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최진석 지음
역시 최진석 교수님 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쾌했다. 중국의 대철학자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교, 그리고 노자로 떠올리게 되는 도교. 대충의 차이는 알고 있었지만 확실한 구분은 하지 못했다. 도(道), 덕(德), 예(禮), 선(善) 그리고 무위(無爲).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항상 헛갈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명쾌해졌고, 단순해졌다. 서양철학과의 차이까지도.
유교는 주자가 말했던 ‘극기복례’로 정리될 수 있다. 즉 나를 극복해 낼 수 있어야 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나를 이겨야만 그때서야 예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고? 무슨 뜻이지?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풀어낸다.
중국 송대의 철학자 주희는 공자 사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압축해 정리합니다. 공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본질인 ‘인’이 있다고 보고, 그 보편적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합니다. 예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에서는 선(善)의 정점으로 인식되지요. 선으로 인정되는 특정한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특정한 가치 체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 보편적 가치 체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는 미숙한 상태로서의 개별적 자아(己)예요. 개별적인 자아는 성숙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로서 이해되지요.
이런 구조에서 인간은 개별성과 결별하고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 속으로 편입돼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신을 고유명사 차원에서 탈피시켜 일반명사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공자는 극기복례라고 표현한 것이죠.
예는 그 이데올로기 혹은 교화시스템에 포함된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이나 표준 혹은 이상으로 작용합니다. 도덕적 자가 능력이 있는 인간은 모두 그 예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해요. 그래서 공자는 《논어》<안연에서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는 전체 사회가 모두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공자가 건설하려고 했던 ‘인간의 길’이에요.(88-90p)
공자는 동물과 사람이 다른 이유를 ‘인(仁)’에서 찾았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인’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지만, 인격을 가진 주체로서 신처럼 대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덕(德)’을 따르게 된다. 즉 ‘덕’의 정신을 가지게 되면 신과 더 가까워지고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최고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禮)’를 따라야 하는데, 이를 통해 인간은 가장 이상적 형태(선(善))로 우뚝 설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리고 가장 높은 형태인 ‘예’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교는 가치론이자 본질론이다. 그리고 이념적이다. 명확한 기준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이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본질을 진리라 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학(學) 하고, 배움을 지속하기 위해 습(習)을 통해 반복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배움을 누적해야 초라한 나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다.
《논어》의 첫 글자는 ‘학(學)’으로, ‘학’ 또는 ‘배움’의 출발은 모방입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모델로 해서 그것을 모방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유학은 기본적으로 쌓아가는 학문이 될 수밖에 없지요. 성인의 말씀을 쌓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학’을 함은 날마다 무엇인가를 더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296p)
하지만 노자는 유교와는 완전 상반된 이야기를 한다. 일단 공자의 ‘학’에 대비해 노자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의 첫 글자는 ‘도(道)입니다. ’도‘는 《논어》의 ’학‘과 다르게 무엇인가를 날마다 덜어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혹자는 노자의 말 그대로 머리에 든 것을 다 덜어내면 너무 무식해지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노자의 ‘손(損)’은 더하기 빼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에게 이미 있는 지식, 이념, 신념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면 그것들이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이제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 본래의 자발적인 내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지식이나 이념 혹은 신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동력으로 세계와 직접 마주하는 것이죠. 약화된 것들을 밟고 우뚝 서는 것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욕망, 나의 표현력, 나의 충동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겁니다.(297p)
노자는 유교의 보편화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본질에 입각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이 획일화를 만들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닐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아무리 말로 설득하고 타이른다 할지라도 종국에는 폭력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자는 이가 잘못된 것이라 일갈한다. 인간 자체가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에 의해 맺어진 만큼 한쪽이 아닌 양쪽을 다 들여다봐야만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강조하는 ‘무위(無爲)’이자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일단 ‘무위’를 먼저 알아보자.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도덕경》 제37장) 여기서 ‘무위’란 어떤 이념이나 기준을 근거로 하여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유위(有爲)’는 특정한 기준이나 신념 혹은 가치관 등의 지배하에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념이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이나 기준을 머리에 이고 숭배하면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밟고 선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준이나 이념 혹은 신념도 모두 구체적인 세계에서 형성된 관념의 구조물일 뿐입니다. 이 관념의 구조물은 만들어지지마자 썩기 시작할 수밖에 없죠. 생산되자마자 구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세계는 그런 관념의 구조물을 남겨둔 채 계속 앞으로 전진하거든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진리로 포장하여 높이 받들고, 그것들에 의존하여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 적응하려 합니다. 썩고 굳은 관념의 구조물로 변화하는 세계와 접촉하는 일은, 결국 세계를 과거의 거기에 붙잡아두려는 꼴이 되고 맙니다. 무위란 바로 이런 이념이나 기준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변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접촉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위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고 적절히 반응한다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그것이 바로 ‘무위’의 결과로 나타난 무불위(無不爲), 즉 ‘되지 않을 것이 없다’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287-289p)
길긴 하지만 무위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무위란 소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이나 이념, 신념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흔들리거나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이 현실세계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거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바로 ‘무위’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무위’에 정진할 경우 우리는 ‘무불위(無不爲), 즉 ‘되지 않을 것이 없다’는 수준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이번에는 ‘유무상생’의 의미이다.
무는 그의 대립면인 유와의 관계에 의해서 무가 되고, 유는 그의 대립면인 무와의 관계에 의해서 유가 됩니다. 대립면과의 상호의존관계,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형식인 것입니다. 노자는 바로 이런 유무상생의 존재형식에 ‘도’라는 명칭을 붙일 뿐입니다. 이것이 《도덕경》 제25장, “억지로 거기 글자를 붙여 ‘도’라고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137p)
유무상생은 이 세계의 존재형식이자 실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해가 있고 달이 각자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무상생의 원리에서는 달이 있기 때문에 해가 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해가 있기 때문에 달은 달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거다. 나란 존재도 마찬가지다. 나의 이름은 나를 뜻하는 것이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불러줄 때 나의 이름으로 각인될 수 있다. 내가 부르는 나의 이름은 공허한 메아리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자는 이 세계를 존재론적, 본질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의 상호관계에 따른 상생으로 보고 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은 구분론적 태도가 아닌 관계론적 태도가 필요하다. 왜? 세계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그런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으니까.
도가사상에는 ‘광이불요(光而不耀)’와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표현들도 있습니다. ‘광이불요’란 ‘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외부의 것들을 제압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절제와 그 절제가 빚어내는 탄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화광동진’은 ‘자기 빛을 다른 흙먼지들과 함께 펼쳐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빛이 난다 함은 하나의 방향으로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대립면의 긴장을 품은 사람은 하나의 빛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슬처럼 빛나지 않습니다. 그대신 돌처럼 소박하지요.(242p)
광이불요 혹은 화광동진이 바로 노자가 바라보는 유무상생의 세계관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추구해야 할 행동지침, 태도라 할 수 있다. 상대를 배려하고 잘 되도록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빛나는 존재, 스스로 빛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그리고 타인의 관심에 의해 빛이 나는 그런 모습이 바로 광이불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진석 교수는 노자의 입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자발성, 창조성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일반명사가 아닌 자신 만의 고유명사로서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진다. 깊이 가슴에 새겨볼 만한 질문들이다.
노자는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와 ‘자기로 돌아가라’를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모두 개별자들의 자발성이 발휘되어 그것이 자율적으로 통합되는 전체를 꿈꾸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로 돌아가는 게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일반명사 속에 함몰되게 방치하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뜻입니다.(360p)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 (364p)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진정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내 삶의 주인공은 진짜 내가 맞는가?
이 책을 완독 하는 데 한 달여, 게다가 필사하는 시간만도 2주 가까이 걸렸다. 그만큼 천천히 곱씹으며 읽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충분했다.꼭 한번 찬찬히 읽으며 내용을 되새김질해보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보이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인생도서로써 추천한다.
