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코로나 시기의 삶
일단 돈을 벌어보자고 무작정 알바를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며 별 약속도 없으니 돈은 금세 벌렸다.
코로나 시기에 대학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친구들끼리 사이버대학교에 다닌다며 서로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카지노 게임은 당시 부상하던 카지노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대리만족하며,
귀가 후 시간을 때우기 위한 콘텐츠를 찾아 나섰다.
매일 집에서 ott로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가 영화 소모임에도 들어가고 독립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가 영화제에 걸려 GV도 해보고,
프로듀서로서 제작한 영화가 큰 영화제에 걸리기 시작했다.
이후 공익복무를 하면서도 틈틈이 영화를 보고 만들었다.
카지노 게임 잊고 살았다.
공익의 어느 나날 중, 수능을 마친 동생이 해외카지노 게임을 가자고 말을 꺼냈다.
마침 세계적으로 카지노 게임이 다시 자유화되던 시기였다.
병무청에 국외카지노 게임 허가를 받고서 태국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동생과 둘이서 함께하는 3박 4일의 카지노 게임이었다.
한국에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시절에,
카오산로드에는 자유로운 서양인 배낭카지노 게임자들이 가득했다.
만약 코로나가 없었더라면, 내가 2020년에 저들처럼 카지노 게임했을까.
카지노 게임 내내 떠나지 못했던 카지노 게임의 미련에 사로잡혔다.
배낭을 메고서 자유롭게 유랑하는 그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카오산에는 나이소이라는 유명한 갈비국수 식당이 있다.
동생과 계속 아쉽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배낭 2개를 맨 홀란드 할아버지를 만났다.
은퇴 이후 동남아를 1년 동안 카지노 게임하고서 네덜란드로 돌아간다던,
전형적인 서양 할아버지 카지노 게임자였다.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서로 간단한 호구조사와, 각자의 카지노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떠나지 못했던 지난 카지노 게임 이야기를 하자 그는 정말로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젊었을 때 카지노 게임하라며,
자신은 젊었을 적 카지노 게임을 하지 않았던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항까지 1시간 반이 걸리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버스가 공항에 도착하고 홀란드 할아버지와 이별을 고했을 때,
못 갔던 지난 카지노 게임 다시 떠나리라 다짐했다.
태국에서 돌아온 후 다시 일상을 살았다.
공익복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영화를 보고 만들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틈틈이 카지노 게임 준비했다.
들어두었던 군적금의 만기 상환액을 계산했다.
나라에서 돈을 보태 주어 1,000만원을 조금 넘기는 돈이 손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러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이 정도면 중동이 아니라 세계일주도 가능하겠는데?’
세계일주라는 단어에 망각했던 어느 책이 떠올랐다.
조금 더러운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우리 집 안방 화장실에는 항상 책이 있었다.
내 인생 독서의 반절 이상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2008년에 나온 ‘아마존으로 가다’라는 책과
2006년에 발행된 ‘세계일주 바이블’이라는 책이었다.
읽었던 책을 보면 배낭을 메고서 카지노 게임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책을 보면서 항상 칠레의 ‘발파라이소’라는 곳에 가고 싶었다.
세계일주가 아니라면 평생 못 가볼 것 같았다.
결국 남미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