델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정체성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이들은 새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차 낙오되며, 그 과정에서 자존감은 붕괴하고, 정체성은 쓸모 없는 유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이러한 낙오의 감각은 단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변화와 정체성 구조 간의 비동기적 전환에서 비롯된 구조적 불일치다.
이러한 불일치는 정체성의 위기를 카지노 게임으로, 카지노 게임을 분노로 심화시켜 나간다.하지만, 카지노 게임에서 시작한 이 분노는 아직 누구의 잘못인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뚫고 나올 약한 표면을 찾을 때까지 누적된다.
이제 방향 없이 쌓여만 가는 무주공산의 그 힘을 노리는 기성 정치 세력이 등장한다.그들은 카지노 게임과 분노를 직면하거나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오히려 그 감정을 누구의 책임인지 ‘설명’해주는 역할을 자처하며, 대중에게 속삭인다.
“문제는 너희가 아니다. 너희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따로 있다.”
그렇게 감정은 해석을 얻고, 방향을 부여받게 되고, 누적된 에너지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약한 표면’ 위로 쏟아진다.
두 번째 카지노 게임은 자신을 규정하던 기준이 무너지고, 그 기준이 더 이상 사회에 의해 승인받지 못할 때 발생하는 존재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기술은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더 높은 차원의 역할로 이동시키는 매개체다.
AI와 자동화는 단순 노동을 대체하는 동시에, 보다 복잡하고 창의적인 판단을 인간이 담당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편한다.기술은 인간을 도구에서 기획자로 옮겨 놓지만, 많은 사람은 이를 실직 통보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에 있지 않다.문제는 기술의 도입 속도에 비해, 사회가 인간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존엄을 설계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데 있다.
그 공백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사회에 유효한 존재인지 카지노 게임해하기 시작한다.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그 기술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인간이 자리를 잃는다면,기술 진보는 곧 존재론적 퇴거 명령으로 인식된다.
그 순간, 카지노 게임은 체계의 일부가 아니라 정체성의 균열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카지노 게임은 기술이 만든 미래에 인간이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존재론적 불신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문제는 정보가 부족한 데 있지 않다.오히려 문제는 너무 많고, 너무 빠르게 도달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인지 구조는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정보량에 한계가 있고, 과부하가 걸린 상태에서는 분석이 아니라 직관, 숙고가 아니라 반응에 의존하게 된다.이때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보다는 명료하고 자극적인 해석, 모순된 현실보다는 선악 구도의 이야기를 선호하게 된다.
정보는 더 많이 공급되고 소비되지만, 이해는 얕아지고, 그만큼 맹신의 오류가 파고들 틈이 넓어진다.그 틈에서 감정의 언어는 해석을 가장한 선동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복잡한 현실 앞에서 감정을 해석해주는 단순한 문장은, 카지노 게임한 대중에게는 진실보다 위로에 가깝게 들린다.
네 번째 카지노 게임은 과잉된 정보 속에서 맥락을 잃고, 감정적 해석만 남은 채 떠도는 인지적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단순한 감정적 혐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를 통한 현실 문제 해결의 가능성 자체가 사라졌다는 체감에서 비롯된다.그렇다고 정치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치를 공공의 문제 해결 장치가 아닌 권력과 이익의 기술로 오용·남용하는 세력에 있다.정치는 본래 공동체의 갈등을 조율하고, 다른 생각들 사이에서 타협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공론의 공간이었다.그러나 지금 정치는 갈등을 조율하는 공간이 아니라, 분열을 자산화하려는 자들에 의해 이미 많이 오염되고 훼손되었다.
자기 반성과 계발이 없는 정치 세력이 권력과 이권 중심으로만 결속할 때, 정치는 점점 더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는 폐쇄적 체질로 굳어진다.설득은 실종되고, 감정 동원과 지지층 자극이 전략의 전부가 된다.이러한 정치 세력은 대중을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대중은 권력 쟁취의 도구로만 호출되며, 정치는 국민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편 가르고 선동하는 기술로 변질된다.
2025년의 한국 정치 판도는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이기도 하다.190석이 넘는 거대 야당의 출현은 단지 반보수 정서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쪽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의 산물이었다.그러나 그 선택 이후에도 정치가 여전히 책임 회피와 무능의 프레임을 반복한다면, 불신은 다시 냉소로, 냉소는 극단의 정치에 더 큰 공간을 내어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카지노 게임은 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생기는 체념과 냉소에서 비롯된다.
경제, 정체성, 기술, 정보, 정치라는 사회 구조 전반이 대중에게 설명과 공감을 멈추는 순간, 감정은 체제 밖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선동 정치가 대신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