이 책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노자의 사상이 중국 사유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노자의 사상을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유로 보는 경향이 있다. 즉 모든 시대를 초월해 신비스러운 영향력을 가진 어떤 것으로 보는 경향 말이다. 하지만 노자도 그의 “시대가 낳은 아들”일 뿐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는 신비스러운 우주의 기원이거나 깨달음의 절정으로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사유가 빚어낸 관념의 정화(精華)이다.(5p)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노자 사상의 기반 – 이것을 존재론적인 혹은 존재적인 기반이라고 해두자 –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점이다. 노자 사상의 존재적 기반은 그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세계가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본 점이다. 그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말했다.(7p)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인문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닌 ‘인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있어야 한다. 노자가 무위자연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당시 노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6p)
노자의 ‘도’를 여전히 실체나 본체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유무상생’에 귀결하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두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비주체적 이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철학적으로 읽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다시 간단히 말해본다. 도를 실체나 본체로 이해하면 반드시 ‘본질’을 긍정하게 된다. 본질을 긍정하면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 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적인 구조상 당연한 일이다. 노자의 <도덕경 안에는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 등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부정하면서 본질이니 실체니 본체니 하는 것들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부정하는 한, 세계를 비본질성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철학책을 철학적 시선으로 읽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7-8p)
우리는 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까? 외부로부터 강한 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 체계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 ‘경계에 있다’는 것은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통찰을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신념을 벗어난 ‘나’로 돌아가야 통찰력,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8p)
1강 생각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생각은 인간이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작동해 인간의 방식으로 자연에 변화를 가하는 것,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문화(文化)’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세계의 형태가 바로 ‘문명(文明)’이지요.(19p)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훨씬 용이해졌고 이 또한 뇌 발달에 크게 기여합니다. 그런데 더 의미심장한 변화는 인간이 불을 사용하면서 뇌가 더 커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불에 익힌 고기는 생고기보다 훨씬 연합니다. 질기지 않은 고기를 먹다 보니 생고기를 잘라 먹을 때 사용하던 두껍고 강한 턱뼈와 근육이 필요하지 않게 됐어요. 결국 불을 사용하지 않는 다른 동물보다 두개골과 근육이 훨씬 얇아지면서 내부에서 뇌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고, 뇌는 더 커질 수 있었습니다. 또 익힌 고기를 씹을 때 힘을 덜 들여도 되기 때문에 치아 역시 점점 퇴화해 작아졌지요. 턱뼈와 근육이 얇아 지면서 구강 내부 또한 훨씬 넓어졌습니다. 넓어진 공간에서 혀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이것이 언어의 사용을 가속시켰습니다. 여기서부터 ‘언어’와 ‘생각’이 함께 연동돼 발전하는 겁니다. 그 매개가 바로 불이었지요.(20-21p)
신석기시대 후기로 들어오면 중국에서는 종법제도(宗法制度)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권위와 재산이 혈육을 매개로 전승되는 제도이지요. 물론 이 제도는 일부일처제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종법제도는 적자(嫡子) 가운데 첫째 아들, 즉 적장자(嫡長子)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해 대종(大宗)이 되고, 둘째 아들 이하는 소종(小宗)이 되는 친족제도의 형식입니다. 대종은 종가(宗家)를 구성하고 종가의 가장이 모든 종족(宗族)의 대표자인 종주(宗主)가 되지요. 종주는 종족을 이끌며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종족에 해를 입힌 자를 처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주(周)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에서 봉건제도로 확장돼 정치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요. 즉 통치자인 천자(天子)가 종주가 되고 제후는 소종온라인 카지노 게임서 충실하게 복종해야 하는 체제로 구축됩니다.(23-24p)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는 룽산문화(龍山文化)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일어난 룽산문화는 양사오문화와 달리 신석기 농업 혁명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상승한 시기에 건설된 문화입니다.
당시에 생산력이 증가하자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잉여 생산물이 나왔어요. 자연히 잉여 생산물에 대한 소유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는 결국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씨족 간의 평등한 관계를 무너뜨리고 계급의 출현을 이끌게 됩니다) 또 농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전의 채집 경제활동 시기에 비해 남성의 근력이 더 필요하게 됐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남성이 주도하는 관념이 발생했습니다. 남성 주도 관념이 발생하면서 사유재산 상속 문제는 자연스럽게 남성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형성됐지요. 남성이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확신하는 자식에게 재산을 모두 주려는 욕구는 오직 한 여성을 독점해야만 실현됩니다. 일부일처제가 성립되는 것이지요.(24-25p)
종법제도의 발아는 ‘생각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적 위치를 어떻게 상승시키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종법제도의 핵심은 혈연에 대한 몰두입니다. 혈연에 대한 몰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근거와 행위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이 세계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정하고자 했음을 의미합니다.(26p)
중국 상고시대를 논할 때 주로 하, 은, 주, 삼대(三代)를 얘기하지요. 하(夏)나라(기원전 2070~기원전 1600)는 역사에 남겨진 기록과 유물들로 추적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입니다.(28p)
은나라 사람들이 신을 발견한 것은 이 혈연의 총화이자 궁극지점을 발견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혈연이 단순히 집안이나 종족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궁극적 지점으로 통합되어 튼튼한 기반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적 위치가 한층 더 상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의 존재성은 인간을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혈연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권위로부터 보장받는 것입니다.(33p)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은나라라고 생각하던 당시, 아직 천명을 받지 않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 자체도 정당성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덕(德)’이라는 개념이 출현합니다. 즉 덕이 있으면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있던 천명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은나라에 있던 천명이 주나라로 옮겨 가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덕으로 은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립 모두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당시에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신의 뜻을 알고 인간의 기도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제사를 지낼 때 마음이 요동치고 몸가짐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신과의 소통이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아주 잘 정화된 마음의 상태가 먼저 준비돼야 합니다. 그 정제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안된 절차가 따로 있었어요. 절차만 지키면 신을 만족시킬 수준으로 제사를 잘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절차를 ‘예(禮)’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이것이 예의 가장 원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덕’은 제사장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잇을 정도로 잘 준비한 마음의 상태인데, 태어날 때 갖고 있던 마음처럼 순화되고 정화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지요.(35p)
이제 사람들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본래의 상태인 덕을 갖고 있으면 신의 뜻, 즉 천명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보게 됐습니다. 물론 인간이 천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천명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명이 그 덕을 갖고 있음을 가상히 여겨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지요. 여전히 전권은 천명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오로지 천명 자체의 뜻에 의해서만 작동했는데, 이제는 천명이 인간의 내적인 상태를 고려하면서 움직일 수도 있게 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지요. 인간은 신의 뜻, 즉 천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내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덕입니다.(36p)
주나라 때 천(天)은 인간 세상에 밀접하게 접촉하고 인간과 소통하는 매우 이성적인 초월자로 등장합니다. 더 이상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판단을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덕이라는 판단 근거를 갖게 됐어요.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아무나 골라서 통치자로 만들고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그런 일을 하도록 한 것이죠. 덕이 있는 사람에게 천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명령하는 천과 명령을 받는 인간은 덕이라는 매개를 통해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은나라와 달리 주나라의 통치자는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렀던 것이지요.(40-41p)
주나라에 와서 천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도덕의 근거 내지는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로 바뀌었어요. 천과 인간이 덕을 매개로 연관됨으로써 천의 뜻이 인간에게 전해지거나 천의 움직임을 인간이 예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이성적인 원칙을 갖고 인간 스스로 움직임을 절제하거나 계도할 수 있게 됐지요. 개방적이고 이성적이며 예측 가능한 틀 속에서 ‘천인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분명히 인간의 지위가 한 단계 더 상승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제 인간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신의 뜻을 황망하게 좇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나 인간의 활동력 자체가 신과 상통하는 것이라는 상대적 자부심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됐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다해서 인간사를 인간적 관점에서 처리하는 것이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됐어요. 실제적으로는 천의 뜻보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일로 활동의 중심축이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지요.(41-42p)
‘덕’은 사실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덕은 인간을 지탱하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활동’이자 ‘작용’, ‘동력’, ‘힘’을 말합니다.(44p)
덕의 원래 의미는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마음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온라인 카지노 게임 회복돼야 합니다. 이 ‘덕’이 있어야 인간은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지혜의 발휘자로, 도덕을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 도덕을 실천하는 자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서 일상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민주를 실천하는 사람온라인 카지노 게임 거듭날 수 있는 겁니다.(47p)
우리는 노자에게서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는 인사이트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이념의 수행자가 되거나 이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념을 만들라’는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혹은 사회가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바뀌어야겠지요. 스스로 생산한 이념으로, 우리 토양에 맞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51p)
2강 생각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먼 옛날 중국 역사를 끌고 가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주’라고 이름 붙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명망시키고 중원을 장악한 희(姬) 씨가 중심 씨족이 되어 건립한 나라입니다. 주나라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전반기를 서주(기원전 1046~기원전 771), 후반기를 동주(기원전 770~기원전 256)라고 해요.
동주는 또 춘추와 전국이라는 두 시기로 구분됩니다. 이 두 시기를 합쳐서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하지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를 춘추(春秋) 시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노(魯)나라의 편년체 역사책 <춘추가 그 시기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戰國) 시기라고 하는데, 당시 유세가들의 언설이나 책략 등을 모은 <전축책(戰國策)이라는 책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57-58p)
공자는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울 삼아 참고했는데, 인문적 특색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주나라(서주)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신이 지배하던 은나라와 달리 인문적 분위기가 팽배하고 새롭게 전개된 효율적 제도들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주나라 초기를 매우 이상적인 시대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58p)
주나라가 효율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거대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던 건 시대에 맞는 적절한 제도를 새로 만들어 운용한 덕분이었지요. 봉건제도가 대표적입니다. 이때 왕은 ‘왕기(王畿)’라고 하는 직할지를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영지는 동성(同姓) 친족들이나 태공망처럼 개국할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소수의 공신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왕은 이들을 세습 제후로 봉(封)해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그 대가로 군사적 봉상와 공납을 받았으니 이것이 봉건제도의 핵심이지요.(59p)
은나라 때까지의 종법제도가 혈연을 기초로 해 부권(父權)을 강화하는 데 제한돼 있었다면,주나라에 와서는 그것이 국가제도와 정치제도의 뿌리로 기능할 정도로 제도화됐지요. 주나라 사람과 은나라 사람의 관계,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종법제도의 틀 속에서 지배ㆍ피지배 관계로 구조화한 것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어요.(59p)
주나라의 조세제도 정전제(井田制)에 대해 맹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사방 1리(里)의 토지를 우물 정(井) 모양온라인 카지노 게임 구획해 아홉 부분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누면 한 부분이 1백 무(畝, 논밭 넓이의 단위인 ‘묘’의 원말)로 총 9백 무의 토지가 되는데 이를 1정(井)이라고 했습니다. 아홉 부분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뉜 이 1정 가운데 여덟 부분은 가구당 한 부분씩 나눠 갖고 그것을 경작해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부분을 공동온라인 카지노 게임 경작해 세금온라인 카지노 게임 납부했지요.
세금을 만들어내는 공동 경작지를 ‘공전(公田)’이라 부르고, 8가구가 연명하기 위해 차지한 각 경작지를 ‘사전(私田)’이라 불렀습니다. 원칙은 반드시 공전에서 먼저 일하고 나중에 사전에서 일하는 것이었지요.(61p)
기원전 594년부터 노나라에서 ‘초세무(初稅畝)’라는 제도를 새로 실시하는데 이는 토지면적에 따라 일정량의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예요. 즉 노역을 통해서 생산된 수확물을 납부하는 방식에서 일정하게 정해진 현물을 납부하는 방식온라인 카지노 게임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을 통해서 세금을 만들어내던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해진 양만 채우면 되기 때문에 토지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유를 확보하는 결과가 나타났어요. 이는 사회 변화의 흐름을 만드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백성들이 토지로부터 일정한 자유를 확보했다는 것은 새로운 업종, 즉 상업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생겼다는 뜻이고 기존의 지배ㆍ피지배 구조로부터 받는 억압이 훨씬 덜해졌다는 것을 반영하지요.(62-63p)
공전에 무게중심이 더 가 있을 때는 인간에 비해서 하늘이, 제후에 비해서 천자가, 소인에 비해서 군자가 월등한 지배력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점점 사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상대적으로 힘이 쏠리면서 인간과 제후와 소인이 점점 고개를 바짝 들게 된 것입니다. 주변과 중심의 역전 현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신과 인간 사이의 힘의 역전 현상도 시작된 것입니다.(64p)
공자는 《논어》<이인에서 “군자는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덕’이라고 하는 개념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도 전혀 눌리지 않을 인간의 독립적인 자존감을 지탱하던 중심 기반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혈연적인 세습 귀족인 군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죠. 거칠게 말하면 군자만이 신과 대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된 인간이었습니다.
소인은 당시 상승하던 인간의 지위를 전혀 누릴 수 없었고 그저 노동력의 원천일 뿐이었죠. 그런데 조세제도가 변화하면서 소인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정 부분 자유를 획득하게 되자 지배하는 군자와 지배받던 소인이라는 이 안정적인 이분 구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 균열이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다고 평가되는 춘추전국시대 변화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지요.(64-65p)
이 균열을 더욱 가속시키거나 분명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철기’라는 전혀 새로운 기술 문명의 등장입니다. 중국에서 철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 발명됐는데, 그것이 산업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 말엽부터예요.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일입니다. (중략) 철기가 발명됐다는 사실은 철기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과 그것을 유통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런 변화를 중심으로 계급이 재편될 수밖에 없고, 이 계급의 재편이 바로 사회 변화의 가장 심층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66-67p)
철기 사용을 통해 당시 소외 계층이었던 소인들이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철기가 소인들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지배-피지배로 고착화돼 있던 계급 관계를 뒤흔드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부는 속성상 권력화를 지향하지요. 부를 축적한 일부 소인은 축적한 부를 바탕온라인 카지노 게임 군자와 같은 지위를 누리려는 열망을 표출합니다. 즉 신분 상승을 도모한 것이지요. 상승하려는 소인과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두려워 소인을 억누르려는 군자 사이에는 충돌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어요.(67p)
춘추 말기부터 전국 초기 사이에 벌어진 이 계급 강등이 전국 말기까지 지속되면서 중국 역사 발전 추세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철기의 발명으로 새로운 계층이 소인들 속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상업으로 무장했고, 이후의 중국 역사는 상업으로 무장한 소인 계층은 계속 강해지고 성장하는 반면, 혈연적 세습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던 군자 계급은 점점 약화되는 추세로 이동하지요. 성장한 소인들이 점점 확대되고 강해지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혈연적 세습 귀족을 모두 타도할 수 있다고 판단해 계급 전복을 도모하는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진시황의 등장입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완수한 인물로서 의미를 부여받아요. 이는 철기 발명온라인 카지노 게임 새로 촉발된 역사적 발전 추세를 일단락 지은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시행한 많은 통일 정책은 소인들로부터 성장한 신흥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구귀족들의 세력을 일소하려는 정치적 목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획된 것들이지요.(69-70p)
하늘이 보호하던 인간 세상의 이분 구도가 와해되면서 하늘 또한 대단찮은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됐어요. 하늘이 점점 무시되고 제거돼 가는 역사 발전 추세는 하늘의 뜻이라고는 하나도 개입돼 있지 않은 ‘법(法)’이 등장하면서 완결됩니다. 즉 법이 세워진 것은 하늘이 인간에 의해 완전히 극복돼 제거됐음을 의미해요.(81p)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온라인 카지노 게임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道)’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럭헤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천’과 ‘덕’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83-84p)
도는 천명을 극복하려는 인간이 만든 매우 인간적인 범주의 개념입니다. 도가 천명을 극복하려면 천명에 있는 문제점, 즉 비의성과 임의성 그리고 주관성을 극복해 투명성과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해야 하지요. (중략) 천명론을 극복해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최초의 철학자로 노자와 공자가 있어요. 모두 춘추 말에서 전국 초 사이에 활동했던 인물들입니다. (중략) 이들은 중국에서 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각자가 갖고 있던 영감의 원천이 달랐던 까닭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길을 그렸어요. 공자는 혁명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 (중략)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공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이제 하늘의 뜻을 어떻게 잘 따를 것인가 하는 사명 대신에 이 인을 어떻게 잘 보존하고 잘 키울 것인가 하는 새로운 사명을 가진 존재가 됐습니다.(86-87p)
공자는 《논어》<위령공에서 인을 잘 실천할 수 있는 황금률 하나를 제시합니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 이 규범만 평생 지킬 수 있다면 가장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으로서의 ‘씨앗’인 인을 모두 함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한,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타인에게 알려질 수 있고, 타인의 욕망도 나에게 알려질 수 있어요. 기본적인 정서는 모두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면 이는 투명한 것이지요. 투명한 상태로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면 이는 보편적이에요. 보편적으로 개방돼 있는 한 이것은 주관성에 좌우되지 않고 객곽적일 수밖에 없습니다.(86-87p)
중국 송대의 철학자 주희는 공자 사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압축해 정리합니다. 공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본질인 ‘인’이 있다고 보고, 그 보편적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합니다. 예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에서는 선(善)의 정점으로 인식되지요. 선으로 인정되는 특정한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특정한 가치 체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 보편적 가치 체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는 미숙한 상태로서의 개별적 자아(己)예요. 개별적인 자아는 성숙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로서 이해되지요.
이런 구조에서 인간은 개별성과 결별하고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 속으로 편입돼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신을 고유명사 차원에서 탈피시켜 일반명사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공자는 극기복례라고 표현한 것이죠.
예는 그 이데올로기 혹은 교화시스템에 포함된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이나 표준 혹은 이상으로 작용합니다. 도덕적 자가 능력이 있는 인간은 모두 그 예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해요. 그래서 공자는 《논어》<안연에서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는 전체 사회가 모두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공자가 건설하려고 했던 ‘인간의 길’이예요.(88-90p)
현대의 서양 철학자 미셸 푸코는 본질이나 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본질주의적인 근대를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는 틀로 정리하는 것이지요. 본질의 내용이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인 한 기준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기준인 한 사회를 구분하고 차등화한다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공자가 건설한 인간의 길도 결국은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고 하는 부정적 결과를 피해 갈 수 없게 됩니다.(90p)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에요. 그런데 공자식의 문명은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합니다. 노자는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상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해요. 왜냐하면 보편화된 이념 내지 체계는 그 내용의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기준 혹은 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93-94p)
노자는 인간의 길에 대한 영감을 자연에서 구합니다. 자연은 이런 분리의 장치가 없이 작동하면서 오히려 영구적이고 거대한 효과와 결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이지요. 자연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관찰됩니다. 노자는 자연의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해 천명 속에 문제점으로 자리잡고 있던 비의성, 주관성 그리고 임의성을 극복하고 투명성,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해요.
이렇게 천명을 극복하고 ‘도’라고 하는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 했던 두 철학자 가운데 공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영감을 얻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형식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94p)
3강 유와 무로 완성한 노자의 사상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죠.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天道)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102-103p)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할 때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바탕으로 했는데, 이렇게 되면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고,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종국에는 가치론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론의 결말은 합의된 보편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죠. 기준이 설정되면, 구분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하고 결국은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구분, 배제, 억압의 구조가 갈등의 씨앗이 돼서 결국 인간은 폭력의 발생을 막지 못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평화는 멀어져 버린다는 게 노자의 비판이었습니다.(103p)
공자가 구상한 인간 질서는 원초적으로 말한다면 사실 가정의 질서를 모델로 합니다. 결국 공자는 가정의 질서를 사회적 질서로 확대하고자 했고, 또 확대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가정의 질서를 사회적 질서로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가정의 윤리와 사회적 윤리를 거의 동일한 근거로 연결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 사상의 취약점은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의 연결성 문제에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가정의 질서와 사회적 질서 혹은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는 작동 원리가 다르다고 할 경우 상당히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공자가 구상한 인간 질서는 개인의 성숙이 가정 안에서 시작되고, 그 성숙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구도입니다. 개인 – 가정 – 사회(국가)가 동일한 근거로 작동하며 전체적 유기성을 완성합니다.(105p)
공자나 노자나 모두 인간의 길을 설계하고 인간의 길을 따르려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공자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근거로 삼았고, 노자는 자연의 운행 원칙을 근거로 했을 뿐입니다.(106p)
흔히 노자의 이미지는 소박한 도포 자락 휘날리며 술 한 병들고 산비탈을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속세를 벗어나 초연한 정신세계를 구가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도덕경》을 읽어보면 많은 부분이 천하를 장악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해봐라. 그러면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하도 네 손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도덕경》 제37장에서 통치자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무위해라. 그러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106-107p)
노자 사상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도덕경》 제1장입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108p)
노자의 사상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하는 나훈아보다 ‘사랑보다 슬픈 건 정’이라고 표현하는 심수봉의 노래에 더 가깝습니다. 나훈아식 정의 내림보다 심소봉식 상태 설명이 절절함을 더 자아내는 것이지요. 나훈아식이 매우 근대적이라면, 심수봉식은 그래도 현대적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114p)
공자는 언어 친화적, 개념 친화적, 구분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철학이든 본질을 긍정한다면 구분하고 정의 내리는 것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자가 인도를 우선시하고 이 인도는 가도(可道)의 형식을 띠고 있다면, 가도는 당연히 언어 친화적이며 구분을 긍정하는 겁니다. 인도에서는 가도와 가명 그리고 정명(正名)이 모두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친척 같은 관계입니다.(118p)
공자의 사상이 보여주는 느낌은 적극적이며, 상승형이며, 확장형이며, 직선형이며, 근면성실형이고, 금욕적이고, 중앙집권적이고, 엄숙합니다. 반면에 《도덕경》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로 볼 때, 노자의 사상은 공자에 비해서 소극적이거나 순환적인 느낌을 주지요. 게다가 곡선적이고 자유로우며 개방적이거나 혹은 지방분권적인 느낌까지 줍니다.(120p)
노자의 사상에서는 소극적이며 지방분권적이며 자율적이며 또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뒤로 물러서라고 합니다. 남성적이거나 태양을 닮는 것보다는 여성적이면서 달을 닮으라고 합니다. 불보다는 물을 닮으라고도 하지요.(121p)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해주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서 존재하게 해주는 ‘존재근거’이지요. 그래서 당연히 그 존재에게는 그 본질이 ‘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거이니까요.
공자의 사상은 하나의 주제에 집중됩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본질인 ‘인’을 잘 보존하고 잘 확장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인’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문제에 모두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주장은 인이라는 본질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로만 꽉 채워져 있게 됩니다.
노자가 공자와 달라지는 가장 근원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본질’을 긍정하면 확장의 최극단인 ‘이상’이 설정될 수밖에 없고, 이 이상은 ‘기준’으로 기능하겠지요? 기준은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작용을 합니다. 배제와 억압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갈등이나 차등화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준을 전제하는 한, 극단적인 경쟁과 폭력의 가능성을 없앨 수 없다고 봅니다. 사회는 경직되고 자율성은 발휘될 길을 잃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보도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를 폐쇄적이고 경직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면, 그런 부정적 기능을 조장하는 ‘기준’이 건축될 길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기준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바로 본질을 출발점으로 해서 형성됩니다. 이런 인식에 도달한 노자는 바로 ‘본질’ 자체를 부정하게 되고, 본질과는 젼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알아낸 ‘관계성’입니다. 노자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노자가 파악한 세계의 관계성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유’와 ‘무’라고 하는 두 대립면의 상호 관계라는 것입니다.(122-123p)
《도덕경》 제1장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구절의 바로 뒤를 다음과 같이 이어갑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한다.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123-131p)
노자는 ‘공간’이나 ‘시작’이나 ‘출발’처럼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이 세계가 작동되거나 존재하도록 하는 어떤 영역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영역을 그는 ‘무(無)’라고 표현하였지요.
그럼 유(有)는 무엇일까요? “유 명만물지모”에서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혹자는 유가 만물의 어머니이니 만물도 모두 유가 낳은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 해석하는데, 잘못된 풀이입니다. ‘모’라는 글자는 원래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형성화한 글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있듯이 모든 만물을 다 포괄한 상태에서 그것을 통칭하여 ‘유’라 이름붙인다는 뜻이지요.
우리에게 지금 익숙한 세계관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노자의 무와 유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이른 겁니다.(126-127p)
‘무’와 ‘유’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데에는 노자의 의도와 전략이 깔려져 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시작’이나 ‘출발’처럼 자신의 존재성은 없으면서도 구체적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런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무’라는 범주를 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는 텅 비어 없는 것이지만 유가 존재하고 쓰임새가 있도록 하는 위대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다른 것들이 있는 것처럼 자신만의 모습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있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묘(妙)하다’고 하는데, 세계의 이런 상태를 드러내 보이려고 ‘무’라는 범주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노자는 ‘유’라는 범주로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을까요? ‘요(徼)’한 상태란 경계를 말합니다. 실루엣이지요. 노자가 보기에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루엣을 가집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기 위해 ‘유’라는 글자를 쓴 거예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주역》의 시각을 근거로 말한다면, 이 세계는 모두 ‘음’과 ‘양’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도 음과 양의 관계로 되어 있어요. 노자가 볼 때 이 세계는 모두 ‘유’와 ‘무’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유와 무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130-131p)
노자에 따르면 세계를 개괄하는 대표적인 두 범주, 즉 세계의 대표적인 두 차원 혹은 두 영역인 유와 무는 공존하고 서로 협력합니다. 서로 의존합니다. ‘동출(同出, 같이 나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중략) 노자에겐 ‘유’와 ‘무’가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근거를 두면서 공존한다는 사실이 대단히 현묘하게 비춰진 것입니다.(132p)
노자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계는 무 계열과 유 계열의 두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다. 이 두 대립면의 긴장과 공존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죽는 것도 태어나는 것도 유와 무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유무의 대립과 긴장 위에서 벌어진다는 게 《도덕경》 제1장의 내용입니다.(134p)
검을 현(玄)과 어두울 명(冥)은 두 글자 모두 검은 것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어슴푸레하고 어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흐릿하게 공존하거나 일체가 되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노자에 따르면 두 대립면인 유와 무가 같은 차원에서 서로 꼬여 있다는 도식이 이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형식이자 운행 원칙입니다.(134p)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해서, 세계의 모든 것들은 나타나서 잘 자라다가 늙고 사라집니다. 이는 세계의 만물이 들락거리는 문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중략) 문은 무엇이 나오는 출구의 기능도 있지만, 무엇이 들어가는 입구의 기능도 있습니다. 문은 들어가고 나감이 교차하는 ‘묘한’ 장치입니다. 종착역이나 출발역이 아니라 환승역인 것입니다. 노자에게 그 문은 들기도 하고 나기도 하는 들락거리는 경계이지, 만물이 발생되어 퍼져 나가는 일방통행의 관문이 아닙니다. 유와 무의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움직인다는 점을 바로 이 들락거리는 문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135p)
노자는 인간의 본질, 본성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와 무의 대립과 긴장,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이 세계가 이뤄져 있다는 세계관이 노자 《도덕경》의 내용 전부가 근거하는 뿌리입니다. 노자는 이 세계를 본질론적 실체관이 아니라 관계론으로 해석합니다. 유와 무의 상호 관계를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표현합니다.
《도덕경》 제2장에 나오는 유무상생을 우리는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준다’로 해석합니다. 유는 무를 살려주고, 무는 유를 살려준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가 유인 이유는 유 자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성질 때문이 아니라 무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유가 되고, 마찬가지로 무도 무 자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성질 때문에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본질론과는 전혀 다르지요?(135-136p)
노자의 관계론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본질을 강조하는 데카르트의 입장을 살펴볼까요?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도 없고 환원이 불가능한 두 개의 실체를 상정합니다. 하나는 정신이고 하나는 물질이지요. 당연히 정신과 물질은 실체(substance)입니다. 즉 각자의 존재를 위해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만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은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 두 실체는 존재론적인 의존관계를 전혀 갖지 않습니다. 정신의 본질은 정신에 고유하게 갖춰져 있어서 정신을 정신이게 해주면서 정신을 물질과 구별시켜 주는 ‘사유’이고, 물질의 본질은 물질에 고유하게 갖춰져 있어서 물질을 물질이게 해주면서 물질을 정신으로부터 구별해내는 ‘연장(延長)’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신이 정신인 이유는 정신 그 자체에 있고, 물질이 물질인 이유도 물질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지요.(136-137p)
무는 그의 대립면인 유와의 관계에 의해서 무가 되고, 유는 그의 대립면인 무와의 관계에 의해서 유가 됩니다. 대립면과의 상호의존관계,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형식인 것입니다. 노자는 바로 이런 유무상생의 존재형식에 ‘도’라는 명칭을 붙일 뿐입니다. 이것이 《도덕경》 제25장, “억지로 거기 글자를 붙여 ‘도’라고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137p)
‘도’는 하나의 형식이거나 원칙 정도의 의미만 갖는 범주일 수 있지요. 더 나아가보면, ‘도’는 어떤 무엇온라인 카지노 게임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유무상생이라는 세계의 존재형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기호나 글자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 도는 이 세계의 발생 근원도 아니며 실체도 아닙니다.(138p)
불교와 주역 그리고 노자의 세가지 세계관을 비교해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자 : 유무상생(有無相生) → 도(道)
《주역》 : 일음일양(一陰一陽) → 도(道)
불교 : 본무자성(本無自性) → 공(空) (140p)
《도덕경》 제25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혼돈스러운 모습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루어져 있으면서,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외양도 없어라.
홀로 서 있으며 달라지지 않는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운행하면서도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 세상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것의 이름을 모르지만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말할 뿐이다.(141-142p)
혼돈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유’와 ‘무’가 뒤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유’와 ‘무’가 새끼줄처럼 꼬이듯이 상호의존해서 천지자연과 삶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지요. 세계의 모든 현상은 대립면의 상호의존관계로 되어 있지만, 그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개괄하는 ‘도’는 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도’는 대립면의 관계와 변화를 드러내 보여주는 범주이기 때문에, 세계를 단일한 의미로 제한하고 정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개념’과는 잘 맞지 않지요. ‘도’는 존재하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글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철학에서는 ‘도’는 없는 것이라 해도 됩니다.
그럼 무엇이 실제로 있는 것입니까? 실재로 활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유무상생의 꼬임이지요. 만약 노자의 철학 안에서 ‘득도(得道)’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유무상생의 원칙을 체득한다는 뜻일 겁니다.(142-143p)
노자가 “도는 개념화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변화와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개괄하는 범주인 ‘도’를 고정하고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언어’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가 거대하고 초월적이어서 개념화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새끼줄처럼 꼬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의미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147p)
노자의 철학에서 ‘동(同)’, ‘현(玄)’, ‘혼(混)’, ‘일(一)’, ‘도(道)’는 결국 울타리 없이 한 마당에서 같이 지내는 근친간의 관념들인 것이죠. 모두 대립면의 공존, 관계, 단절된 경계의 무화(無化), 뒤섞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47p)
4강 가짜에 속지 않는 법,관계론
피터 월리가 쓴 《철학가게》에는 다음과 같은 모차르트의 말이 나와 있습니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157p)
세계를 보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거칠게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 세계는 ‘무엇’ 혹은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계가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시각이지요. 쉽게 말하면 어떤 것을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보는 시각과, ‘이것은 다른 여러 것과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시각으로 나눌 수 있다는 거예요.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실체론’과 ‘관계론’이 됩니다.
모더니즘과 유학은 ‘실체론’에 가깝습니다. (중략) 유학은 ‘실체론’, 정확히 말하면 ‘본질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공자가 발견한 ‘인’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이자 근거이지요. 이 ‘인’이 있어서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이라는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토대로 해서 인간성이 확장되고 인간으로서 성숙된다는 겁니다. ‘관계론’에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교, 도교, 《주역》의 세계관이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8-159p)
본질은 존재론적으로 그 존재에 대하여 ‘선’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반드시 그것이 가진 ‘본질’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본질’을 인정하게 되면 가치론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본질’이라는 말에는 다른 어느 것보다 그것이 우선한다, 그것이 더 좋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결국 이 ‘우선성’과 ‘좋음’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이상적인 단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고, 그 이상적인 단계는 항상 기준으로 기능하게 되지요. 그래서 본질을 인정하면 기준이 당연히 형성되고, 기준이 있으면 당연히 그 기준에 따른 평가가 도출되겠지요. 평가는 바로 가치론적 구분을 하는 것이에요. 따라서 본질주의는 기본적으로 가치론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160p)
‘사실 지향의 철학’에서는 일단 가치론적 기준으로 이 세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가치론은 선악 등의 판단 기준을 갖고 이 세계와 관계하지요. 기준을 가지게 되면 구분하게 되고, 구분한 후에는 배제나 억압의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지향의 철학’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확정된 기준을 삶의 근거로 사용하면, 세계와의 관계도 그 기준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면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왜곡되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마음속에 자리한 가치론적 판단 장치를 덜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노자가 《도덕경》 제48장에서 “도를 행한다 함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덜어내야 할까요? 가치론적 판단규제를 약화시키라는 뜻이에요. 노자는 가치론적 판단 기준을 모두 걷어내고, 이 세계를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단계를 ‘무위(無爲)’라고 합니다. ‘무위’란 어떤 가치론적 장치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예요. 가치론이 모두 사라지면 ‘사실’만 남게 됩니다. 세계 본래의 진실이 드러나는 격이지요.(161p)
불교에서 인간이 업을 쌓는 이유는 그림자처럼 느슨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말해 ‘가유(假有)’로 존재하는 것ㄷ르을 실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진실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의 진실한 상태, 진실한 모습을 모르기에 그림자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을 아는 경지를 불교 용어로 ‘각(覺)’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다시 말해 이 세계가 그림자처럼 존재한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집착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162-163p)
떠난 버스가 자신이 탈 버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을 짓는 행위입니다. 버스는 그냥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말이죠. 상을 짓는 행위,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해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所有)’입니다. 평등한 세계를 자기 뜻대로 소유해버리는 것이죠. (중략) 사람들은 흔히 불교의 ‘소유’ 개념을 오해합니다. 《무소유》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 돈이 많은 사람들이 가끔 “난 가진 게 너무 많아. 이걸 내가 버릴 수 있어야 해”라고 하거든요.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즉 다가오는 버스를 어떤 가치론적 의도도 없이, 버스 시간표에 따라 그냥 무심히 타는 것이 ‘무소유의 태도’이지요. 이것이 바로 사실론적 태도이며, 거기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중략) 요약하자면,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 잘 맞지 않는데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집착이지요. 집착은 고통을 낳습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업이 쌓이고 결국 윤회의 틀에 갇히게 돼요. 불교에서는 그래서 ‘실상’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실상’이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실상은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입니다.(164-165p)
부처의 말씀과 해석들은 모두 그 방대한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지만, 《대장경》의 방대한 내용을 산출하는 부처의 근원적 깨달음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 이 깨달음의 내용을 두 글자로 줄이면 ‘인연(因緣)’이 되겠지요. 이것이 불교가 세계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입니다. ‘인연’을 요즘 말로 옮기면 ‘관계’예요. 이 세계가 인연으로 되어있다 함은 이 세계가 실체로 되어 있지 않고 관계로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166-167p)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저서에서 어떤 단어, 어떤 말에 그것이 지칭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는 ‘본질론’적 언어관과 상반되는 ‘관계론’적 언어관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름답다’는 말 속에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본질론’적 언어관), ‘아름답다’라는 단어의 주위를 둘러싼 다른 단어들, 예를 들어 추하다, 더럽다, 느끼하다, 귀엽다, 애교스럽다, 무뚝뚝하다, 거칠다 등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차이’에 의해 ‘아름답다’는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의미는 발굴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차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장치가 되지요.
소쉬르를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이자 현대 철학을 연 선구자로 꼽는 이유는 바로 언어학적 차원에서 이처럼 본질주의적 실체관을 극복하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그 단어를 지탱하는 본질적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 즉 ‘관계’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관점은 관계론의 전형적인 전개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관계론적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 하나의 기준에 대한 건립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본질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틀, 하나의 기준을 설립할 수밖에 없겠지요.(171-172p)
불교는 이 세계가 모두 인연으로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관계의 연합으로 되어 있다고 봤지요. 그런데 《주역》은 이 관계 전선을 남성성(양)과 여성성(음)이라는 두 개로 압축합니다. 노자는 이 세계를 유와 무의 관계로 봤습니다.(188p)
고대의 사유에는 원래 대립되는 것을 하나의 층차로 이해하는 사유가 이미 있었어요. ‘란(亂)’이라는 글자가 있지요. 이 글자에는 ‘어지럽히다’는 의미와 ‘정리하다’는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어지렵혀야 정리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을 놓치다보니 수많은 오역이 난립합니다. 이처럼 대립면을 하나의 사건 즉 하나의 세트로 이해하는 사고가 훨씬 더 원초적 사고예요.
잠에서 깬다고 할 때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깨다’라는 의미를 가진 ‘각(覺)’이라는 글자에는 ‘잠’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 글자에 ‘깨다’와 ‘자다’라는 대립되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이죠.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영어의 ‘birbe’란 단어에도 ‘뇌물’과 ‘선물’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함께 들어 있지요. 또 ‘약’을 의미하는 ‘medicine’이라는 단어에는 대립적으로 사용되는 ‘독’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대립적인 관계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근원적 사고의 형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점점 개념화가 진행되면서 대립되는 의미가 분리되고, 그 대립면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을 것입니다.(189-190p)
공자는 ‘예’라고 하는 보편적 기준을 설정했지요. 목적을 정한 겁니다. 본질주의는 목적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자의 세계관 속에는 목적론이 자리할 수가 없습니다. 최초 출발점이나 최종 도달점, 본질 등의 개념이 함께할 수 없지요. 이런 형태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관계론을 전제해야 합니다. 노자의 ‘거피취차(去彼取此)’나 ‘작은 나라론’은 필연적으로 그의 관계론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191p)
5강 왜 현대 철학자‘노자’인가
노자 사상의 기본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응용하자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질서를 노자는 ‘도’라고 일렀지요. 노자는 세계를 ‘유’의 영역과 ‘무’의 영역으로 나누고, 이 둘의 꼬임으로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197p)
사실 동양철학은 신흥 학문이에요. ‘철학’이라는 번역어가 동양에 들어와 학문으로 본격 진행되는 것이 1847년부터입니다. 1847년 일본 학자인 니시 아마네가 ‘philosophy’라는 단어를 ‘철학(哲學)’으로 번역하면서 철학이라는 말이 동양의 학술계와 사상계로 진입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철학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의 하나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어요.(198p)
당나라 말엽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은 유학의 부흥을 시도하는데, 이 과업이 송나라 때 완성되지요. 특히 주자가 완성한 새로운 형태의 유학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유학(新儒學 -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이라 합니다. 유학에다가 ‘신’이라는 글자를 붙인 이유는 유학이 선진 시대나 한당(漢唐)의 그것과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새롭게 무장했다는 뜻입니다. 그 ‘새로움’은 다름 아닌 ‘형이상학’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도덕적 활동의 근거를 인간의 내면성에서만 확보하지 않고, 전체 우주의 보편 원리와 연결시키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와 연결되어 보편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신유학의 새로움을 말해주는 형이상학적 체계는 모두 ‘리(理), 기(氣), 성(性), 태극(太極)’ 등등의 용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두 도교에서 사용되던 범주들입니다. ‘리’라는 범주는 불교에서도 특히 중심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용하던 범주이지요. 그것은 중현학 체계가 신유학 체계에 그대로 수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신유학의 성립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도교와 불교의 이론 투재이 및 융합의 과정이 없었다면 송대의 신유학 성립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주자라는 거목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고 주자학이 형성될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탄생한 주자학 이후 유학의 흐름은 명대 양명학(陽明學)온라인 카지노 게임, 청나라 때 고증학(考證學)온라인 카지노 게임 스펙터클하게 변화합니다.(200-201p)
청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서양과 중국의 경제적 격차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이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토인비라는 역사학자가 1760~1840년까지 영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요. 산업혁명은 서양사회의 일대 혁신이었고 영국인들은 이 혁신의 물결에 적극 올라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합니다. 이를 통해 획득한 막대한 ‘부’와 ‘힘’이 영국 내부에 머물지 못하고 외부로 확산되게 됩니다. 바로 제국주의지요. 그런데 이때 중국은 철학적 한계에 도달한 겁니다. 그리하여 영국이라는 새로운 힘 앞에 처철하게 굴복합니다.(202p)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라는 영국 출신의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서양의 수천 년 철학사를 일별하여 이르기를 “서양 철학사는 모두 플라톤의 각주이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철학을 다양하게 풀이한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플라톤은 세계를 ‘완벽한 세계’와 ‘완벽하지 않은 세계’로 나누었습니다. 본체계와 현상계로 나눈 것이지요. 본체계를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 세계는 관념의 세계예요. 완벽하려면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는 사유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서양의 주류철학에서 볼 때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모두 변합니다. 또 유한합니다. 따라서 완벽한 세계, 진리의 세계가 아닙니다. 관념에 비해 부족한 세계예요.
그렇다면 서양 사유에서 진리는 ‘이곳’에 있을까요, ‘저곳’에 있을까요. 당연히 ‘저곳’에 있겠지요.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의 삶에 매달리는 한 모두 부족한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진리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 주류 철학에 의하면 진리의 세계, 참의 세계는 항상 사유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사유의 구조물입니다. 완결된 사유의 구조를 서양에서는 ‘철학’이라고 보는 거예요.(205-206p)
공자보다 유학의 철학을 더 치밀하게 구조화한 철학자는 맹자입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해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동물에게 없는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네 가지 심리현상이 있으니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옳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이른바 ‘사단(四端)’입니다. 사단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고, 이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되지요. 그래서 맹자 철학에서는 이 사단이 바로 인간의 본성(性)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지요.(207-208p)
사유의 구조물인 서양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들의 조직으로 되어 있어요. 이 조직은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으면 진짜인지 검증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논리학이 발달한 이유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놓고 사유를 하기 때문이에요. 철학 자체가 사유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사유 전체의 치밀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동양의 사유는 치밀성보다는 경험의 확실성, 경험의 소통이 더 중요했고, 따라서 논리학이 그렇게 핵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209p)
서양 근대철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가장 근원적인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토대, 즉 본체ㆍ실체ㆍ기원 같은 단어들이 굉장히 긍정적인 어휘가 되는 거지요. 더불어 이 실체론적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와 합리적 관계를 맺도록 지탱해주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정신이 육체에 비하여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모든 서양 사상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죠. 이런 까닭에 서양 철학에서는 실체ㆍ실체본질ㆍ이성ㆍ정신 등이 항상 앞장 서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이런 흐름의 최절정에 도달한 철학자로 헤겔(Hegel, 1770~1831)을 지목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정신의 왕국, 이성의 왕국으로 이 세계를 해석하지요. 그런데 헤겔에 의해서 극에 이른 다음, 전혀 반대의 주장이 나타납니다. 그 선봉이 포이어바흐(Feuerbach, 1804~1872)라는 철학자인데, 그는 헤겔의 절대정신을 사라져야 할 신이 부활해버린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는 헤겔의 사상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는 헤겔의 이성(정신)의 왕국으로서의 세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계는 인간의 의식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포이어바흐의 세계관은 헤겔식의 정신 우위를 뒤집어서 신체 우위를 주장하고, 이성 우위를 거꾸로 뒤집어서 감성이나 감각의 우위를 주장합니다.(210-211p)
현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나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나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 사람을 기점으로 현대를 해석한다면 결국 이성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지요. 칼 마르크스는 우선 근대적 세계관에서 가장 중심적 지위를 차지했던 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성을 가지는 물질의 부산물로만 존재한다고 폭로합니다. 매우 분명하고 명징한 이성적 활동들이 사실은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같은 물질적 기반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버리지요.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현대를 엽니다. 그는 인간의 의식 활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트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 인간의 의식 활동은 바로 명징한 이성의 활동일 뿐이었죠. 그런데 프로이트가 등장해서 오히려 이성적 활동으로 보였던 것들은 사실 성적인 의미가 강한 무의식의 발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뿌리는 이성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내용으로 하는 무의식이라는 것이죠.
들뢰즈(Gilles Delleuze, 1925~1995)는 그의 저작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바로 현대라는 것이죠. 니체가 왜 현대입니까? 그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하죠.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입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입니다. 육체성은 바로 구체성입니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 대신에 욕망온라인 카지노 게임 설명되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됩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존재하여 공통의 비율과 공통의 계산력을 사용하지요. 그래서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이해하면서 인간에게는 점점 물질(육체)이 더 근본적인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욕망은 집단보다는 개별자에게서 더 분명히 확인되죠.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적 통합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융합온라인 카지노 게임 무게 중심이 이동할 것입니다.
현대에세는 세계를 해석할 때 사유보다는 무시되었던 경험이 새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이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집단에서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우리가 맞이한 현대입니다. 노자의 ‘현대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212-214p)
유가와 도가는 분명히 차이가 있긴 합니다. 유가는 채우고 채우고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고, 도가는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거든요.(215p)
6강 지(知)가 아닌 명(明)으로 본다는 것
서양 사람들은 아주 최근까지 자본주의가 매우 합리적인 제도이며 합리성의 절정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발달 정도로 한 사회의 합리적 성숙도를 가늠하기도 했지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라는 사회학자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개신교 윤리,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부재에서 찾았을 정도입니다.(220p)
근대까지 서양철학의 주류는 본질을 근간으로 한 실체관이고 이 실체관의 확산은 이성을 통해서 수행됐다고 했지요.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사유의 구조물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경험의 세계, 현상 세계, 실제 존재하는 세계, 감각의 세계를 수준이 낮은 세계로 보는 이유는 변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또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의 세계, 현상의 세계의 기본 특징은 변한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무한하고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사유의 세계, 이성의 세계, 관념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 비해 수준이 낮다고 여기는 겁니다.
현상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세계가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유의 세계를 놓고 보면 이 변하는 것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겠지요. 가변적인 유한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변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서양 철학의 출발점입니다.(223-224p)
공자, 노자는 자신들의 철학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기본 틀을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냅니다. 이는 현상을 긍정하는 겁니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경험하는 것이 실재의 세계, 참세계라고 보는 겁니다. 현상이 진실, 눈앞에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죠.(224p)
중국에서 발생하고 성장한 종교가 있습니다. 바로 도교입니다. (중략) 대부분의 종교는 현실을 ‘떠나야 될 곳’으로 봅니다. 현실을 부정해요.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이 세상’은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죄지은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떠나야 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 혹은 진리가 있는 완벽한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이처럼 단절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초월입니다.
그런데 도교에서는 현실 세계의 제도가 천상의 세계에 그대로 존재합니다. 현실 세계와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현실세계를 연장해버립니다. 이 사람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바로 ‘여기’이기 때문에 ‘여기’와 단절된 ‘저 세상’으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연장해서 ‘저 세상’과 연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중국인의 실용주의, 실리주의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224-225p)
최근에 서양 철학의 한 분야를 포스트모더니즘이 차지하고 있지요. 모더니즘 이후의 철학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텍스트(text)’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텍스트는 텍스타일(textile)이나 텍스처(texture)와 깊은 연관이 있는 말입니다. 즉 이 세계는 마치 직물이 짜여 있듯이 교직(交織)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이 세계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하게 있거나 온전하게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으로 짜여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도 기원을 이루는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어떤 근원적인 토대에서 연역되었거나 그 토대를 기반으로 서 있는 것으로 보는 대신 관계성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 바로 본질주의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본질주의적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본성의 존재성은 당연히 부정되겠지요.(226-227p)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知)’의 방법이 아니라 ‘명(明)’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통찰입니다.(229-230p)
7강 ‘안다’는 것은 결국‘모른다’는 것
과거의 통치자는 스스로를 고인(孤人, 부모가 없는 사람), 과인(寡人, 남편이 없는 사람), 불곡(不穀, 곡식을 번창하게 하지 못할 사람), 짐(朕, 조그많게 갈라진 틈 혹은 그림자와 같은 사소한 사람) 등온라인 카지노 게임 칭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낮게 부르는 겁니다. 이로써 현재 가진 고귀함이 낮은 것, 천한 것을 기초로 이뤄졌음을 끊임없이 자각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고귀함이 낮은 것과의 꼬임온라인 카지노 게임 되어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 한 것이죠.(241p)
도가사상에는 ‘광이불요(光而不耀)’와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표현들도 있습니다. ‘광이불요’란 ‘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외부의 것들을 제압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절제와 그 절제가 빚어내는 탄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화광동진’은 ‘자기 빛을 다른 흙먼지들과 함께 펼쳐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빛이 난다 함은 하나의 방향으로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대립면의 긴장을 품은 사람은 하나의 빛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슬처럼 빛나지 않습니다. 그대신 돌처럼 소박하지요.(242p)
자기 의견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토대가 얕아요. 자기 의견이 과감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넓이가 좁아요. 경계를 품은 사람은 과감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진리임을 확신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무식한 사람은 용감합니다.(244p)
잠깐 ‘지식(知識)’이라는 글자를 풀이해볼까요. ‘지’는 보통 지혜라고 풉니다. 일반적인 지식보다 좀 더 높은 깨달음이 있는 앎을 뜻하지요. 그런데 고대에는 이 글자가 그리 많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아(爾雅)》라는 일종의 고대 한자사전이 있는데 그 책에서는 ‘지’를 단혈지인(丹穴之人), 즉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 풀이해 놨어요. 구멍온라인 카지노 게임 세상을 보는 사람, 요즘 말로 하면 전문가입니다. 또 질서정연하고 조리가 잘 갖춰진 상태라고도 풀이해 놨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 ‘지적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해요. 왜 그랬을까요? 노자가 볼 때 ‘지’라는 것은 제한적인 앎이고 구분해서 아는 앎이라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철저하게 믿는 작은 대롱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라 그렇습니다.(245-246p)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 《도덕경》 제33장 - (246p)
공자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행위 원칙, 즉 보편적인 이념을 기준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 보편적인 행위 원칙을 ‘예’라고 하지요. 예에 맞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행함으로써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으로 계속 성숙해간다는 거예요.
예에는 반복 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습(習)’이지요. 그런데 반복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과 내가 무엇으로 구분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나와 상대방이 위치하고 있는 좌표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죠. 그 구분의 정도가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예요. 그 구분을 표시하도록 정해진 것들이 바로 개념(名)이고 말(言)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위치하고 있는 좌표를 인식하고 적절하게 하는 행동이 바로 ‘예’에 맞는 행위가 됩니다.(248-249p)
《도덕경》에는 “봄날 얼음이 풀리듯이 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얼음이 풀리는 그 경계 지점은 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얼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모호한 상태이지요. 경계가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려 들지 말라는 것은 경계가 모호한 것 그 자체가 세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모호함을 명료함으로 개선하려는 순간 세계의 실상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 모호함은 명료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어버려야 할 것이지요.(250p)
광신하는 사람은 대개 헛똑똑이라는 말입니다. 충혈된 눈으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주장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띠를 하고 내달리는 사람, 서둘러 충고하려 덤비는 사람이 대개 헛똑똑이라는 것입니다.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252p)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 <거미줄, 정호승 - (253p)
노자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이라고도 합니다. 말이 많으면 쉽게 궁색해진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불여수중(不如守中), 즉 ‘중(中)’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했어요. 여기서 말이란 개념입니다. 중이란 유무상생의 중간, 대립면의 긴장을 자아내는 그 경계의 칼날입니다. 개념화된 지식이 겹겹이 쌓이고 무거워질수록 쉽게 한계에 부딪힌다는 뜻이지요.(254p)
어느 단계에서는 배움의 고삐를 늦춰야 할 때도 있지 않겠어요? 배움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다 보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이러지 않나요? 우리가 배우는 목적이 뭡니까? 결국 언젠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당위의 문제에 해당됩니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중략)
그러니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배우는 목적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다’라는 생각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남의 말만 듣고, 남의 말만 쫓아다니며, 남의 글만 들이파는 일로 평생을 바친다면 이는 복종적으로 혹은 굴종적으로 사는 것밖에 안 됩니다. 자기 표현이 부족한 것은 많이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이나 배짱이 작아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중략)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 차지하는 배움의 비중이 줄어야 합니다. 배움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대신 자기를 표현하려는 용트림을 해야 해요. 공부에 몰두하다가,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배우다가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잃지 말아야 할 야수 같은 눈빛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자기 눈에서는 원초적인 힘찬 눈빛이 사라집니다. 공부는 내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해요. 이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自律)’이라 했습니다. 자율이란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255-257p)
8강 무위,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태풍이 거세게 불어 모든 나무가 서 있기도 힘든 듯 흔들릴 때,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그 나무는 분명히 죽은 나무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립니다. 하지만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살아 있어야 흔들리고, 살아 있는 것이어야 부드럽습니다.(265p)
노자가 볼 때 마음 속에 하나의 기준을 갖는 것, 전체 사회가 하나의 이념으로 묶이는 것은 ‘뻣뻣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념을 가지면 뻣뻣해지지요.(265p)
성공한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역설적이게도 ‘성공 기억’이라고 합니다. 성공했던 기억이 자기를 뻣뻣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략) 살이 있는 인간으로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개념에 갇히면 안 되고, 개념에서 벗어나거나 개념의 구축물을 지배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배움을 통해 배우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습득하는 것이며, ‘이미 있는 것’은 모두 개념의 구조물이에요. 지식화되어 있지요. 이 구조물을 내면적 힘 없이 그대로 수용할 경우 금세 뻣뻣해지고 맙니다.(266p)
유가사상의 구도를 다른 말로 풀자면, ‘여기 있는 내가 이상적인 곳온라인 카지노 게임 설정된 저기로 부단하게 전진해가는 엄숙한 노정’입니다. ‘내’가 ‘우리’로 바뀌는 과정이고, 개별성이 집단성온라인 카지노 게임 변하는 과정이고, 개별성이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입니다.(267p)
다섯 가지로 구분된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다섯 가지 구분된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한다.
다섯 가지 구분된 맛은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
말을 달리며 즐기는 사냥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
이러하기 때문에 성인은 배를 위할망정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도덕경》 제12장 - (267-274p)
노자는 세상의 구분을 만들어내는 그 기준을 인위적 관념의 산물이라고 봤어요. 왜 그런 기준 아래 개별적 자아가 주눅 들고 고통 받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노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앤 후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고 봤습니다. (중략)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은 바로 사냥꾼이 정해놓고 내달리는 목표물과 같은 격이지요. 마치 사냥을 하듯이 이런 목표물을 향해서 내달리도록 구조화된 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는 지경으로까지 내몰 수 있다는 뜻입니다.(270p)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얻기 어려운 재화,비싼 물건의 가치는 문화적 조건 속에서 결정됩니다.그 사회의 문화 기준,보편적 이념이 형성한 기준에 의해 비로소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갈리지요. (중략)노자는 귀천이 분명이 정해진 사회는 기준이 분명한 사회고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은 항상 강압적인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271p)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극기복례에서 ‘기’는 이것, ‘예’는 저것이라고 했지요. 공자의 극기복례를 노자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자면 ‘거차취피(去此取彼)’가 될 겁니다. 노자는 반대로 주장하지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공자가 주도권을 ‘저곳’에 두었다면, 노자는 ‘이곳’에 둡니다. 공자가 저쪽을 이상적인 곳으로 설정하고 그리로 가자고 주장했다면, 노자는 ‘이곳’에 집중하여 여기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합니다.(274p)
노자는 이 세계가 모두 손님들의 연합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유’는 ‘무’를 손님으로 맞이해서만 ‘유’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갖고, ‘무’는 ‘유’를 손님으로 맞이해서라야 비로소 ‘무’로서의 존재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자 사상의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남자는 남성성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인 것이 아니라 여자라는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남성으로 드러납니다. 여성은 여성성 때문에 여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에 의해 여성으로 드러납니다. 모순의 공존으로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인일 수가 없습니다.(280p)
《도덕경》에서는 ‘도’의 성격을 묘사하거나 ‘도’를 체득한 사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할 때, ‘텅 비어 있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충(沖)’ 자를 쓰기도 하고, ‘허(虛)’ 자를 쓰기도 하지요. 모두 존재를 채울 본질을 부정하는 관계론 철학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282p)
노자는 《도덕경》 제2장에서 ‘성공(成功)’이라 하지 않고, ‘공성(功成)’이라 했습니다. ‘성공’이라 하면 공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지만, ‘공성’이라 하면 공은 이루어지는 것이 됩니다. 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텅 빈 계곡은 이러한 ‘비본질’, 즉 ‘관계적’ 세계관의 의미를 담은 중요한 모티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283p)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도덕경》 제37장) 여기서 ‘무위’란 어떤 이념이나 기준을 근거로 하여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유위(有爲)’는 특정한 기준이나 신념 혹은 가치관 등의 지배하에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념이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이나 기준을 머리에 이고 숭배하면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밟고 선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준이나 이념 혹은 신념도 모두 구체적인 세계에서 형성된 관념의 구조물일 뿐입니다. 이 관념의 구조물은 만들어지지마자 썩기 시작할 수밖에 없죠. 생산되자마자 구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세계는 그런 관념의 구조물을 남겨둔 채 계속 앞으로 전진하거든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진리로 포장하여 높이 받들고, 그것들에 의존하여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고 거기에 적응하려 합니다. 썩고 굳은 관념의 구조물로 변화하는 세계와 접촉하는 일은, 결국 세계를 과거의 거기에 붙잡아두려는 꼴이 되고 맙니다. 무위란 바로 이런 이념이나 기준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변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접촉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니느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위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고 적절히 반응한다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그것이 바로 ‘무위’의 결과로 나타난 무불위(無不爲), 즉 ‘되지 않을 것이 없다’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287-289p)
신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경박합니다. 이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가볍습니다. 진리에 대한 신념이 강한 만큼 행동의 근거가 너무나 분명하거든요. 이 분명한 근거로부터 확신을 부여받는 순간 과감해져버립니다. 반면 이념에 집중하지 않고, 세계 자체에 몰두하는 사람은 세계가 관계와 변화 속에 있음을 인지하고 변화를 발생시키는 중첩된 경계들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경계에 서는 혹은 대립면을 품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죠. 이런 사람의 행동은 과감하지 않고 중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손님이 중후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293p)
꾸며진 세계는 화려합니다. 장식이 되어 있으니까요. 모든 장식은 인위적 조작입니다. 언어적이고 개념적이며 이념적이죠. 참된 모습, 즉 실재의 세계는 개념화되지 않은 내면, 관계를 품은 경계성의 마음, 구획되지 않은 채 동력온라인 카지노 게임 존재하는 마음에 의해서만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바로 지금 – 여기의 실재를 가리킵니다. 실재는 나의 내면, 나의 바탕, 지금 – 여기, 사건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구체적인 세계 및 현재를 의미하지요.(294p)
저기 있는 이념의 구조물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고, 실재의 이곳은 웅성되는 개별자들로 구성되어 있지요. 결국 노자의 시선은 당연히 ‘우리’보다는 ‘나’에게 집중됩니다. ‘저것’보다는 ‘이것’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공유하고 지향하는 이념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은 저 이념을 기준으로 해서 세계와 관계하고 접촉합니다. 이것을 노자는 ‘유위’라고 하죠. 우리가 공유하는 이념이나 신념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자발성에 주도권을 두고 하는 행위를 ‘무위’라고 하고요.(294-295p)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도덕경》 제48장)
《논어》의 첫 글자는 ‘학(學)’, 《도덕경》의 첫 글자는 ‘도(道)’입니다. (중략) ‘학’ 또는 ‘배움’의 출발은 모방입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모델로 해서 그것을 모방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유학은 기본적으로 쌓아가는 학문이 될 수밖에 없지요. 성인의 말씀을 쌓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학’을 함은 날마다 무엇인가를 더 하는 일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말하는 ‘도’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무엇인가를 날마다 덜어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혹자는 노자의 말 그대로 머리에 든 것을 다 덜어내면 너무 무식해지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노자의 ‘손(損)’은 더하기 빼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에게 이미 있는 지식, 이념, 신념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면 그것들이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이제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 본래의 자발적인 내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지식이나 이념 혹은 신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동력으로 세계와 직접 마주하는 것이죠. 약화된 것들을 밟고 우뚝 서는 것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욕망, 나의 표현력, 나의 충동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겁니다.(296-297p)
‘무위’란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아닙니다. ‘무위’란 세계와 관계할 때 기존의 견고한 틀이나 방식에 갇힌 상태가 아님을 뜻해요. 이미 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이 고유하게 생산한 자신 만의 문제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하는 겁니다. 세계를 볼 때 기준을 갖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론을 가지고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태도가 ‘무위’입니다.(298p)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도덕경》 제48장)
‘무사(無事)’가 뭡니까?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겁니다. ‘유사(有事)’가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특정한 이념의 틀 안에서 일하는 것이라면 ‘무사’는 개방적인 상태에서 자율성에 따라 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한다기보다 일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죠. 그러니 천하를 차지하는 일은 틀 안에 가두는 방식이 아니라 개방성과 자율성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300p)
사람들은 세계와 어깃장 나는 데서 방황합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세계의 변화는 사람에 맞추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감정이 없이 그저 변할 뿐입니다. 사람이 세계와 어깃장 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할 일은, 세계가 자신에게 맞추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에 맞추는 것입니다. (중략)
세계는 변합니다. 움직입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지요. 우리의 판단, 우리의 행동은 항상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해야 합니다.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함께하라는 것이 ‘무위’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304-305p)
9강 불편한 법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이 세상에 출현한 그 어떤 철학도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보편타당한 철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각 시대에 맞는 어떤 유형의 철학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 철학은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의 주도권은 항상 세계 자체에 있어요.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계가 어떤 형태를 띠고 움직이는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감지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구현하는지를 가늠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 어떤 믿음 체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에 대해 어떤 궁금증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지요.(312p)
노자의 모든 전략은 인간의 내면성을 지배하는 어떤 가치론이나 체계를 최대한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세계 자체가 진실 그대로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게 해보려는 것이지요. 자신의 가치론적 의지 없이 세계 자체의 실상 그대로에 반응하는 방식을 노자는 ‘무위’라고 표현한 것이지요.(313p)
우리가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식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과 지식을 다루고 이용하는 사람이지요. ‘이용’을 노자 식으로 말하면 ‘지식을 지배한다’입니다. 이론을 밟고 서서 지식보다 자신의 자발성을 더 드러내는 겁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지식과 경험에 갇혀 자신의 욕망이나 내면적 자발성이 거세되는 상황에 처하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자발성이 가장 전면에 드러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면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315p)
부모 자식 간에 왜 갈등이 생깁니까? 대부분은 부모의 선의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못될까 자식이 잘 못살게 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자식을 잘 살게 해주려는 목적온라인 카지노 게임 선의가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뒤집어 보면 자식을 불신하는 거예요. 자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언어와 지시가 가중됩니다.(321p)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뼈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고 더 예뻐지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취가 이루어집니다.(322p)
‘조심스럽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도덕경》 제17장)
노자 사상에서 ‘말’이라는 것은 이미 가치가 담긴 개념 체계들입니다. 따라서 말을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 함은 가치론적 주장을 최대한 줄인다는 뜻이지요. 이념 체계를 약화시키는 거예요.(325p)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세계가 특정한 ‘본질’ 위에 서 있지 않고,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음을 체득했다는 것입니다. 유무상생, 즉 ‘도’를 체득했다는 것이죠.(329p)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를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지만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버린다.
그런 부류가 비웃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 《도덕경》 제41장 - (330p)
밝은 길은 어둑한 듯하고
앞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며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고
가장 훌륭한 덕은 계곡과 같으며
정말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정말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고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다
- 《도덕경》 제41장 - (332p)
노자는 왜 대립면의 공존을 계속 강조할까요? 대립면의 공존을 강조해야 보편적 이념의 성립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립면이 공존할 때는 어떤 특정한 가치가 우월한 지위를 가질 수 없어요. 노자가 대립면의 공존을 ‘무위’를 실천하는 기반으로 항상 강조하는 이유입니다.(333p)
개인적으로 볼 때 자살하는 이유는 ‘자신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상태로 살아가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봐요. 그려면 왜 자기가 하찮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스스로를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 외부의 어떤 가치에 의해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략) 노자가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을 본다면 이렇게 진달할 것 같습니다. ‘이곳은 가치 기준이 대단히 분명한 사회로구나. 가치 기준이 획일되어 있구나.’ (335-336p)
길가에 돌멩이 하나도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가치가 없고 사는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 가치와 이유가 스스로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판단 기준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336p)
10강 ‘고유명사’로 살아간다는 것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 《도덕경》 제13장 - (345p)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혁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왜 완수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혁명을 하는 혁명가들 스스로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가라고 자처하던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사실 자기 자신은 혁명시키지 않은 채, 사회의 혁명만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교육되지 않았으면서, 사회와 타인에 대해서는 가르치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계몽되지 않았으면서, 조국과 민족을 계몽시키려 덤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물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혁명을 했는가? 아니면 혁명이라는 학습된 이념을 실천했는가?“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말합니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없는, 자기가 혁명되지 않은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347p)
우리는 흔히 자유와 평화는 큰 이념을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는 바로 자기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요. 모든 이념은 구체적인 실재에서 생산되고 실재의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전도되어 오히려 그것들이 실재를 지배해버리려고 덤빕니다.(348p)
철저히 자신에게 집중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회의 책임자로 등장시킬 때 사회에 대한 공헌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351p)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 시스템은 표준화보다는 각자의 특성에, 이념보다는 구체적 실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함축하여 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승문자를 회복하여 쓰게 하자“고 말합니다.
중국의 초기 문자는 새끼줄을 꼬아 만든 결승문자였습니다. 그다음에 손온라인 카지노 게임 새기거나 쓰는 글자가 등장하지요. 글자가 표준화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새끼줄로 꼬아서 하고 싶은 말을 표시할 때는 어떻겠습니까. 똑같이 생긴 글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통일적인 의미보다는 지역적인 차이랄지 결승하는 사람이 결승할 때 가지고 있던 정서나 상황 등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죠.(356p)
내 문화에서 나온 것이 보편 문화며, 내 윤리에서 나온 것이 보편 윤리며, 내가 만든 가치가 보편 가치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이미 있는 보편을 끌어와서 섬기지 말고, 자기에서 출발하여 보편을 형성하라는 것이죠.(360p)
노자는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와 ‘자기로 돌아가라’를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모두 개별자들의 자발성이 발휘되어 그것이 자율적으로 통합되는 전체를 꿈꾸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로 돌아가는 게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일반명사 속에 함몰되게 방치하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뜻입니다.(360p)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 (364p)
나는 내 윤리적 행위의 고유한 입법자다.
내 윤리적 삶은 나로부터 나온다.
내 삶의 원동력은 내가 작동시킨다.
나는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 (3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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